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민족자의 교가, 독립운동가 배출한 학교에 울려퍼지다
공주 일제 잔재(4) 공주중·고, 공주사대부중·고, 공주대, 한국영상대 교가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는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 노래 가사이다. 한때 선구자를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투사로 생각하며 적잖은 이들이 즐겨 불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노래에 등장하는 '말 달리던 선구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었다. 독립투사는커녕 오히려 독립군을 잡는 데 혈안이 된 일본군 장교, 만주까지 점령한 일제 관동군(關東軍) 장교였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이후 <선구자>는 애창곡에서 빠졌으며, 부르는 이가 별로 없다.
윤해영(尹海榮)과 조두남(趙斗南)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음악가(작곡가)에는 <섬집 아기>와 <어머니의 마음> <봄이 오면>을 작곡한 이흥렬(李興烈, 1909~1980), <동심초>와 <산유화> <즐거운 우리집>를 작곡한 김성태(金聖泰, 1910~2012)도 있다.
이들은 충남 공주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공주 출신이거나 공주에 있는 학교 교가(校歌)를 작곡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흥렬은 공주중·고등학교와 공주대학교, 김성태는 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하였다. 공주중과 공주고는 교가 마지막 부분 '공중 건아들'과 '공주고 건아들'만 다를 뿐 같은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
공주고는 강범진(康范鎭, 3회 졸업생, 만주에서 대한독립군 활동)을 비롯하여 이철하(李哲夏, 1927년 일본인 교장에 저항, 동맹휴학 이어짐), 박명렬(朴命烈, 1930년 동맹휴학·가두시위, 1932년 반전격문, 명예졸업장 받음), 김순태(金淳泰, 1932년 반전격문) 등 적잖은 독립유공자와 이관세(李寬世, 1929년 동맹휴학), 노수남(盧壽男), 유석순(兪錫淳), 윤상원, 유종호 등 독립운동가가 졸업하거나 다니던 학교이다.
이런 자랑스러운 학교의 교가를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했다니, 더구나 교가를 청산하지 않고 계속 부르고 있다. 공주고등학교 출신 독립유공자와 독립운동가가 보면 어찌 생각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남아 있는 친일잔재
오늘날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옛 교과서에는 이광수, 최남선, 이인직, 김동인, 김동환, 정비석, 채만식, 유치진, 서정주, 모윤숙, 노천명 등 친일문학가의 작품이 '뛰어나다' 하여 이들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친일행위가 밝혀지고, 민주화와 함께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오늘날 교과서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교과서에서 친일 잔재(일제 잔재)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는 그동안 도를 대표하는 도가(道歌)로 <경기도 노래>를 사용하였는데, 이 노래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흥렬이 작곡한 것으로 밝혀지자 <경기도 노래>를 보류하고, 경기도노래신곡제정자문위원회를 열었다.
당시 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의 곡이 앞으로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불러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만장일치로 뜻을 모았고, 새로운 경기도 대표곡의 멜로디, 노랫말, 의미 등을 포함한 제정 방향과 공모 방식, 홍보·활용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흥렬이 작곡한 <경기도 노래>는 더는 불리지 않고 있다.
전국 시도교육청은 학교 안 친일 잔재 청산 사업을 추진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하거나 작곡한 교가를 바꾸고 있다. 충남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교가를 작사하거나 작곡한 것으로 파악된 학교 가운데 몇몇 학교에서는 이미 교직원과 학생은 물론 학부모와 동문회의 동의를 거쳐 교가를 교체하였다. 단지 교가만 바꾼 게 아니라 교가를 바꾸는 과정을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민주시민교육을 배우기도 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만든 교가
현재 충청남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교가를 작사하거나 작곡한 것으로 파악된 학교는 초·중·고 20여 곳이다. 이 가운데 4개 학교만 교가를 바꿨다. 나머지 학교는 '동문회 반대'를 이유로 교체하지 않거나 바꾸지 못하고 있다.
공주 지역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공주중·공주고와 공주사대부설중·고등학교가 이에 해당한다. 공주사대부중·고는 같은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
공주사대부중·고 교가 작사는 이원구(李元九, 1913∼1972)가 했다. 이원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잘 알려진 이근택(李根澤, 1865~1919)의 손자이다. 이근택은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로부터 자작까지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낸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이 교가를 작곡했다고 문제 될 건 없다. 할아버지가 친일파라고 해서 손자마저 친일파는 아니기 때문이다. 친일파 후손이라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친일파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 둘째(막내) 아들 안준생(安俊生, 1907~1951)은 아버지와는 아주 다르게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 정미칠적(丁未七賊)의 한 명인 이재곤(李載崑, 1859~1943)의 셋째 아들 이관용(李灌鎔, 1894~1933)은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독립운동을 하며 살았다.
