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안기부 발표 부부 아들 낀 고정간첩 7명 검거>
진도거점 24년 암약
대남간첩 아버지에 포섭 후 두 차례 월북
= 국가안전기획부는 31일 전남 진도 지역을 중심으로 24년간 암약해 온 고정간첩 박동운(36. 농협 진도군지부예금담당) 등 일가족으로 구성된 고정간첩단 7명을 검거, 이중 5명을 구속송치하고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박동운은 6.25때 자진월북, 간첩으로 6차례나 남파된 아버지 박영준(60)에게 포섭돼 지난 65년 5월 14일과 71년 10월 3일 두 차례 목포 및 진도에서 입북, 북괴노동당에 입당한 뒤 남파돼 암약해왔다.
박은 북괴에서 "공무원으로 임용돼 부락유지 및 공무원 등 영향력 있는 인사를 포섭하고 친목계를 조직, 지하망을 구축하라" 지령과 함께 무전기, 암호문건 및 현금, 금반지, 금비녀 등 공작금품을 받고 72년 6월 농협 진도군지부에 취직한 후 민심동향과 전남대 등 학원소요 상황, 목포 등 남해안 일대의 군경경비상황, 농협기구, 대차대조표손익계산서 등 각종 기밀정보를 수집, 암호전문과 무인포스트를 통해 북괴에 보고해 왔다.
- 경향신문 1981. 7. 31 1면
▲ 1987년 7월 31 경향신문 1면에 발표된 진도간첩단 사건 전체 내용 ⓒ 경향신문
1981. 7. 31.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는 언론을 통해 "24년 동안 전남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암약해 온 고정간첩 일당 7명을 검거. 이 고정간첩망은 해방직후부터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6.25때 서울에서 우익 인사 등을 학살한 후 북괴의용군에 입대, 자진 월북한 진도군 출신 박영준(60세)이 대남간첩으로 선발돼 1957년 5월부터 1976년 10월 까지 6차례에 걸쳐 고향인 진도에 침투하여 조직"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이 자체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를 통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받은 인원은 모두 13명이다. 이들은 1981년 3월 9일에서 5월 12일경까지 연행되었고, 길게는 약 2달가량 영장 없이 불법 조사받은 피해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학원간첩편(Ⅵ) 국정원)
당시 사건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의 핵심 피의자였던 박동운의 범죄 혐의는 여러 개 있었는데, 특히 중요한 범죄 사실은 간첩혐의였다. 그리고 그 간첩혐의를 수행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국정원이 증거로 내놓은 것이 바로 라디오와 진도농협의 대차대조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증거는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박씨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조사를 통해 당시 국정원에서 제시한 증거가 엉터리였다고 주장했다.
(라디오 관련해서) 재판과정에서도 (내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없었고, (무전기를) 부쉈다는 망치, 그것도 망치머리도 없는 자귀(망치의 손잡이)하고, 헌 라디오가 나온 것인데 자귀는 외할아버지가 연장으로 쓰던 거였고, (중략) 또 1979년 진도농협 대차대조표 등을 본인이 전자복사기로 복사해서 (북한공작원에게) 줬다고 했는데, 당시 진도농협에는 복사기가 없었고 묵지를 사용하던 시절이다. 재심청구시 원복(당시 진도농협에 복사기가 없음을 증명해주는 서류)를 제출할 것이다.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학원간첩편(Ⅵ) 국정원)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박씨를 비롯해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이들은 1981년 당시 재판에서도 국정원의 불법적 수사가 있었음을 주장했다.
변호인 박종창
피고인 박동운에게
문 : 기록에 편철된 1981. 6. 9자의 반성문은 어떻게 하여 쓰게 되었나요.
