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을 섬겼던 '거지왕초 목사' 김홍술, 별이 되다
부산 노숙인들의 대부 김홍술 목사, 15일 별세
2022년 2월 15일, '거지왕초 목사' 김홍술이 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별세했다. 자택이라고 하니, 일반 가정집을 떠올리겠지만, 아니다. 몇 명 되지 않은 노숙인 출신 식구들과 사는 공동체 '부활의집'이다.
그동안 김 목사가 꾸려왔던 노숙인의 가난공동체 '부활의집'은 부산 구포(부산시 북구 구포2동 776-1번지)에 있다(홈페이지). 김 목사는 2006년 11월 9일자(관련 기사 : '거지왕초 목사', 보금자리 수리 대장정)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거지왕초'는 부산 노숙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른바 '왕꼬지'다. '꼬지'란 '거지처럼 구걸한다'는 부산 사투리다.
그는 평생 노숙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때로는 그들과 함께 부산역 등을 전전하며 일부러 노숙인 생활도 했다. 그가 노숙인을 위해서 평생 노숙인 급식을 실시해 온 것을 부산 사람들은 다 안다.
그것도 노숙인으로 살다가 그나마 '부활의집' 식구가 된 '전직 노숙인'들과 함께 봉사했다. 평생 남에게 받고만 살던 그들이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었다.
노숙인들이 살아서도 대접 못 받고, 죽어서도 대접 못 받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김 목사는 1년에 한 번씩 부산역 광장에서 '노숙인을 위한 노제'를 지냈다. 덕분에 '개신교의 보수 중 보수의 도시' 부산에서 '이단 목사'라고 찍히는 고난도 감내했다.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노숙인들의 유해를 모아 놓은 노숙인들의 공원묘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나도 노숙인들처럼 떠돌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그는 이 둘 중 아무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소 잠자던 곳은 부활의집 창고에 마련된 1평짜리 숙소였고, 집무실이라고 해봐야 짐도 덜 치워진 창고 한쪽에 마련된 의자와 탁자였다. 그가 평생 살아서 남긴 유산이라곤 '노숙인 급식 차량' 1대였다. 평소 그가 매일 같이 끌고 다니며 부활의집 식구들을 걷어 먹였던 봉고차다. 그나마 그것도 '부활의집' 법인 재산이다.
부산 대동병원에서 3일상을 치렀고, 부산 영락공원 화장터를 거쳐, 부산 동래 실로암 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장례식은 코로나19로 인해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동료 목사와 지인들이 조용하게 조문을 하고 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생이 마치는 순간 삶이 종료되지만, 어떤 사람은 도리어 죽고 난 다음에 새로 삶이 시작된다. 예컨대 사후에 역사에 길이 남은 예수, 마하트마 간디, 테레사 수녀 등이다.
물질만능주의에 이미 종교가 침몰된 지 오래인 지금 시대에, 부산 노숙자의 대부이자 '거지왕초 목사'였던 김홍술이, 그의 사후에 그런 역사적인 삶을 살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참고로, 2006년 11월 9일에 기사로 실렸던 사진이 그의 영정 사진이 되었다.
▲ 발인예배코로나로 인해 조촐하게 치러진 가족장에 지인 목사들이 장례를 집전하고 가족들이 참석했다. ⓒ 송상호
그동안 김 목사가 꾸려왔던 노숙인의 가난공동체 '부활의집'은 부산 구포(부산시 북구 구포2동 776-1번지)에 있다(홈페이지). 김 목사는 2006년 11월 9일자(관련 기사 : '거지왕초 목사', 보금자리 수리 대장정)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거지왕초'는 부산 노숙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른바 '왕꼬지'다. '꼬지'란 '거지처럼 구걸한다'는 부산 사투리다.
그것도 노숙인으로 살다가 그나마 '부활의집' 식구가 된 '전직 노숙인'들과 함께 봉사했다. 평생 남에게 받고만 살던 그들이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었다.
▲ 김홍술 목사의 숙소부활의집 창고 한쪽에 마련된 1평 남짓한 그의 숙소에 그의 마지막 향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사진은 유족들과 함께 그의 마지막 숙소를 돌아보며 찍었다. ⓒ 송상호
노숙인들이 살아서도 대접 못 받고, 죽어서도 대접 못 받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김 목사는 1년에 한 번씩 부산역 광장에서 '노숙인을 위한 노제'를 지냈다. 덕분에 '개신교의 보수 중 보수의 도시' 부산에서 '이단 목사'라고 찍히는 고난도 감내했다.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노숙인들의 유해를 모아 놓은 노숙인들의 공원묘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나도 노숙인들처럼 떠돌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다. 결국 그는 이 둘 중 아무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소 잠자던 곳은 부활의집 창고에 마련된 1평짜리 숙소였고, 집무실이라고 해봐야 짐도 덜 치워진 창고 한쪽에 마련된 의자와 탁자였다. 그가 평생 살아서 남긴 유산이라곤 '노숙인 급식 차량' 1대였다. 평소 그가 매일 같이 끌고 다니며 부활의집 식구들을 걷어 먹였던 봉고차다. 그나마 그것도 '부활의집' 법인 재산이다.
▲ 김홍술의 유일한 유산그가 평소 타고 다니던 애마 노숙인 급식차량 차다. 주차장도 따로 없어서 마을 거리에 주차해 있는 이 차는 김목사가 평소 타고 다니며, 노숙인들을 위해 급식을 하고, 음식을 얻으러 다니던 차다. 돌아오지 못할 주인을 아는지 모르는 지 이 차는 그냥 그렇게 서있다. ⓒ 송상호
▲ 지금은 화장 중부산 영락공원 화장터에서 화장중인 김목사의 유해. 영정 사진으로 쓰인 저 사진은 오마이뉴스 본지 2006년 11월 9일 기사에 사용되었던 사진이다. ⓒ 송상호
부산 대동병원에서 3일상을 치렀고, 부산 영락공원 화장터를 거쳐, 부산 동래 실로암 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장례식은 코로나19로 인해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동료 목사와 지인들이 조용하게 조문을 하고 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생이 마치는 순간 삶이 종료되지만, 어떤 사람은 도리어 죽고 난 다음에 새로 삶이 시작된다. 예컨대 사후에 역사에 길이 남은 예수, 마하트마 간디, 테레사 수녀 등이다.
물질만능주의에 이미 종교가 침몰된 지 오래인 지금 시대에, 부산 노숙자의 대부이자 '거지왕초 목사'였던 김홍술이, 그의 사후에 그런 역사적인 삶을 살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참고로, 2006년 11월 9일에 기사로 실렸던 사진이 그의 영정 사진이 되었다.
▲ 납골당 안치거지왕초목사 김홍술의 유해가 부산 실로암 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살아서 평생 자기 땅 하나 없이 노숙인을 섬기다가, 결국 반평도 안되는 자기 땅에 안착했다. ⓒ 송상호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당당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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