또한 이원구가 작사한 공주사대부중·고 교가 내용을 살펴보면 다른 교가와 마찬가지로 문제 될 내용이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작사했다 하여 찝찝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정작 공주사대부설중·고 교가 문제는 작사가가 아니라 작곡가에 있다.
민족반역자 김성태
공주사대부중·고 교가는 김성태가 작곡하였다. 김성태는 널리 알려진 <동심초> <산유화> 등을 작곡한 음악가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는 일제와 일본 군대를 위한 노래를 작곡하는 등 일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일본 국민가요 보급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조국을 배반하고 민족에 반하는 음악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민족반역자이다.
공주사대부고는 국립학교로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전국적으로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입학하는 명문고로 자리매김한 학교다. 그만큼 의욕이 많고 성취도가 높아 대다수 학생이 전문적인 직종에서 활동하고 있어,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높은 편이다.
이런 학교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공주사대부중·고는 국가가 직접 설립하여 운영하는 국립학교다. 대한민국 학교를 대표하는 학교인만큼 일반 학교보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가도 모범을 보여야 하고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국립학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게 국립학교로서의 도리다.
몰랐다면 어쩔 수 없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교가를 작곡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이 교가 가사에 나와 있는 대로 "이나라 새날 밝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잘못된 것을 알면 바로잡는 게 진정 지식인이자 지성인, 그게 진짜 자부심 아닐까 싶다.
이흥렬의 손길 미친 공주대
공주대학교 교가도 공주사대부중·고와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공주대학교는 1948년 충청남도립 2년제 공주사범대학 설립 인가(공주 금학동 공주여자사범학교 건물과 시설 함께 사용)를 받아 개강하고, 1950년 도립에서 국립공주사범대학이 되었다.
1956년 4년제로 바뀌고, 1969년 신축 건물(현재의 공주시 신관동)로 이전하였다. 1990년 공주사범대학에서 일반대학인 공주대학으로 변경되었다가 1991년 종합대학인 공주대학교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주대학교 교가는 옛 공주사범대학 교가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재복(李在福, 1918~1991)이 작사하고 이흥렬이 작곡하였다.
1990년 초 공주사범대학이 일반대학으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종합대학인 공주대학교로 승격할 당시, 학교 상징인 교훈과 교포, 교가 등을 공모하였는데, 교가 부문은 아무도 응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공주대학교는 공주사범대학이 사용하던 교가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다만 작사자 이재복의 허락을 받아 후렴 가운데 '겨레의 스승'을 '겨레의 등불', '공주사대'를 '공주대학교'로 바꿨다.
그러나 이흥렬이 작곡한 만큼 공주대학교 교가 또한 친일 잔재로 청산할 대상이다. 공주대학교사범대학은 미래 인재를 육성할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이다. 이런 대학의 교가를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것을 사용하는 건 잘한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바람직한 교육을 걱정한다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공주대학교처럼 홈페이지에 교가를 소개하지 않을 뿐더러 학생들이 교가를 부를 일이 거의 없고 교가가 있는지조차 모른다며 문제 삼을 필요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학교 행사 때 교가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하거나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면 안 된다.
공주 교육, 교가 청산부터 시작해야
현재 공주에 있는 학교는 아니지만, 공주와 관련이 많아 간단하게라도 언급할 학교가 있다. 한국영상대학교다. 한국영상대학교는 공주에서 웅진전문대학(1993)으로 개교하여 공주영상정보대학(1998), 공주영상대학(2005), 공주영상대학교(2011), 한국영상대학교(2013년)로 변경되었으며, 행정구역마저 공주시에서 세종특별자치시로 바뀌었다.
한국영상대학교 교가는 구상 작사, 김동진 작곡이다. 작사자는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구상(具常, 1919~2004), 작곡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진 김동진(金東振, 1913~2009)으로 짐작된다. 즉, 한국영상대학교 교가 또한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이다.
세계유산도시이자 역사문화도시인 공주를 '교육도시'라고 말한다. '독립운동의 고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공주에는 부끄럽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공주지역 학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계속 사용한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공주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청산한다면 교육도시 공주가 훨씬 교육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공주 교육이 한결 자랑스럽고 밝아질 것이다.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선구자> 노래 가사이다. 한때 선구자를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투사로 생각하며 적잖은 이들이 즐겨 불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노래에 등장하는 '말 달리던 선구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었다. 독립투사는커녕 오히려 독립군을 잡는 데 혈안이 된 일본군 장교, 만주까지 점령한 일제 관동군(關東軍) 장교였다. 이런 사실이 밝혀진 이후 <선구자>는 애창곡에서 빠졌으며, 부르는 이가 별로 없다.
