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압축 성숙으로 풀어야
[제언] 민주화 이후 30여 년, 새로운 사회인식론이 필요하다
얼마 전 교사운동에 헌신하는 한 교사가 "진보 교사였던 내가 보수적으로 변한 걸까"라는 글을 기고한 내용을 흥미롭게 읽었다. 내 입장에서 이 문제를 인식프레임이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우리 사회와 교육이 2개의 진보적 가치의 조화를 생각해야 하는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전제해야 할 점은, 우리 사회가 모든 지점에서 부족하던 절대 후진국 시대를 통과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30여 년간 민주화 시대에 하나의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 )'의 관점에서 그것의 최대주의적 실현이 절대선이었던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가 다양한 가치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7년여 간의 행정경험에서 비슷한 딜레마를 느끼고 있다. 많은 문제들이 아주 후진적 상황이었을 때는 해법 자체가 명확해서 그 방향으로 돌진적 결정을 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단계를 지나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는데, 단일변수 분석보다는 다변수 분석이 필요해졌다고 생각한다.
경제지상주의가 지배하던 권위주의 후진국 시기
우리 사회가 절대후진국이었던 때는 국가권력이 극단적인 성격을 띠면서 작동했다. 예컨대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는 '근대화'라는 하나의 가치에만 기초해 정치 극단주의 성격을 띠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식의 근대화 지상주의 혹은 경제 지상주의는 '민주주의'를 포함하여 일체의 다른 가치들을 부정하거나 억압했다. 교육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교육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단일한 관점으로 정책을 결정한 후 하향식으로 학교에 내려 보내면, 학교와 교사는 그 정책의 충실한 말단 수행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우리 사회가 절대후진국을 벗어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면서 이러한 권위주의적 상태 역시 극복되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이 멀고, 기대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권위주의 시대 때 억압됐던 중요한 가치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런데 민주화 30년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와 사회가 상당한 수준에 오른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복합방정식 문제가 많아지면서 그 해법 또한 두 개의 가치 혹은 세 개 이상의 가치를 조화시키거나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노력이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얼마 전 유엔 무역개발기구(UNCTAD)가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선진국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고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감으로서 이러한 사회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갖게 된다.
학교는 하나의 작은 사회이다. 이 학교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여러 가치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학교 주체들의 권리와 이해 간에 조화와 균형이 찾아지며,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존중받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교육부가 모든 교육정책 결정 권한을 가지고 군림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학교는 다른 다양한 가치들이 억압되었다. 학생 인권, 학부모 참여, 성적에 따른 차별이 아닌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 존중, 학교의 자율성, 다양한 교육 주체들 간의 수평적인 관계 등의 가치가 억압되거나 도외시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 이후의 학교는 권위주의 시대에 억압되었던 이러한 가치와 그것을 담당하는 주체들을 존중하는 수평적 문화의 학교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다만 이러한 가치의 복원과 존중, 확대의 과정에서 하나의 가치 혹은 하나의 이해추구에 기초하여 이를 극단주의적으로 실현하려 하거나 또는 하나의 가치만을 배타적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학교가 기업처럼 '황제경영'이 있어 이를 극복하려는 민주적 거버넌스 구축이 중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학교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책임자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최소한의 운영 권한마저도 훼손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억압된 개인의 이익과 이해 찾기도 이제 당연하게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은 이제 모두의 권리이자 이익 및 이해를 옹호하고 확대하는 자연스러운 창구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나와 내가 속한 집단(직위, 직렬, 직군 등)에 부담이 가중되거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극단적 입장도 나타나곤 한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과 지역의 협소한 이해와 권리만 최대한 실현하려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학교폭력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은 오전에 싸운 다음에 오후에 화해해서 사이좋게 놀고 있는데, 오히려-각종 법적 권리수단과 자신의 자식만을 생각하는-가해학생 부모와 피해학생 부모는 용서와 화해 없이 소모적인 감정싸움을 하며 소송전도 불사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피해학생의 피해가 충분히 보호되지 못해 안타까운 경우도 많지만, 극단화된 양상도 많다. 강남의 어느 학교에서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의 수가 6명인데, 학폭위에 6명의 변호사가 나타났다는 웃픈 전언도 있었다. 이것이 민주화 시대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일종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일반에서 노동조합의 문제도 이런 원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노동조합에는 2가지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하나는 조합원의 권리를 지키고 이해를 증진하는 이익집단으로서의 성격이다. 다른 하나는 그 권리 및 이해투쟁이 갖는 공익적 성격이다.
