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빈 터만 남은 강화도 '인화돈대'
[돈대를 찾아가는 길3] '인화돈대'를 찾아서
"마음이 울적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가 한 말입니다. 깊은 산골에 있는 폐사지, 찾는 사람이 없어 적막한 빈 절터에 서면 마음이 절로 스산해진다고 했습니다.
강화도에 있는 54개의 돈대들 중에는 무너지고 흐트러져서 사라져가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마음이 애달프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폐사지와는 달리 돈대에서는 또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역사, 강화도 돈대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에 있는 '인화돈대'를 찾아 갔습니다. 인화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입니다. 인화리 앞 바다를 지키기 위해 돈대를 쌓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허물어져서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습니다.
볼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스산한 빈 터를 둘러봅니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만 수북이 쌓여 있을 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분명 돌을 층층이 쌓아 돈대를 만들었을 텐데, 큰 궤짝 크기의 그 돌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인화돈대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석모도가 눈앞에 있고 바로 앞에는 교동도가 있습니다.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황해도 해주와 연백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동쪽으로 가면 한강하구를 만나 서울로 들어갈 수 있고 북쪽에는 예성강이 흘러내려와 서해와 합쳐집니다.
인화리 앞 바다, 서울과 개성 길목
우리나라 한반도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서울과 개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니 얼마나 중요했겠습니까. 그래서 인화보와 인화포대 그리고 5개의 돈대들을 쌓았겠지요.
2월 12일, 우리는 창후리의 무태돈대를 보고 인화돈대도 보러 갔습니다. 무태돈대에서 인화돈대까지는 약 2.3킬로미터 거리로 바닷가 철책을 보면서 가는 길입니다. 철책 근처 뿐만 아니라 그 너머 바다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사람이 헤엄쳐 왔습니다.
1989년 9월 17일 03시 07분이었습니다. 바다를 경계하던 초병이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합니다. 북한의 대남 특수공작원이 바다를 헤엄쳐 귀순해 왔습니다. 북한중앙당 개성연락소 소속 간첩호송안내원인 서영철(26)씨가 7시간 이상을 헤엄쳐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해병 초소병에게 귀순 의사를 밝힙니다.
'남파 공작원 호송원 서영철 구출 지점'이라는 표지석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그는 분명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인데 왜 '생포'가 아니라 '구출'이라고 했을까요. 북한의 남파간첩 호송 안내원 서영철이 1989년 9월 17일 오전 한강 하류를 헤엄쳐 귀순해 왔다고 국방부가 발표한 기사를 보고서야 '구출'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했습니다. 귀순을 한 사람이니 생포가 아니라 구출인 것이지요.
남파공작원 구출한 곳
철책을 따라 한참을 걸었어요. 철책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지만 그 길은 지금 도로를 확장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라 우리는 철책 앞으로 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곳은 군사보호법에 의해 철책 부근 접근 및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는 곳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인화리에 도착해서 인화돈대를 향해서 언덕을 오르려는데 저쪽에서 군용 트럭이 한 대 오더니 우리 앞에 섰습니다. 부사관 한 명이 차에서 내리더니 길을 막았습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확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강화도의 경우 철책 부근에도 민간인이 사는 동네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논밭도 철책과 붙어 있고 차가 다니는 도로도 철책을 따라 있습니다.
그래서 무심했습니다. 철책이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을 대변해주지만 우리는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처지임을 예기치 않은 상황을 통해 새삼 깨달았습니다.
인화돈대는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민통선 안이지만 접근 금지구역은 아닙니다. 단, 철책 주변 사진 촬영은 금지입니다. 부사관의 요청대로 인적 사항과 연락처를 알려준 뒤 다시 돈대로 향합니다.
돈대로 올라가는 길은 공사장을 거쳐 가야 합니다. 그곳을 피해 가자니 찔레가시덤불을 헤쳐야 합니다. 나무 그루터기가 길을 막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인화돈대를 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낯선 사람들이 온 것을 보고 동네 개들이 요란스레 짖어댑니다. 개가 짖는 걸 듣고 동네 사람이 나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무슨 일인데 그쪽으로 올라가는 거요? 남의 동네에 와서 뭐 하는 거요?"
목청을 높여 짖는 개와 소리 지르는 사람에게서 낯선 사람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보입니다. 북한이 바라보이는 민통선 안 마을입니다. 과거에는 규제와 통제가 일상이었던 곳입니다. 그러니 낯선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겠지요.