▲ 친일음악가 김성태와 이흥렬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음악의 진상
이들은 충남 공주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공주 출신이거나 공주에 있는 학교 교가(校歌)를 작곡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흥렬은 공주중·고등학교와 공주대학교, 김성태는 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하였다. 공주중과 공주고는 교가 마지막 부분 '공중 건아들'과 '공주고 건아들'만 다를 뿐 같은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
▲ 공주고등학교 교가와 공주중학교 교가 ⓒ 공주고/공주중 홈페이지
1. 반만년 역사위에 지나간 자취 / 전설도 무르익은 백제의 고도 / 흩어진 옛문화를 쌓아 올리려 / 모였네 새대한의 공중(공주고) 건아들
2. 산천은 옛모습에 낡음은 가고 / 이시대는 우리의것 씩씩히 살자 / 비단강 쇠다리에 오가는 문명 / 익히고 창조해낼 공중(공주고) 건아들
3. 참사랑 배움밭에 봉황은 산다 / 진리의 열매속에 계룡이 날라 / 삼천리 빛내이고 세기에 바칠 / 우리는 새대한의 공중(공주고) 건아들
공주고는 강범진(康范鎭, 3회 졸업생, 만주에서 대한독립군 활동)을 비롯하여 이철하(李哲夏, 1927년 일본인 교장에 저항, 동맹휴학 이어짐), 박명렬(朴命烈, 1930년 동맹휴학·가두시위, 1932년 반전격문, 명예졸업장 받음), 김순태(金淳泰, 1932년 반전격문) 등 적잖은 독립유공자와 이관세(李寬世, 1929년 동맹휴학), 노수남(盧壽男), 유석순(兪錫淳), 윤상원, 유종호 등 독립운동가가 졸업하거나 다니던 학교이다.
이런 자랑스러운 학교의 교가를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했다니, 더구나 교가를 청산하지 않고 계속 부르고 있다. 공주고등학교 출신 독립유공자와 독립운동가가 보면 어찌 생각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남아 있는 친일잔재
오늘날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옛 교과서에는 이광수, 최남선, 이인직, 김동인, 김동환, 정비석, 채만식, 유치진, 서정주, 모윤숙, 노천명 등 친일문학가의 작품이 '뛰어나다' 하여 이들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친일행위가 밝혀지고, 민주화와 함께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오늘날 교과서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교과서에서 친일 잔재(일제 잔재)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는 그동안 도를 대표하는 도가(道歌)로 <경기도 노래>를 사용하였는데, 이 노래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흥렬이 작곡한 것으로 밝혀지자 <경기도 노래>를 보류하고, 경기도노래신곡제정자문위원회를 열었다.
당시 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흥렬의 곡이 앞으로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불러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만장일치로 뜻을 모았고, 새로운 경기도 대표곡의 멜로디, 노랫말, 의미 등을 포함한 제정 방향과 공모 방식, 홍보·활용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흥렬이 작곡한 <경기도 노래>는 더는 불리지 않고 있다.
전국 시도교육청은 학교 안 친일 잔재 청산 사업을 추진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하거나 작곡한 교가를 바꾸고 있다. 충남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교가를 작사하거나 작곡한 것으로 파악된 학교 가운데 몇몇 학교에서는 이미 교직원과 학생은 물론 학부모와 동문회의 동의를 거쳐 교가를 교체하였다. 단지 교가만 바꾼 게 아니라 교가를 바꾸는 과정을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민주시민교육을 배우기도 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만든 교가
현재 충청남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교가를 작사하거나 작곡한 것으로 파악된 학교는 초·중·고 20여 곳이다. 이 가운데 4개 학교만 교가를 바꿨다. 나머지 학교는 '동문회 반대'를 이유로 교체하지 않거나 바꾸지 못하고 있다.
공주 지역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공주중·공주고와 공주사대부설중·고등학교가 이에 해당한다. 공주사대부중·고는 같은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
▲ 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고등학교 교가 ⓒ 공주사대부중·고 홈페이지
공주사대부중·고 교가 작사는 이원구(李元九, 1913∼1972)가 했다. 이원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잘 알려진 이근택(李根澤, 1865~1919)의 손자이다. 이근택은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로부터 자작까지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낸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이 교가를 작곡했다고 문제 될 건 없다. 할아버지가 친일파라고 해서 손자마저 친일파는 아니기 때문이다. 친일파 후손이라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친일파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 둘째(막내) 아들 안준생(安俊生, 1907~1951)은 아버지와는 아주 다르게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 정미칠적(丁未七賊)의 한 명인 이재곤(李載崑, 1859~1943)의 셋째 아들 이관용(李灌鎔, 1894~1933)은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독립운동을 하며 살았다.
