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만동포옹호동맹'조직, 현지조사활동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 26] 총독부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고 뒤쫓는 시선이 많아졌다
▲ 민족대표 박동완 ⓒ 자료사진
일본은 열도내의 아이누족 합병→류우쿠합병→타이완 합병→대한제국 병탄에 이어 만주를 넘보기 시작했다. 만주에는 구한말 이래 많은 한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봉오동ㆍ청산리대첩을 비롯하여 각종 무장항일전이 가능했던 배경이고, 항일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925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와 중국 동삼성의 지배자 장작림은 만주에서 한인독립운동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일본이 요구한 '미쓰야 협약'을 맺었다. 주요 내용은 장작림은 만주에서 한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면 반드시 일본영사관에 넘길 것, 일본은 독립운동가를 인계받는 동시에 그 대가로 상금을 지불할 것, 상금 중 일부는 직접 체포한 관리에게 지불할 것 등이 규정되었다.
▲ 장작림(1873-1928) ⓒ 미상(저작권해제)
국내의 민족운동 세력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지 않았다.
1927년 12월 9일 조선교육회관에서 신간회가 중심이 되고 각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여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창립, 안재홍을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박동완과 윤치호가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다.
박동완은 현지 조사를 위해 특파원 자격으로 이도원과 함께 1월 17일 열차편으로 안동현, 봉천, 장춘, 길림, 하얼빈, 해림 등 각 지방을 답사하였다. 봉천에서는 만주조선인대회 상무집행위원들과 회견하고 중국 책임 당국과 각 언론기관을 방문하여 야만적인 조선인 학대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2월 7일 무사히 귀환한 박동완과 이도원은 13일 수표교 회관에서 보고대회를 열고 그간의 활동 상황과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당시의 언론보도이다.
시내 수표정에 있는 재만동포옹호동맹에서는 13일 오후 4시 반에 그 회관 안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만주특파원 박동완, 이도원 양씨의 조사한 보고를 들은 후 다음과 같은 모든 사항을 협의 또는 결의를 하였다더라.
-. 만주조선인 문제는 객년에 비하여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금후 항상 곤란한 문제가 지속될 것으로 인함.
-. 이에 대한 구체적 대책은 기정한 중국입적 기회의 방침에 의하여 하되 상무위원회에서 필요한 방법은 강구하여 적의한 기회에 부회에 제안케 함.
-. 동정금은 00수집하되 그의 처치(處置)는 아직 보유함.
-. 본 동맹은 지방동맹과 구별하기 위하여 '재만동포옹호동맹중앙부'로 칭하고 전조선 통일적 민활을 기함. (주석 15)
박동완은 일제와 만주군벌의 합작으로 재만동포들의 위기를 구출하고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지 조사를 다녀오는 등 당시 국내의 민족운동가 누구 못지 않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총독부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고 뒤쫓는 시선이 많아졌다.
주석
14> <기독신보>, 1927년 12월 21일.
15> <중외일보>, 1928년 2월 15일.
덧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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