우리 사회가 절대후진국이었던 1970년대에는 노동조합의 모든 권리와 이익 확대 노력이 모두 불법이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100% 공익적일 수 있었다. 여기서 공익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최대 약자로서 노동자 권리 투쟁 자체가 전체 사회구성원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동조합 시대가 열리고, 노동조합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단계로 이행하였다. 노동자계급의 내부 구성의 분화도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하층을 점유하는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불안과 처우개선이라는 공적 영역의 문제제기가 있고, 한편에선 대기업 노조는 자신의 이익 극대화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 및 전체 사회의 공동체적 이익과의 균형점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로 가고 있다. 고용불안이 극심한 시기에 '고용세습' 문제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못한 2030세대는 기존의 연공서열제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의 새로운 상황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이런 변화된 상황의 인식이 필요하다.
권리와 이해추구행위 존중하면서 공동체적 관점 가져야
이렇듯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다 보니, 자칫 학교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갖게 되기도 한다. 초·중·고 학교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의 입장에서 단일한 가치보다는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면서 그 가치 간의 조화와 균형 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사회는 개개인의 최대이익과 권리를 보장해야만 평화롭게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가령 대학생들의 기숙사를 지으려 할 때 대학 외부의 주택소유자들이나 임대업자들이 이를 반대하는 행위가 그 예가 될 것이다. 특수학교와 탈북학생을 위한 학교를 지으려는데 이를 혐오시설로 간주하면서, 집값 하락을 우려해 반대하는 경우도 유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온전한 성숙은 구성원 서로가 양보하고 협력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가 공동체 관점에서 조율될 때만이 구현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민주·자유의 가치와 함께 공화(共和)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당연하고 오랜 명언이다. 여기서 사회구성원이 개인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나 권리를 개인이나 집단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 혹은 공동체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중요하게 된다. 특히 미래세대에게는 더 그러하다. 미래세대에 시민교육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권리만이 아니라 권리와 책임의 균형을 생각하는 미덕이 함양돼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사적 이해와 권리의 관점과 동시에, 공공적 관점에서 현실의 쟁점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민주사회는 개개인의 권리와 이해, 이익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다. 억압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는 권위주의 사회다. 이런 점에서 민주사회는 구성원이 억압받지 않는 방식으로 개개인과 집단이 자신의 권리와 이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성숙한 민주사회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즉 억압받지 않은 개인과 집단의 이해와 권리 추구 행위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가지 않고 공화(共和)적 단계 혹은 공동체적 공존의 단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다원성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존중이 필요하며, 서로가 쟁투하지만 모든 주제에서 최대한 비(非)적대적 방식으로 조화와 접점을 찾아내는 노력도 필요하다. 다원성 존중의 미덕이 필요한 것이다.