또한 이원구가 작사한 공주사대부중·고 교가 내용을 살펴보면 다른 교가와 마찬가지로 문제 될 내용이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 작사했다 하여 찝찝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정작 공주사대부설중·고 교가 문제는 작사가가 아니라 작곡가에 있다.
민족반역자 김성태
공주사대부중·고 교가는 김성태가 작곡하였다. 김성태는 널리 알려진 <동심초> <산유화> 등을 작곡한 음악가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그는 일제와 일본 군대를 위한 노래를 작곡하는 등 일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일본 국민가요 보급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조국을 배반하고 민족에 반하는 음악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민족반역자이다.
공주사대부고는 국립학교로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전국적으로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이 입학하는 명문고로 자리매김한 학교다. 그만큼 의욕이 많고 성취도가 높아 대다수 학생이 전문적인 직종에서 활동하고 있어,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높은 편이다.
이런 학교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공주사대부중·고는 국가가 직접 설립하여 운영하는 국립학교다. 대한민국 학교를 대표하는 학교인만큼 일반 학교보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가도 모범을 보여야 하고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국립학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게 국립학교로서의 도리다.
몰랐다면 어쩔 수 없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교가를 작곡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그것이 교가 가사에 나와 있는 대로 "이나라 새날 밝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잘못된 것을 알면 바로잡는 게 진정 지식인이자 지성인, 그게 진짜 자부심 아닐까 싶다.
이흥렬의 손길 미친 공주대
공주대학교 교가도 공주사대부중·고와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공주대학교는 1948년 충청남도립 2년제 공주사범대학 설립 인가(공주 금학동 공주여자사범학교 건물과 시설 함께 사용)를 받아 개강하고, 1950년 도립에서 국립공주사범대학이 되었다.
1956년 4년제로 바뀌고, 1969년 신축 건물(현재의 공주시 신관동)로 이전하였다. 1990년 공주사범대학에서 일반대학인 공주대학으로 변경되었다가 1991년 종합대학인 공주대학교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주대학교 교가는 옛 공주사범대학 교가를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재복(李在福, 1918~1991)이 작사하고 이흥렬이 작곡하였다.
1990년 초 공주사범대학이 일반대학으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종합대학인 공주대학교로 승격할 당시, 학교 상징인 교훈과 교포, 교가 등을 공모하였는데, 교가 부문은 아무도 응모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공주대학교는 공주사범대학이 사용하던 교가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다만 작사자 이재복의 허락을 받아 후렴 가운데 '겨레의 스승'을 '겨레의 등불', '공주사대'를 '공주대학교'로 바꿨다.
▲ 공주대학교 교가 ⓒ 공주대학교 70년사
그러나 이흥렬이 작곡한 만큼 공주대학교 교가 또한 친일 잔재로 청산할 대상이다. 공주대학교사범대학은 미래 인재를 육성할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이다. 이런 대학의 교가를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것을 사용하는 건 잘한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바람직한 교육을 걱정한다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청산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공주대학교처럼 홈페이지에 교가를 소개하지 않을 뿐더러 학생들이 교가를 부를 일이 거의 없고 교가가 있는지조차 모른다며 문제 삼을 필요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학교 행사 때 교가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하거나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면 안 된다.
공주 교육, 교가 청산부터 시작해야
현재 공주에 있는 학교는 아니지만, 공주와 관련이 많아 간단하게라도 언급할 학교가 있다. 한국영상대학교다. 한국영상대학교는 공주에서 웅진전문대학(1993)으로 개교하여 공주영상정보대학(1998), 공주영상대학(2005), 공주영상대학교(2011), 한국영상대학교(2013년)로 변경되었으며, 행정구역마저 공주시에서 세종특별자치시로 바뀌었다.
▲ 한국영상대학교 교가 ⓒ 전병철
한국영상대학교 교가는 구상 작사, 김동진 작곡이다. 작사자는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구상(具常, 1919~2004), 작곡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진 김동진(金東振, 1913~2009)으로 짐작된다. 즉, 한국영상대학교 교가 또한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이다.
세계유산도시이자 역사문화도시인 공주를 '교육도시'라고 말한다. '독립운동의 고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공주에는 부끄럽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공주지역 학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계속 사용한다면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공주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청산한다면 교육도시 공주가 훨씬 교육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공주 교육이 한결 자랑스럽고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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