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발언에 공감하는 댓글, 당혹스럽다
성폭력 피해자에 공감하기 '싫은' 사람들... 밑바닥에 깔린 '불편감'의 정체
▲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부인인 김건희씨가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허위 학·경력 의혹 논란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뒤 당사를 나오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서울의소리> 이명수 기자가 공개한 김건희씨와의 통화 녹취록을 들으며 여러 번 놀랐다. 특히 안희정 전 지사로부터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입은 김지은씨에 대한 언급은, 남편의 대선 출마 선언 이후 여성혐오와 뒤얽힌 각종 의혹에 시달려 온 당사자의 시각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사담으로 본다면 오히려 평소의 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아닐까.
그러나 나를 더 당혹스럽게 한 건 녹취록을 듣고 호감을 느꼈다는 댓글들이었다. 그 중 한 댓글은 김씨의 발언에 이같이 호응했다. '당연한 말이다. 미투 운동이 시작되고부터 가짜들이 너도 나도 미투라며 나서서 남성들이 피해를 본다. 짜증나고 공감하고 싶지도 않다.' 표현을 좀 순화했다. 평소 젠더문제를 다루는 기사를 주의 깊게 보고 있어서 낯선 반응은 아니었는데, 이날은 문득 무른 살이 손톱으로 긁히는 기분이었다. 허지웅 작가의 칼럼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설사 흠결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얼마든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 낙인찍을 수 있다. 나쁜 피해자, 착한 피해자를 나누고 순수성을 측정하려는 시도의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피해자의 요구나 피해자가 상징하는 것들이 강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면, 그런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너무나 손쉽게 나쁜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겨레, 2016.10.19. '순백의 피해자는 없다' 중)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가 피해를 인정받으려면 법적 판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걸리는 구석 없이 완벽하고 순수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인민재판'이 있다. 그리고 성폭력 문제에서 이 잣대는 더욱 엄격해진다. 여성을 악녀, 즉 '꽃뱀' 아니면 조신한 숙녀로 전형화하는 구도와 '순백의 피해자' 프레임은 너무도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댓글작성자의 말은 차라리 솔직했다. 그는 공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가해자로 몰리기 쉬운 사회분위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평화롭게' 잘 살았는데, 이제는 자신의 사소한 언행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점이 위협으로 다가오고,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계속 들리는 것이 지겨웠을 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댓글이 2차 가해가 된다는 사실도, 아직 나서지 못한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 일에 일조한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남성들이 불편을 느끼는 것은 사회 분위기가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전이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면 그 이유는 왜일까? 억압된 여성들이 억압을 설명할 사회적 언어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젠더폭력 문제가 그토록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는 건 그만큼 개인에 대한 문화적 억압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 수치심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수치심은 젠더에 따라 체계화된다’고 설명한다. ‘여성들에게 수치심을 부추기는 요구는 우리 문화가 여성에게 무엇을 허락하고 무엇을 허락하지 않느냐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남성에게 수치심을 부추기는 요구와 기대는 우리 문화가 원하는 남성성, 즉 남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떻게 생겨야 하는가 등을 바탕으로 한다’. 피해의 '순도'를 따지는 문화는 이러한 성 역할에 대한 압력과 한 데 얽혀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운다. ⓒ pixabay
그러나 편견은 여전히 도처에서 재생산된다. 어렵게 꺼낸 피해자의 언어는 "너도 덩달아 미투냐" "원해서 한 것 아니냐"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뻔하다"는 제3자의 재단으로 왜곡된다. 더 솔직해지자. 그 의심의 본질은 옳고 그름이 아닌 호불호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의 서사 앞에 쉽게 지치고 불편함을 느끼는 심리에는, 자신도 '쓰레기'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수치심과 두려움이 깔려 있다.