예전에 서울교육청과 언론사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비에스타(Biesta) 교수가 현대 민주시민교육의 한 가치로 '성숙성(grown-up-ness)'을 제기해깊은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는 성숙성을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두지 않고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계에 존재하는 유아적 방식이 세계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뒤쫓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방식은 우리의 욕망(욕구, 권리, 이해)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성숙한 방식이란 우리의 욕망을 점검하고, 의문을 갖고, 필요하다면 전환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기성찰적 절제능력을 배우는 것이 '중간 지대로서의 학교'여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도 이러한 '절제'가 필요하다. 미래 학생들은 특히 이러한 미덕을 배우고 체질화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일상에서 많은 공간들이 이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정치의 영역이 그렇게 간주된 지는 오래이지만, 사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권위주의적 권력과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우리의 권리와 이익을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사회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 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이해에 대한 감수성을 갖되, 하나의 가치에 대해 최대주의적 실현이나 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의 극대화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인식도 함께 갖춰야 한다. 이해와 권리의 다원성과 상호대립, 자기제한성, 협의를 통한 접점 찾기의 자세가 점점 더 필요해지고 있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며, 다양한 가치들의 접점 찾기 시도가 더 필요하다. 물론 어느 주제에서, 어느 지점에서 이러한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이런 고민을 가지면서 행위 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 존중에 기반한 다원성 존중교육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상 정치학자들은 자유화→민주화→ 다원화로 단계구분을 한다. 통상 미국식의 정치발전을 염두에 두는 것인데,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민주화의 긍정성-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살아 있는 사회이다-을 계승하면서도 다원성을 존중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로 구성된 민주주의
나는 민주주의에는 2개의 정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이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정치가 필요하다. 1987년 이후 지난 30년 동안 한국민주주의는 투쟁의 정치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역동적인 민주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공존의 정치의 영역을 확대해갈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물론 정치는 쟁투의 과정이기 때문에 투쟁의 정치가 부재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를 어떻게 배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나는 투쟁의 정치 대 공존의 정치가 '7대 3' (과도한 단순화를 무릅쓰고) 정도로 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문재인 정부에게도 이런 과제가 주어졌으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공존의 정치를 실현해내는 것 자체도 정치적 역량이다). 적폐청산의 강렬한 국민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섣부르게 공존의 정치를 시도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의 딜레마도 여기에 있었다. 한편으로 보수가 과거의 프레임을 충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고, 때로는 촛불시민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도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공존의 정치는 바로 적대적 상대방까지를 인정하는 다원성 존중 위에서 가능할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병목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정치는 쟁투이고 선거를 통해 승자를 가리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정치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1987년 이후 한때 정치지도자들은 여의도에 얼마나 많은 군중이 모이는가를 기준으로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당연히 수백억 원의 돈이 들고 부패가 개입됐다. 지금은 물론 우리 정치가 그런식의 후진국형 동원정치는 넘어섰다. 이후에는 TV토론이 중요해졌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 적극적인 정치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 쌍방의 투쟁형태도 달라지고 있다. '세상은 넓고 투쟁할 일은 많기 때문에, 굳이 모든 것을 다 전면적 투쟁으로 해결할 필요는 없다.' 이런 점에서도 공존의 정치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러한 현실 재인식이 투쟁의 정치를 통한 민주주의 전진이 멈추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 정치현실에서 엄청난 정치불신이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민주주의에서 목마르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국민들이 여전히 높은 평등주의적 기대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전진을 위한 현실조건의 복잡성이 증대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많은 문제들이 민주주의의 절대적 후진성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 다양한 가치의 균형점을 찾아가는식으로 복잡해졌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선택으로 좋은 사회와 좋은 정치를 만들 수 없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문제의 솔루션도 다양화됐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의 패착이라고 하는 부동산 문제만 해도 그렇다. 보수는 공급확대정책, 진보는 투기 규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양자의 단순 대립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시장과 경제는 복잡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러한 조건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전진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진전했지만, 여전히 더 높은 민주주의, 더 깊은 민주주의, 더 넓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야 한다. 국민들은 여전히 목마르기 때문이다.
압축성장이 아니라 압축성숙으로
이런 점에서 우리가 모두 학교와 사회의 문제를 풀어갈 때 높은 기대를 견지하면서도 절대후진국처럼 단일방정식이 아니라 복합방정식으로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는 점을 재인식할 필요가있다. 그럴 때 비로소 해법 찾기도 가능하고, 다양하고 유연한 접근이 가능해지며, 복합방정식이 안고 있는 여러 가치와 요인들 또한 개방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압축성장의 성공사례 국가다. 압축성장을 넘어 '압축성숙'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다.
