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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게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나이가 들면 원래 말씀이 많아지시나요?

등록|2021.12.03 09:37 수정|2021.12.03 09:49
아버지는 올해 일흔 하고도 셋이시다. 여전히 일을 하고 계시고, 하시는 일도 몸을 쓰시는 일이다. 자기 관리에 꾸준하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시는 거지만 따지고 들면 이런 건강도 집안 내력인 듯싶다. 할아버지가 여든여덟, 할머니가 일 년이 모자라는 백수를 누리셨으니 아버지의 건강한 신체는 누가 봐도 타고나신 게 맞다.
 

아버지아버지와 딸 ⓒ pixabay (상업적 사용 무료)


아버지는 요즘도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일을 하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동안 많이 걱정도 됐지만 아버지는 어느새 홀로서기를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다. 예전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어머니 병환 때에는 집에서 반주 드시는 것도 어머니 눈치를 보며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치료로 아들 집인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면 조금은 편하게 약주를 드시곤 하셨다. 아들인 나를 방패 삼아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해방된 감동을 조심스럽게 느끼며 그렇게 며칠 동안은 독립된 자신을 즐기시곤 하셨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런 아버지가 며칠이라도 편하게 계시다 가길 하는 마음에 어머니만큼이나 신경이 쓰였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간병하시는 동안에는 일도 할 수 없었고, 잠깐의 외출조차도 쉽지 않았다. 자유 시간이 거의 없으시다 보니 오히려 일하고 다니실 때보다 체력도 약해지시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하시는 듯 보였다. 그렇게 당신을 힘들게 하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정말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진 슬픔을 안고서 무척 힘들어하셔서 난 오히려 더 나쁜 일이 생길까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강하셨고, 다시 일을 시작하시면서 어느새 조금씩 활기를 찾으셨다. 오히려 가끔씩은 고된 일을 며칠씩 쉬지 않고 하시는 모습을 보면 이젠 쉬셔도 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 일을 꾸준히 하신다. 연세에 비해서 열정적이고, 활동적으로 사시는 모습을 보면 자식 된 입장에서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른다.

할아버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일흔이 넘으신 나이가 될 때까지도 일을 하셨고, 하셨던 일은 어부라고 들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작은 배였지만 할아버지께선 늦은 나이까지 고기를 잡으러 다니셨다고 하셨다. 이런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아버지도 늦은 나이임에도 꾸준히 일을 하신다.

젊어서 사업에 성공했지만 나이가 들기 전에 쓰디쓴 실패로 가족들을 고생시킨 게 아직까지 마음 깊이 상처로 남아계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일을 하시면서 당신이 버신 돈으로 자식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사주려고 애쓰신다. 그런 아버지 마음 때문에 난 항상 미안하고, 감사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외모는 할아버지보다 할머니 쪽을 더 닮은 듯 하지만 성격은 딱 할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드시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다른 점이 생겼다. 아버지는 수다쟁이가 되셨다. 나이가 드시면서 새롭게 생긴 버릇이다.

예전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아버지가 어려웠다. 당시 당신께서 밖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집에서는 말씀이 거의 없으셔서 더 어려워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가 좋았던 건 어머니에게 야단맞는 자식들을 볼 때면 따지지 않고 자식 편을 들어주셨던 자상했던 아버지이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병환을 얻으시고부터는 아버지는 말씀이 많아지셨다. 서울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당신의 며느리와 나란히 소파에 앉으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말씀을 하실 정도였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아버지의 말벗이 되어 드렸지만 너무 길어지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에 얘기하는 아버지를 피해 TV를 보거나, 아버지의 말씀 중에 슬쩍 자리에서 벗어나기도 했었다.

아내에게 눈치가 보였지만 아버지의 긴 대화에 적응이 되지 않아 얘기가 길어질법하면 그렇게 번번이 자리를 피했다. 시간이 가도 아버지의 수다는 줄지 않았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아버지는 많은 말씀을 하시는 타입으로 바뀌어갔다. 마치 당신의 존재를 주변 사람들에게 각인이라도 시키듯. 했던 말을 또 하고 이야기의 요점 없이 흐지부지 정리되지 않는 말씀이 자꾸 늘어나셨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이런 대화법이 단순하게 나이가 드셔서 바뀐 거라는 생각만 해왔다. 하지만 원래부터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는 걸 좋아하셨고, 오히려 살아오면서 과거 사회적인 분위기와 아버지라는, 가장이라는 자리에서 당신께서 가진 본성의 많은 부분을 참고 살아왔을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긴 어머니의 간병으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생활을 포기해야만 했고, 이젠 홀로서기를 하고 계신 아버지에게는 대화할 상대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화를 드릴 때마다 그리고 찾아뵈었을 때마다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 요즘은 신이 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뵐 때마다 그리 건강하게 계시는 게 감사할 뿐이다. 길어지는 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나 외로움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요즘은 부쩍 전화를 더 자주 하게 된다. 아버지의 긴긴 수다를 들어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자식 마음을 아셨는지 오히려 최근에는 말수가 조금 줄어드셨다. 가끔 술 한잔 하시면서는 다시 길어지는 수다지만 말씀을 줄이는 아버지가 요즘은 더 안쓰럽다.

앞으로 아버지께 얼마나 시간이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오랜 시간 그 수다를 들어줄 마음의 준비를 늘 하고 있는 아들이 있으니 편하게 얘기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내 아버지가 내 할아버지보다는 곁에 오래 머물면서 수다를 떠셨으면 좋겠다. 미리 알고, 깨달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그런 아버지를 위해 귀를 내어 놓을 마음을 항상 갖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오히려 외모는 내가 더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예전에 집안 어른들이 이야기하곤 했었다. 아마도 얼굴 골격이나 상체가 꽤나 힘쓸 것 같이 두꺼워서 그런 것 같다. 사실 할아버지는 왕년에 힘 좀 쓰셨다고 들었고, 아버지 말로는 젊었을 때는 동네 씨름대회에도 여러 번 출전할 만큼 동네에서도 힘 좀 쓰시는 분으로 알려지셨다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나는 상체만 보면 힘 좀 쓰게 생겼어도 정작 힘쓰는 일에는 잼뱅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들으면 서운하실 수도 있지만 난 힘쓰는 건 할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 같다. 난 할아버지보다 오히려 아버지와 더 닮아가고 있다. 말 많이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난 아버지의 수다가 싫지 않다. 이렇게 수다도 닮나 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에 함께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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