돈대를 보러 왔다고 해도 동네 주민은 여전히 의심합니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할 태세입니다.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신고를 하라는 교육을 받았던 옛날입니다. 동네 안 오래된 집 처마에는 '비상신고소'라는 표찰이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인화돈대는 여전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드디어 돈대를 만났습니다. 오래 방치된 돈대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서 있었고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여기가 돈대가 있었던 곳인지도 모를 뻔 했습니다.
한강과 예성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했던 이곳 인화리 앞 바다입니다. 그곳을 지켜주던 인화돈대는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사람 키보다 높게 쌓았던 석축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세월 속에 스며들어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크고 장대한 돈대가 희미한 흔적만 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돈대 터도 폐사지처럼 적막하고 스산합니다. 그러나 돈대 터는 폐사지와는 다른 울림을 줍니다. 허물어져 잊혀져가는 돈대일지라도 여전히 본연의 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340여 년 전 조선시대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해안가에 돈대를 쌓았던 것처럼 지금도 돈대 근처에는 예외 없이 군부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인화돈대 부근에도 군부대가 있습니다. 오늘도 군 장병들은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습니다. 시효를 다한 듯이 보였던 인화돈대는 여전히 나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인화돈대(寅火墩臺) 기본 정보>
. 소재지 :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982
. 소속 : 광암돈대·구등곶돈대·작성돈대·무태돈대와 함께 인화보(寅火堡)의 관리하에 있었음
. 근처 돈대 : 2.3km 남쪽에 무태돈대가 있고 북쪽으로 광암돈대가 있음.
. 크기 및 모양, 규모 : 형태는 원형이며, 크기는 98보, 44성첩으로 기록에 나옴. 실측 조사한 바에 의하면 둘레는 130m임.
. 현재 상황 : 돈대의 가장자리 기단 석축만 군데군데 조금 남아 있을 뿐, 훼손이 심해서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음.
. 주변 편의시설 : 공용주차장 및 화장실 등 편의시설 없음.
. 주의 사항 : 무태돈대에서 인화돈대까지는 민통선 지역이라 군사시설에 대한 사진 촬영이 금지임. 군부대의 원활한 작전수행을 위해 철책 주변 역시 접근 금지임.
강화도에 있는 54개의 돈대들 중에는 무너지고 흐트러져서 사라져가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마음이 애달프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폐사지와는 달리 돈대에서는 또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에 있는 '인화돈대'를 찾아 갔습니다. 인화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은 48개 돈대 중 하나입니다. 인화리 앞 바다를 지키기 위해 돈대를 쌓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허물어져서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습니다.
▲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인화돈대' 터 ⓒ 한희선
볼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스산한 빈 터를 둘러봅니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만 수북이 쌓여 있을 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분명 돌을 층층이 쌓아 돈대를 만들었을 텐데, 큰 궤짝 크기의 그 돌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인화돈대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석모도가 눈앞에 있고 바로 앞에는 교동도가 있습니다.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황해도 해주와 연백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동쪽으로 가면 한강하구를 만나 서울로 들어갈 수 있고 북쪽에는 예성강이 흘러내려와 서해와 합쳐집니다.
인화리 앞 바다, 서울과 개성 길목
우리나라 한반도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서울과 개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니 얼마나 중요했겠습니까. 그래서 인화보와 인화포대 그리고 5개의 돈대들을 쌓았겠지요.
2월 12일, 우리는 창후리의 무태돈대를 보고 인화돈대도 보러 갔습니다. 무태돈대에서 인화돈대까지는 약 2.3킬로미터 거리로 바닷가 철책을 보면서 가는 길입니다. 철책 근처 뿐만 아니라 그 너머 바다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사람이 헤엄쳐 왔습니다.
▲ 기단석 하나가 토축 사이로 보인다. ⓒ 이광식
1989년 9월 17일 03시 07분이었습니다. 바다를 경계하던 초병이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합니다. 북한의 대남 특수공작원이 바다를 헤엄쳐 귀순해 왔습니다. 북한중앙당 개성연락소 소속 간첩호송안내원인 서영철(26)씨가 7시간 이상을 헤엄쳐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해병 초소병에게 귀순 의사를 밝힙니다.
'남파 공작원 호송원 서영철 구출 지점'이라는 표지석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그는 분명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인데 왜 '생포'가 아니라 '구출'이라고 했을까요. 북한의 남파간첩 호송 안내원 서영철이 1989년 9월 17일 오전 한강 하류를 헤엄쳐 귀순해 왔다고 국방부가 발표한 기사를 보고서야 '구출'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했습니다. 귀순을 한 사람이니 생포가 아니라 구출인 것이지요.