얼마 전부터 나는 "우리 사회와 교육이 2개의 진보적 가치의 조화를 생각해야 하는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7년여 간의 행정경험에서 비슷한 딜레마를 느끼고 있다. 많은 문제들이 아주 후진적 상황이었을 때는 해법 자체가 명확해서 그 방향으로 돌진적 결정을 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단계를 지나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는데, 단일변수 분석보다는 다변수 분석이 필요해졌다고 생각한다.
경제지상주의가 지배하던 권위주의 후진국 시기
우리 사회가 절대후진국이었던 때는 국가권력이 극단적인 성격을 띠면서 작동했다. 예컨대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는 '근대화'라는 하나의 가치에만 기초해 정치 극단주의 성격을 띠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식의 근대화 지상주의 혹은 경제 지상주의는 '민주주의'를 포함하여 일체의 다른 가치들을 부정하거나 억압했다. 교육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교육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단일한 관점으로 정책을 결정한 후 하향식으로 학교에 내려 보내면, 학교와 교사는 그 정책의 충실한 말단 수행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우리 사회가 절대후진국을 벗어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면서 이러한 권위주의적 상태 역시 극복되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이 멀고, 기대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권위주의 시대 때 억압됐던 중요한 가치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런데 민주화 30년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와 사회가 상당한 수준에 오른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복합방정식 문제가 많아지면서 그 해법 또한 두 개의 가치 혹은 세 개 이상의 가치를 조화시키거나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노력이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얼마 전 유엔 무역개발기구(UNCTAD)가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선진국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고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감으로서 이러한 사회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갖게 된다.
학교는 하나의 작은 사회이다. 이 학교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여러 가치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학교 주체들의 권리와 이해 간에 조화와 균형이 찾아지며,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존중받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교육부가 모든 교육정책 결정 권한을 가지고 군림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학교는 다른 다양한 가치들이 억압되었다. 학생 인권, 학부모 참여, 성적에 따른 차별이 아닌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 존중, 학교의 자율성, 다양한 교육 주체들 간의 수평적인 관계 등의 가치가 억압되거나 도외시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 이후의 학교는 권위주의 시대에 억압되었던 이러한 가치와 그것을 담당하는 주체들을 존중하는 수평적 문화의 학교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다만 이러한 가치의 복원과 존중, 확대의 과정에서 하나의 가치 혹은 하나의 이해추구에 기초하여 이를 극단주의적으로 실현하려 하거나 또는 하나의 가치만을 배타적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학교가 기업처럼 '황제경영'이 있어 이를 극복하려는 민주적 거버넌스 구축이 중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학교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책임자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최소한의 운영 권한마저도 훼손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억압된 개인의 이익과 이해 찾기도 이제 당연하게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은 이제 모두의 권리이자 이익 및 이해를 옹호하고 확대하는 자연스러운 창구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나와 내가 속한 집단(직위, 직렬, 직군 등)에 부담이 가중되거나 이익이 침해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극단적 입장도 나타나곤 한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과 지역의 협소한 이해와 권리만 최대한 실현하려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학교폭력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은 오전에 싸운 다음에 오후에 화해해서 사이좋게 놀고 있는데, 오히려-각종 법적 권리수단과 자신의 자식만을 생각하는-가해학생 부모와 피해학생 부모는 용서와 화해 없이 소모적인 감정싸움을 하며 소송전도 불사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피해학생의 피해가 충분히 보호되지 못해 안타까운 경우도 많지만, 극단화된 양상도 많다. 강남의 어느 학교에서 피해학생과 가해학생의 수가 6명인데, 학폭위에 6명의 변호사가 나타났다는 웃픈 전언도 있었다. 이것이 민주화 시대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일종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일반에서 노동조합의 문제도 이런 원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노동조합에는 2가지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하나는 조합원의 권리를 지키고 이해를 증진하는 이익집단으로서의 성격이다. 다른 하나는 그 권리 및 이해투쟁이 갖는 공익적 성격이다.
