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서관에 의로운 '소와 사람'의 빗돌이 함께 있다
[도서관의 문화재 ①] 구미시립 봉곡도서관의 의우총과 구황 불망비, 효자 정려각
도서관에 가면 ‘문화재’가 있다? 박물관이 아니라 생뚱맞지만, 경북 구미에 있는 시립도서관 가운데 세 곳이 그렇다. 다른 데 있던 빗돌인데, 도시개발로 제 자리를 잃자 도서관 뜰에 옮겨온 것들이다. 이런 빗돌은 지자체마다 따로 모아 관리하는데, 구미시는 도서관 뜰을 이들의 새 터전으로 삼은 것이다. 이 오래된 빗돌이 전하는 서사를 따라가 본다.[기자말]
▲ 2007년에 문을 연 구미시립 봉곡도서관. 왼쪽이 종합자료실이 있는 A동, 오른쪽이 어린이 자료실이 있는 B동이다. ⓒ 장호철
지난 2007년에 문을 연, 우리 동네의 구미시립 봉곡도서관 구내에는 돌비가 셋이나 서 있다. 두 기는 고종 연간에 흉년으로 굶주린 이웃을 위해 곳간을 열어 이들을 구제한 이를 기린 빗돌이고, 나머지 하나는 '의로운 소의 무덤', 곧 '의우총(義牛塚)' 비석이다.
개의 경우는 '의견(義犬)', 또는 '의구(義狗)'라 하여 무덤으로 기리는 예가 있지만, "웬 소?" 싶으면서도 무심코 지나다닌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전국에 분포하는 의견 설화는 구미에도 있어 해평면 낙산리에 의구총(義狗塚)이 전한다. 술에 취한 주인이 들판에 잠들었는데 불이 나자, 몸을 물에 적셔 불을 꺼 주인을 구하고 숨진 개의 이야기다.
그런데 무덤도 없이 외롭게 서 있는 빗돌의 주인공은 '소'다. 물론 이 소는 구미시 산동면에 있는 '의우총'의 소와는 다르다. 무덤으로 소를 기린 예는 다른 지방에는 없는 일인데 구미에서만 두 기나 있다. 산동 의우총은 조선 인조 연간(1623~1649)의 것, 봉곡동 의우총은 고종 연간의 일이다.
봉곡동의 '의로운 소'는 조선 말기 지역에 살던 여양 진씨 진숙발의 처 밀양박씨가 거둔 소였다. 밀양박씨는 가난한 데다 일찍이 홀로 되어 암소 한 마리를 기르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암소는 송아지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박씨는 어미 잃은 송아지를 흰죽과 나물죽을 끓여 손에 발라 핥게 하는 등 극진하게 보살폈다. 더러 보리죽도 먹여가며 기른 송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큰 소가 되어 2년 동안 박씨와 함께 논밭을 갈았다. 박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소를 인근 김천 개령 사람에게 팔았다.
박씨의 장례일, 상여가 집을 나서려 할 때 웬 암소 한 마리가 상여 앞으로 달려들어 눈물을 흘리더니 미친 듯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개령에 팔려 간 소가 우리를 뛰어넘어 30리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소는 미친 듯 날뛰다가 상여 앞에서 기진해 죽고 말았다.
▲ 의우총 빗돌. 봉분은 없어지고 빗돌만 여기로 옮겨왔다. ⓒ 장호철
소는 어미 잃은 자신을 돌보아 길러준 주인의 죽음을 온몸으로 슬퍼하다가 지쳐 숨진 것이다. 목숨을 거두어 준 주인에 대한 소의 의로운 행동은 인간의 충의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짐승과 사람의 의(義)가 다르지 않음을 놀라워한 사람들은 소를 밀양박씨의 무덤 아래에 묻고, 표석을 세웠다.
비록 짐승에 지나지 않으나, 그 의열로 순사(殉死)한 소를 기리고자 사람들은 1867년(고종 4) 무덤을 마련하고 비를 세웠다. 자연석을 다듬어 상부를 귀접이(석재의 모서리를 깎아 내어 둥글게 함) 한 비는 높이 105㎝, 너비 40㎝, 두께 9㎝의 사암이다.
비석에는 해서체로 '의우총(義牛塚)'이, 그 좌우에는 읍지(邑誌)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과 정묘년 8월에 세웠다는 사실을 각각 새겨 놓았다. 비는 인근 미실산에 지름 1.6m 정도의 봉분과 함께 남아 있었으나 주거 단지 개발로 봉분은 없어지고 빗돌만 봉곡동 솔밭으로 옮겼다가 도서관 구내에 다시 세웠다.
흉년에 이웃을 구제한 선달을 기린 빗돌 두 개
▲ 1903년 남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곳간을 열어 이웃을 구제한 선달 박래민의 구황 불망비. 뒤쪽은 ‘기적비’를 보호하는 창인각이다. ⓒ 장호철
의우총 빗돌의 오른쪽 저편에 비각 한 채가 서 있다. 비각 앞에 선 나지막한 돌비가 '선달박래민구황불망비(先達朴來玟救荒不忘碑)'고 비각 안의 빗돌은 '월파박공래민구황기적비(月坡朴公來玟救荒紀績碑)'다. 모두 박래민의 구휼(救恤)을 기린 빗돌이다.
