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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려", "끼여", "깔려" 사망... 다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서평] 노동건강연대가 기획하고, 이현이 정리한 책 '2146, 529'를 읽고

등록|2022.02.13 11:51 수정|2022.02.13 12:02

책 <2146, 529> 표지책 제목 <2146, 529>는 2021년 한 해 동안 산업 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죽음을 나타내는 숫자다. ⓒ 온다프레스


출근은 했으나 퇴근하지 못한 노동자들
 
"매일 5, 6명의 노동자들이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지 못합니다." (<2146, 529>, 5쪽)

"숨졌다", "사망했다", "사망", "목숨을 잃었다", "숨을 거뒀다". 노동건강연대가 기획하고 이현이 정리한 책 <2146, 529> 곳곳에 박혀 있는 말이다. 책은 2021년 1월 3일부터 12월 31일까지 산업 재해로 사망한 고인들에 관한 짧고 건조한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출근은 했으나 영원히 퇴근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죽음을 감추려는 듯 인용된 기사는 그 흔한 애도와 추모의 말도 없이 메말라 있다. 날짜별로 정리된 그 너무도 마른 문장들은 역설적이지만 강한 습기로 읽는 사람을 붙잡아 둔다. 마치 세상에 죽음을 새겨 넣기라도 하듯이.
 
"'2146'은 2021년 산재사망자 수의 추정치(2,146명)입니다. 또한, '529'는 2,146명의 산재사망자 중 사고로 사망하거나 과로사한 노동자의 수만을 따로 표기한 것으로, 트위터 '오늘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이 안전보건공단의 속보와 일간신문의 기사를 토대로 매일 집계한 결과입니다." (<2146, 529>, 10쪽)

책 본문에 등장하는 '노동자의 죽음을 알리는 문장'은 반복된다. "눌려", "끼여", "떨어져", "깔려", "찔려", "추락"... 읽다 보면 같은 사건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면 시간과 장소가 다르다.
 
"반복은 사건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2146, 529>, 191쪽)

2021년 한 해에만 2146명이 산업 재해로 사망했다. 매년 비슷한 상황이다. 사망 소식이 전해진 사람들 숫자다. 한 줄 기록도 없이 일터에서 돌아가신 분도 많다. 매년 수천 명의 사람이 같은 이유로 목숨을 잃고 있지만, 정부와 국회, 언론 모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업과 사회가 함께 만든 "살인"

우리 헌법 10조는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다. 생명은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전국 곳곳에서 공통된 이유로 국가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반헌법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국민의 생명도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 이유가 없다. 왜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될까?
 
"한국에서 노동자 산재사망을 다루는 지배적 프레임은 산재사망을 노동자 개인의 부주의와 불운, 기업 활동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로 봅니다. … 이 프레임 내에서 산재사망은 사회가 관심을 가질 사안이 아닌 것이지요." (<2146, 529>, 6~7쪽)

어떤 현상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제 해결 방향과 방법이 달라진다. 우리 사회는 한 해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숨지는 산업 재해를 특정 노동 현장이나 일하는 사람의 책임으로 치부한다.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 때문에 사회적 해결에 게으르다.

잘못된 원인 진단의 바탕에는 뿌리 깊은 '노동 경시' 문화가 자리한다. 정치인이 법률에 정해진 노동 시간 위반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대통령이 경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기업인을 찾아가도 별일이 없다. 유력한 대기업이 수십 년 동안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 기본권을 공공연하게 침해해도 처벌은 고사하고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한다.
 

▲ 민주노총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2022년 1월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HDC현대산업개발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참사 책임자 처벌과 중대재해처벌법 강화 촉구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 이희훈


간혹 언론과 사회의 주목을 받는 노동자의 죽음이 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관심은 시들해지고 죽음은 반복된다. 죽음조차 불평등하다. 대통령 선거 후보자나 기업 경영자는 자신과 가족의 작은 움직임도 크게 보도된다. 하지만, 기업과 사회를 위해 일터에서 죽임을 당한 노동자의 마지막은 너무나 쉽게 무시당한다.

'경제'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정작 그 경제를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기업은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를 주식 몇 장보다 가볍게 여긴다. 국가는 자신의 의무이자 존재 이유를 저버리고 강자인 기업 편을 든다. 노동자 산재 사망은 기업과 사회가 함께 만든 "살인"이다.

노동자 죽임의 구조 바꾸려면... '드러내기'부터

<2146, 529> 초판 1쇄 발행일인 1월 27일은 '중대 재해 처벌법'이 시행된 날이다. 일터에서 죽임을 당한 노동자 가족과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단식하며 만든 법이다. 사업주와 경영자의 책임 범위와 강도를 축소하고 적용 대상 기업을 줄이면서 시행도 되기 전에 누더기가 되었다. 보수 언론과 경영계는 이름만 남은 법마저도 못마땅한 모양이다.
 

산업 재해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경제 신문을 비롯한 보수 언론은 노동자 산재 사망 사고 앞에서도 주가 하락을 앞세웠다. ‘중대 재해 처벌법’이 행여나 사업주나 기업에 영향을 줄까 전전긍긍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


경제 신문을 비롯한 보수 언론은 노동자 산재 사망 사고 앞에서도 사업주나 기업 걱정에 전전긍긍했다. '중대 재해 처벌법' 적용 대상 확대 요구에 대해 한 언론은 "김밥 사장님도 구속된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대응했다. 다른 언론사는 노조 탄압과 산재 사고로 악명 높은 시멘트 회사 현장에서 노동자가 죽임을 당했는데도 추모는커녕 주가 하락 소식을 앞세웠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월 3일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한국경제신문이 '중대 재해 처벌법'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자세히 분석하면서 "기업보다 더 기업 걱정"을 한다고 썼다. 기업보다 더 기업을 염려하는 언론, 기업 걱정을 기업보다 더 깊게 하는 정부와 국회를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터에 나갔다가 퇴근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구가 5천만 명 이상이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부자 나라가 전 세계에 몇 개나 될까. 단 7곳뿐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한국. … 한국은 이들 나라들 중 산업재해 발생 후 1년 이내에 사망한 노동자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다. … 이 죽음들을 막는 일에는 큰 비용도, 대단한 기술도, 혼신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2146, 529>, 200~201쪽)

산업 재해로 인한 노동자 사망을 막는 데 "대단한 기술"이나 "혼신의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의도적 배제와 무관심 속에 감추어지고 왜곡되면서 끝없이 "살인"이 이어지고 있다.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2146, 529>는 '드러내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제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산업 재해로 인한 노동자 사망을 드러내는 일부터 하자는 말이다. 일터에서 강요당한 죽음이 얼마나 많은지 그 참담한 숫자를 인식하는 실천부터 시작하자고 호소한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말해지지 않던 것이 들리고,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 없는 자들의 웅얼거림이 북소리처럼 커질 것입니다. 노동자 산재사망과 관련된 총체적 진실이 '사건'처럼 드러날 것이고, 노동자 죽임의 공고한 구조는 허물어질 것입니다." (<2146, 52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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