우리 사회가 절대후진국이었던 1970년대에는 노동조합의 모든 권리와 이익 확대 노력이 모두 불법이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100% 공익적일 수 있었다. 여기서 공익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최대 약자로서 노동자 권리 투쟁 자체가 전체 사회구성원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동조합 시대가 열리고, 노동조합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단계로 이행하였다. 노동자계급의 내부 구성의 분화도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하층을 점유하는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불안과 처우개선이라는 공적 영역의 문제제기가 있고, 한편에선 대기업 노조는 자신의 이익 극대화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 및 전체 사회의 공동체적 이익과의 균형점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로 가고 있다. 고용불안이 극심한 시기에 '고용세습' 문제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못한 2030세대는 기존의 연공서열제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의 새로운 상황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이런 변화된 상황의 인식이 필요하다.
권리와 이해추구행위 존중하면서 공동체적 관점 가져야
이렇듯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다 보니, 자칫 학교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갖게 되기도 한다. 초·중·고 학교교육을 책임지는 교육감의 입장에서 단일한 가치보다는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면서 그 가치 간의 조화와 균형 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는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사회는 개개인의 최대이익과 권리를 보장해야만 평화롭게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가령 대학생들의 기숙사를 지으려 할 때 대학 외부의 주택소유자들이나 임대업자들이 이를 반대하는 행위가 그 예가 될 것이다. 특수학교와 탈북학생을 위한 학교를 지으려는데 이를 혐오시설로 간주하면서, 집값 하락을 우려해 반대하는 경우도 유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온전한 성숙은 구성원 서로가 양보하고 협력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가 공동체 관점에서 조율될 때만이 구현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민주·자유의 가치와 함께 공화(共和)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당연하고 오랜 명언이다. 여기서 사회구성원이 개인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나 권리를 개인이나 집단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 혹은 공동체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중요하게 된다. 특히 미래세대에게는 더 그러하다. 미래세대에 시민교육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권리만이 아니라 권리와 책임의 균형을 생각하는 미덕이 함양돼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사적 이해와 권리의 관점과 동시에, 공공적 관점에서 현실의 쟁점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민주사회는 개개인의 권리와 이해, 이익을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다. 억압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는 권위주의 사회다. 이런 점에서 민주사회는 구성원이 억압받지 않는 방식으로 개개인과 집단이 자신의 권리와 이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성숙한 민주사회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즉 억압받지 않은 개인과 집단의 이해와 권리 추구 행위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가지 않고 공화(共和)적 단계 혹은 공동체적 공존의 단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다원성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존중이 필요하며, 서로가 쟁투하지만 모든 주제에서 최대한 비(非)적대적 방식으로 조화와 접점을 찾아내는 노력도 필요하다. 다원성 존중의 미덕이 필요한 것이다.