수치심 연구자인 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서 이런 말들을 '속삭이는 꼬리표(whisper-labels)'라고 불렀다. 이것은 사회공동체의 전형화에서 비롯된다. 그는 '헤픈 여자, 창녀, 쓰레기, 수다쟁이, 남자 잡아먹을 여자, 미친년, 호들갑쟁이, 노이로제 환자, 이기적인 얼음마녀 등등 상처를 주는 꼬리표는 셀 수 없이 많'고,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것을 자신이 위협받는 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강의실에 앉아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심지어는 아동인 경우에도 비난받고 외면받는다는 사실에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현실에서는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벽을 쌓는 게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중요한 건, 두렵다고 생각했던 불행이나 고통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도 다양한 전형화에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이다. 전형화는 사회구성원을 다양한 틀에 묶어 누구라도 걸려드는 '수치심 거미줄'을 만들고, 이렇게 양산된 수치심은 다시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해 개인을 억압한다. 사회의 꼬리표 붙이기에 자신 역시 희생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내가 불편했다
젠더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저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기 싫다'고 생각했었다. 응원했지만 직접 나서고 싶지 않았다. 이미 활활 치솟는 불길 속에 내가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을 화약처럼 지고 들어가, '(꼴)페미'라는 비난과 함께 연소되자니 생각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서서히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나 역시 내가 불편했던 거다. 인생 곳곳에 이끼처럼 낀 성적 수치심과 분노, 무력감, 자책을 되살려 마주하기가 꺼려졌고, 내 목소리가 피해의식과 이기심으로 매도되면 더 깊은 상처가 남을까 두려웠다.
돌아보면 젠더폭력은 일상이라 해도 과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수영장에서,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자애들에게, 집에서 친척에게, 중고등학교 때는 버스와 화장실에서 막을 새도 없이 성추행을 당했다. 등하굣길에 차로 따라오며 중요부위를 자랑하던 남자들은 하도 자주 만나 나중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유학시절 일하던 가게의 사장이 1년 내내 나와 친구들의 브래지어 끈을 더듬던 일, 대학원 때 노래방에 가면 여자 대학원생들을 옆에 끼려 하던 교수, 허리 교정치료를 받던 어느 날 느낀 평소와 다른 손길. 그러나 훨씬 큰 고통을 받은 내 주변의 여성들 앞에서 나는 그저 미안하도록 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끈덕지게 들러붙은 건 상대를 향한 분노가 아닌 자기비난이었다. 그런 일이 생긴 게 내 탓 같았다. 가게 사장의 이중성에 치를 떨면서도 "유학 끝날 때까지만 참으면 되니까"란 말로 서로 다독이던 어린 나와 친구들의 무력함, 내 의사를 무시하고 치료를 권력처럼 휘두르는 지압사에게 반발심을 사지 않으려 조심했던 어리석음.
"네가 말을 똑바로 했어야지."
"네가 어리바리하고 만만해 보여서 그런 일을 당한 거야."
내가 먼저 내게 말했고, 이런 자책은 여성의 몸이 겪는 일을 '여성의 몸가짐' 문제로만 치부하는 사회문화를 충실히 내면화한 결과였다. 그나마 타인의 비판적 시선을 빌려 나를 보지 않기로 맘먹게 된 건 그간 많은 이들이 젠더 폭력의 가시화에 나서준 덕분이다.
전형화의 굴레에 예외는 없다
▲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지난해 12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경력 부풀리기' 의혹에 대한 사과 입장을 밝힌 후 당사를 나서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강요하는 사회는 동시에 남성에게 '남성다움'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가부장제와 성 역할 고정관념은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과중한 짐을 지운다. 그리고 여성우월주의로 곡해되는 페미니즘의 본질은, 모든 구성원을 사회가 고정화한 성 역할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해방하는 데에 있다.
그렇게 보면 사실 사사건건 시끄러운 '방법상'의 찬반논쟁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그 역시 가시화의 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건 문제가 문제로 드러나지 않고,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만 강화되는 것이다. 억압 속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자신으로 살길 원치 않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질문하고 싶다. 당신의 피로감과 상상력은,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인생을 걸고 나선 이들의 용기를 묵살할 만큼 정당한가? 누군가의 '새로운 불편'은 공기 같은 불안 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불편보다 큰 것인가? 성폭력 문제에 '사람이 살아가는 게 너무 삭막하다'는 인식이 정감 있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가?
나는 단 한 명이라도 억눌러온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응원하는 사회, 성별을 막론하고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 함부로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수치심 거미줄을 촘촘히 치는 데에 집중한다면, 결국은 자신도 거기에 걸려든다.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다. 지나가는 개구리가 돌을 맞듯, 당신의 댓글로 상처받을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나는 이 댓글을 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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