답 : 검사님이 그 전에 안전기획부에서 썼던 1981. 5. 19자의 반성문을 그대로 읽어주기도 하고, 보고 베끼라고 해서 그대로 보고 쓴 것뿐이고 안전기획부 과장이라는 사람이 괜히 고생하지 말고 부인할 생각도 말고 순순히 시인해라, 그러면 10년 정도 살면 될 것이라고 해서 그대로 시인하고 말았습니다.(서울지법 제5차 공판조서, 공판기록 502~503)
▲ 2009년 11월 13일,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던 날. 오른쪽부터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 피해자 박동운씨, 한등자씨. ⓒ 진실의힘 제공
이 사건으로 함께 연행되었던 박미심, 한등자 역시 같은 재판에서 동일한 주장을 했다.
변호인 박종창
문 : 전에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조사 받은 일이 있지요.
답: 예
문 : 그때 사실대로 진술했나요.
답 : 사실대로 진술치 않았습니다.
문 : 왜 그랬나요.
답 : 수사기관에서 없는 사실을 진술하라고 해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니까 진술서 등을 써주면서 그대로 베껴 쓰라고 해서 고문에 못 이겨 베껴 쓰고 없는 사실을 진술하게 된 것입니다.
문 : 그리고 그곳에서 반성문도 썼지요.
답 : 예, 반성문을 써주면서 베껴 쓰라고 해서 그대로 보고 쓴 것입니다.(위 같은 공판, 박미심의 증언, 공판기록 297~298쪽)
문 : 증인은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조사받은 일이 있지요.
답 : 예.
문 : 그 곳에서 진술서를 작성했지요.
답 : 예.
문 : 그것은 사실대로 증인이 쓴 것인가요. 그랬나요.
답 : 수사관이 써 준 것을 보고 베껴 쓴 것입니다.
문 : 피의자신문조서의 내용은 어떤가요
답 : 고문에 못 이겨서 그렇게 진술된 것입니다.
문 : 반성문도 썼지요.
답 : 수사관들이 써주면서 베껴 쓰라고 해서 쓴 것입니다.(위 같은 공판, 한등자의 증언, 공판기록 306쪽)
언론의 보도대로 '24년간 암약활동'을 해오던 위험천만한 간첩단이라면 이들의 범죄사실 가볍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언론은 이들의 간첩행위가 어디까지 행해졌는지 이에 대한 추가 취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박씨 등이 벌였다는 간첩 활동들은 '농협 등에 침투한 사실'과 '북한을 여러 차례 왕래하며 정보를 누설한 혐의' 등인데 발표된 내용만 보면 그 간첩혐의 비중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 어디에도 이들의 간첩행위에 대한 후속보도나 추가취재 보도는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재판이 공개재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재판이 열리는 동안이라도 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 피고인 등이 벌이는 범죄사실에 대한 공방을 보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문 가혹행위를 통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에 대한 후속보도나 추가취재는 결국 없었다.
박씨 가족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뒤 작성된 경향신문의 2009년 11월 15일자 기사가 눈에 띄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직후 박씨를 찾아가 취재한 경향신문 기자는 조작된 사건으로 인해 갈가리 찢겨진 그와 가족의 고통에 대해 취재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과거 이 사건이 간첩사건으로 발표될 당시 아무런 의심이나 비판적 여과 없이 공안기관의 발표 그대로 기사화 한 것에 대한 일말의 입장이나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 박 씨의 재심 무죄선고 이후 박 씨를 취재한 경향신문 ⓒ 경향신문
우리는 과거청산 활동을 통해 수백 건의 재심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상당수, 아니 대부분의 재심사건은 무죄로 밝혀지고, 그 밝혀진 내용에 대해 판결문을 써내려간 판사들 중에는 사법부의 과거 판결에 대한 특별한 사죄의 말을 전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자신들이 판단하거나 재판하지 않은, 선배 판사들의 과오에 대해서 법조인의 한사람으로서 사법부가 저지른 실수, 과오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다.
수원지법 형사12부(부장 김병찬)는 6일 사건 1차 공판준비기일에서 "법원의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죄송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 2020. 2. 6 연합뉴스
언론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직 김병찬 부장판사와 같은 언론의 진심어린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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