남파공작원 구출한 곳
철책을 따라 한참을 걸었어요. 철책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지만 그 길은 지금 도로를 확장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라 우리는 철책 앞으로 난 길을 걸었습니다.
▲ 민통선 이북 철책 접근 금지 안내문 ⓒ 이승숙
그런데 저희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곳은 군사보호법에 의해 철책 부근 접근 및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는 곳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인화리에 도착해서 인화돈대를 향해서 언덕을 오르려는데 저쪽에서 군용 트럭이 한 대 오더니 우리 앞에 섰습니다. 부사관 한 명이 차에서 내리더니 길을 막았습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확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강화도의 경우 철책 부근에도 민간인이 사는 동네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논밭도 철책과 붙어 있고 차가 다니는 도로도 철책을 따라 있습니다.
그래서 무심했습니다. 철책이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을 대변해주지만 우리는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처지임을 예기치 않은 상황을 통해 새삼 깨달았습니다.
인화돈대는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민통선 안이지만 접근 금지구역은 아닙니다. 단, 철책 주변 사진 촬영은 금지입니다. 부사관의 요청대로 인적 사항과 연락처를 알려준 뒤 다시 돈대로 향합니다.
돈대로 올라가는 길은 공사장을 거쳐 가야 합니다. 그곳을 피해 가자니 찔레가시덤불을 헤쳐야 합니다. 나무 그루터기가 길을 막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인화돈대를 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낯선 사람들이 온 것을 보고 동네 개들이 요란스레 짖어댑니다. 개가 짖는 걸 듣고 동네 사람이 나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무슨 일인데 그쪽으로 올라가는 거요? 남의 동네에 와서 뭐 하는 거요?"
▲ 민통선 안 마을에 남아있는 '비상신고소' 표찰 ⓒ 이승숙
목청을 높여 짖는 개와 소리 지르는 사람에게서 낯선 사람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보입니다. 북한이 바라보이는 민통선 안 마을입니다. 과거에는 규제와 통제가 일상이었던 곳입니다. 그러니 낯선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겠지요.
돈대를 보러 왔다고 해도 동네 주민은 여전히 의심합니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할 태세입니다.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신고를 하라는 교육을 받았던 옛날입니다. 동네 안 오래된 집 처마에는 '비상신고소'라는 표찰이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인화돈대는 여전했다
▲ 인화돈대 터 ⓒ 이광식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드디어 돈대를 만났습니다. 오래 방치된 돈대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서 있었고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여기가 돈대가 있었던 곳인지도 모를 뻔 했습니다.
한강과 예성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했던 이곳 인화리 앞 바다입니다. 그곳을 지켜주던 인화돈대는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사람 키보다 높게 쌓았던 석축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세월 속에 스며들어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크고 장대한 돈대가 희미한 흔적만 남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 교동대교와 인화리 앞 바다. ⓒ 이승숙
돈대 터도 폐사지처럼 적막하고 스산합니다. 그러나 돈대 터는 폐사지와는 다른 울림을 줍니다. 허물어져 잊혀져가는 돈대일지라도 여전히 본연의 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340여 년 전 조선시대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해안가에 돈대를 쌓았던 것처럼 지금도 돈대 근처에는 예외 없이 군부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인화돈대 부근에도 군부대가 있습니다. 오늘도 군 장병들은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습니다. 시효를 다한 듯이 보였던 인화돈대는 여전히 나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인화돈대(寅火墩臺) 기본 정보>
. 소재지 :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982
. 소속 : 광암돈대·구등곶돈대·작성돈대·무태돈대와 함께 인화보(寅火堡)의 관리하에 있었음
. 근처 돈대 : 2.3km 남쪽에 무태돈대가 있고 북쪽으로 광암돈대가 있음.
. 크기 및 모양, 규모 : 형태는 원형이며, 크기는 98보, 44성첩으로 기록에 나옴. 실측 조사한 바에 의하면 둘레는 130m임.
. 현재 상황 : 돈대의 가장자리 기단 석축만 군데군데 조금 남아 있을 뿐, 훼손이 심해서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음.
. 주변 편의시설 : 공용주차장 및 화장실 등 편의시설 없음.
. 주의 사항 : 무태돈대에서 인화돈대까지는 민통선 지역이라 군사시설에 대한 사진 촬영이 금지임. 군부대의 원활한 작전수행을 위해 철책 주변 역시 접근 금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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