1903년(고종 40)에 남도에 흉년이 들었다. <고종실록>의 고종 40년(1903) 9월 28일 자 "남도의 흉년으로 인하여 해당 도에서 사창의 환곡을 나누어주도록 하다"라는 기록이 이를 가리킨 듯싶다. 굶주린 이웃을 위해 박래민은 집안의 곳간을 열고 곡식을 내어 이들을 구제했다.
박래민은 본관이 밀양으로 1888년(고종 25) 무과에 급제하여 뒷날 용양위 부사과를 지낸 인물로, 충효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한다. '선달(先達)'은 문·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주로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만을 가리켰다.
▲ 이웃들이 세운 선달박래민구황불망비. 풍화되어 마지막 두 자는 흐릿하다. ⓒ 장호철
빗돌에 박래민을 '선달'이라고 지칭한 것은 1888년 무과에 급제했지만, 그때까지도 그가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급제한 지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발령을 받지 못했으나, 그의 집안은 넉넉했던 모양이다. 그의 덕을 기려서 사람들이 구황 불망비를 세운 것은 이듬해인 1904년(고종 41)이다.
빗돌의 앞면에는 '선달박래민구황불망비', 오른쪽 측면에는 건립 시기인 '갑진 오월'을 새겨놓았다. 덮개돌과 비좌(碑座) 없이 비석의 윗부분이 귀접이 된 몸돌만이 남아 있다. 몸돌은 높이 100㎝, 너비 38㎝, 두께 18㎝이다.
▲ 창인각 안에 밀양박씨 문중에서 세운 구황 기적비. 오석에 덮개들을 얹었다. ⓒ 장호철
비각인 창인각(彰仁閣) 안의 '월파박공래민구황기적비'는 오석 몸돌에 덮개돌까지 얹었다. 게다가 비각 안에 모셨으니 한데서 비바람을 맞아 퇴락한 구황 불망비보다 훨씬 귀하신 몸이다. '신라 시조왕 기원후 이천 육년 정축 개립(改立)'이라 쓰여 있으니, 정축년은 박혁거세(B.C69~4)로부터 셈하면 1937년, 이때 고쳐 세웠다는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134cm, 너비 40cm, 두께 20cm이다.
비석을 새로 조성하여 비각까지 마련해 세운 이는 '시조왕' 운운하는 거로 보아 밀양박씨 종중인 듯하다. 그러나 의미로 따지면 비각 안에 모신 이 빗돌보다 한데서 비바람을 맞으며 풍화되어 온 나지막한 불망비가 훨씬 더 커 보인다. 불망비야말로 이웃들의 진정이 담긴 소박한 기림이니 말이다.
'34년간 노모 약시중' 든 효자 '정려 편액'도
▲ 34년간 노모의 약시중을 든 효자 이명준의 정려 편액을 모신 백원각. ⓒ 장호철
▲ 이명준이 받은 정려 편액. 세로쓰기로 썼고, 뒤에 증직과 정려를 받은 달을 붙였다. ⓒ 장호철
의우총 빗돌 뒤에 있는 담장 두른 건물은 조선 후기의 효자 이명준의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 편액이 걸린 백원각(百源閣)이다. 본관이 벽진인 이명준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한 인물이다.
부친이 별세하자 시묘(부모의 상중에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3년간 사는 일)하여 무릎 닿는 곳이 구덩이가 되고, 절한 자리에 풀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후 34년 동안 약탕관을 직접 시탕(부모가 병들었을 때 약시중을 듦)하여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모친상 삼우 후 약탕기가 저절로 깨졌는데, 이는 효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다. 이명준이 세상을 떠난 뒤, 1844년(헌종 10) 12월에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에 증직(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되었고 1846년(헌종 12) 정려를 받았다. 백원각 안에 걸린, 높이 25㎝, 너비 158㎝ 편액은 '효자증조봉대부사헌부지평이명준지문(孝子贈朝奉大夫司憲府持平李命峻之門)'이라 쓰고 뒤에 증직과 정려 받은 때를 해서로 기록했다.
애당초 빗돌들을 도서관 뜰에 모은 뜻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봉곡도서관 뜰에는 짐승이 행한 '의열'에다가 '효'와 '구휼의 의'를 실천한 선인들의 삶이 빗돌로 남았다. 사람들은 도서관 뜰을 무심하게 오갈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빗돌이 전하는 서사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뜰로 나설 때마다 의우총·백원각과 달리 박래민 송덕비만 안내판이 없는 게 눈에 밟힌다. 도서관에 물으니 관리 책임이 시청에 있다고 한다. 책임이 어디에 있든 빗돌의 유래나 내용을 알리는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마땅하다. 빗돌들이 전하는 서사는 비록 전근대의 도덕률이지만, 그 윤리적 의미야 오늘과 절대 다르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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