예전에 서울교육청과 언론사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비에스타(Biesta) 교수가 현대 민주시민교육의 한 가치로 '성숙성(grown-up-ness)'을 제기해깊은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는 성숙성을 "세계의 중심에 자신을 두지 않고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계에 존재하는 유아적 방식이 세계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뒤쫓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숙한 방식은 우리의 욕망(욕구, 권리, 이해)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성숙한 방식이란 우리의 욕망을 점검하고, 의문을 갖고, 필요하다면 전환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자기성찰적 절제능력을 배우는 것이 '중간 지대로서의 학교'여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도 이러한 '절제'가 필요하다. 미래 학생들은 특히 이러한 미덕을 배우고 체질화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일상에서 많은 공간들이 이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소로 변해가고 있다. 정치의 영역이 그렇게 간주된 지는 오래이지만, 사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권위주의적 권력과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우리의 권리와 이익을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사회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 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이해에 대한 감수성을 갖되, 하나의 가치에 대해 최대주의적 실현이나 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의 극대화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인식도 함께 갖춰야 한다. 이해와 권리의 다원성과 상호대립, 자기제한성, 협의를 통한 접점 찾기의 자세가 점점 더 필요해지고 있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며, 다양한 가치들의 접점 찾기 시도가 더 필요하다. 물론 어느 주제에서, 어느 지점에서 이러한 미덕을 발휘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이런 고민을 가지면서 행위 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 존중에 기반한 다원성 존중교육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상 정치학자들은 자유화→민주화→ 다원화로 단계구분을 한다. 통상 미국식의 정치발전을 염두에 두는 것인데,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민주화의 긍정성-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역동성이 살아 있는 사회이다-을 계승하면서도 다원성을 존중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로 구성된 민주주의
▲ 2017년 3월 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주최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 헌재 탄핵인용! 박근혜 구속! 황교안 퇴진! 19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가 열렸다. ⓒ 권우성
나는 민주주의에는 2개의 정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이다.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정치가 필요하다. 1987년 이후 지난 30년 동안 한국민주주의는 투쟁의 정치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역동적인 민주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공존의 정치의 영역을 확대해갈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물론 정치는 쟁투의 과정이기 때문에 투쟁의 정치가 부재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투쟁의 정치와 공존의 정치를 어떻게 배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나는 투쟁의 정치 대 공존의 정치가 '7대 3' (과도한 단순화를 무릅쓰고) 정도로 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문재인 정부에게도 이런 과제가 주어졌으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공존의 정치를 실현해내는 것 자체도 정치적 역량이다). 적폐청산의 강렬한 국민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섣부르게 공존의 정치를 시도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의 딜레마도 여기에 있었다. 한편으로 보수가 과거의 프레임을 충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고, 때로는 촛불시민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도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공존의 정치는 바로 적대적 상대방까지를 인정하는 다원성 존중 위에서 가능할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병목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정치는 쟁투이고 선거를 통해 승자를 가리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정치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1987년 이후 한때 정치지도자들은 여의도에 얼마나 많은 군중이 모이는가를 기준으로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당연히 수백억 원의 돈이 들고 부패가 개입됐다. 지금은 물론 우리 정치가 그런식의 후진국형 동원정치는 넘어섰다. 이후에는 TV토론이 중요해졌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 적극적인 정치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 쌍방의 투쟁형태도 달라지고 있다. '세상은 넓고 투쟁할 일은 많기 때문에, 굳이 모든 것을 다 전면적 투쟁으로 해결할 필요는 없다.' 이런 점에서도 공존의 정치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러한 현실 재인식이 투쟁의 정치를 통한 민주주의 전진이 멈추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우리 정치현실에서 엄청난 정치불신이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민주주의에서 목마르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국민들이 여전히 높은 평등주의적 기대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전진을 위한 현실조건의 복잡성이 증대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많은 문제들이 민주주의의 절대적 후진성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 다양한 가치의 균형점을 찾아가는식으로 복잡해졌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선택으로 좋은 사회와 좋은 정치를 만들 수 없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문제의 솔루션도 다양화됐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의 패착이라고 하는 부동산 문제만 해도 그렇다. 보수는 공급확대정책, 진보는 투기 규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양자의 단순 대립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시장과 경제는 복잡하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러한 조건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전진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진전했지만, 여전히 더 높은 민주주의, 더 깊은 민주주의, 더 넓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야 한다. 국민들은 여전히 목마르기 때문이다.
압축성장이 아니라 압축성숙으로
이런 점에서 우리가 모두 학교와 사회의 문제를 풀어갈 때 높은 기대를 견지하면서도 절대후진국처럼 단일방정식이 아니라 복합방정식으로 문제를 풀어내야 한다는 점을 재인식할 필요가있다. 그럴 때 비로소 해법 찾기도 가능하고, 다양하고 유연한 접근이 가능해지며, 복합방정식이 안고 있는 여러 가치와 요인들 또한 개방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압축성장의 성공사례 국가다. 압축성장을 넘어 '압축성숙'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실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다.
▲ 조희연 서울교육감. ⓒ 권우성
덧붙이는 글
필자는 서울시교육감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