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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푸틴의 러시아... 전쟁 끝나면 약해질 것"

[대담]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는가... 전쟁의 역사, 지정학 그리고 현재

등록|2022.03.14 18:38 수정|2022.03.14 18:42

▲ 지난 10일(우크라이나 현지시각) 한 남성이 키이우 인근 비슈고로드 지역을 지나가는 병력수송 장갑차에 탄 우크라이나 군인들에게 손을 흔들며 유모차를 밀고 있다. ⓒ AP=연합뉴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생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2013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EU와 자유무역협정을 거부하고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키예프 독립광장를 점거하는 집회가 시작됐고 우크라이나 서부로 확산됐다.

친러시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는 유로마이단 시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사태는 결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친분리주의 단체와 우크라이나 정부 간의 군사적 충돌로 확대됐다. 오랜 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고, 돈바스 광산 동부를 친러시아 세력이 장악했다. 2021년 러시아는 침략하지 않겠다고 주장했지만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면서 잠재적인 침략의 두려움이 재점화했다.

러시아는 자신의 행동이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NATO)가 우크라이나까지 진출해 러시아 국경과 맞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밝혔다. 2월 22일,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로 러시아는 군을 투입시켰다. 이런 사태가 현재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국제전략센터는 현재의 갈등이 조성된 소련 시절의 우크라이나 역사와 지정학적 세력, 역학, 계획을 살펴보기 위해 2월 진보포럼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소련에서 유로마이단, 현재의 위기까지'에 하룬 일마즈 박사를 초청했다. 하룬 일마즈 박사는 하버드 대학 연구원이자 퀸 메리 대학의 영국 아카데미 강사이며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에 관한 책을 저술한 저자다. 인터뷰는 간결하고 명료하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편집됐다. 


우크라이나가 걸어온 길
 

▲ 우크라이나 군인과 소방관들이 1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파괴된 건물을 수색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국제전략센터(아래 ISC):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살펴보기 전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맺은 역사적 관계를 먼저 살펴보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에 진입하자 푸틴은 당시 역사적으로 러시아 영토였던 우크라이나를 포기했던 볼셰비키의 정책을 비판하고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을 볼셰비키 정책의 산물이라고 일축했다.

러시아 현대사의 러시아 제국, 소련, 그리고 오늘날의 러시아 연방의 세 시기를 보자. 러시아 제국 시절, 대부분의 비러시아계 민족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러시아인과 카자흐인으로 구성된 백군에 대항해 비러시아계 민족을 동원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소련이 소련의 공화국에서 근대적 국가 정체성 발전에 기여했던 역할은 자주 무시된다. 다른 인터뷰에서, 볼셰비키가 문화와 언어를 보존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의 형성을 인정하고 장려했다고 언급한 것을 봤다. 그외에도 볼셰비키는 경제적 이익이 아닌 현실에 근거해 국경을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러시아가 이런 민족들과 맺은 관계와 소련 시절의 관계를 구분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과 초기 소련 시기 뚜렷한 국가와 국가 정체성으로 출현한 역사를 설명해 달라."

하룬 일마즈 박사(아래 일마즈): "우크라이나는 중세부터 지도 위에 지명으로 존재했다. 질문에 나와있듯이, 볼셰비키는 국가 정체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국제주의자였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문화적 측면은 지원하려 했지만 민족정체성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세력으로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당국가에서 대안 담론이나 이념은 당에 대한 도전이 된다.

그래서 때때로, 국가 정체성에 대한 지원을 촉진하거나 또는 때때로 한 발짝 물러서서 제한을 두었다. 정책이 변화하면서, 다수가 숙청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1932년 대기근으로 수백만 우크라이나인이 죽었다. 대기근의 원인은 여러 요인이 뒤섞여 발생한 인재였다. 주요하게는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의 정치 지도부가 저지른 실수였다. 기근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을 강타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도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또 다른 재앙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거의 모든 도시와 크고 작은 마을이 파괴됐다. 처음에는 전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붉은 군대가 나치 독일의 점령을 밀어내자 전선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전선이 이동할 때마다 파괴됐다. 독일군이 후퇴했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1945년에서 1955년 사이, 국가의 재건은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은 주로 소농 경제였지만 1951년 소련 최초의 컴퓨터를 개발할만큼 발전되었다. ⓒ Ukie Daily


반면에 2차 세계대전 시기,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은 붉은 깃발 아래 모였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있었고, 1·2차 대전 사이의 전간기에는 폴란드 우크라이나와 서부 우크라이나가 있었다. 이후 두 지역은 통합됐다.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라고 불리는 작은 지역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에 추가됐다.

그리고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였던 범카파르티아는 나치 독일이 대륙을 지배했을 때 헝가리 동맹국에 넘겨졌고 전쟁이 끝난 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이 모든 지역이 소련에 통합됐고, 1991년 이후 우크라이나 국가의 일부가 됐다. 1945년 소련 지도부는 이후 민족 국가를 위한 영토를 준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모든 영토가 하나의 국가가 됐다. 1950년대에 크림 반도는 러시아 연방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현재 우크라이나 국경이 형성됐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지배로부터 혜택을 받기도 했지만 고통을 받기도 했다. 소련과 우크라이나에서는 국가 건설 정책이 있었고, 국가 정체성과 국가 건설 정책을 인정받았다. 동시에 대기근 시기 동안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일당 통치가 있었고 다른 정치 사상을 지지하는 이들은 탄압받았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균형잡힌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ISC: "요약하자면, 소련 시대에는 국가정체성을 인정했지만 이는 일종의 국제주의를 만들기 위한 전략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국가 간의 협력을 장려했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국가 정체성을 인정함으로써 국가 간 더 많은 협력과 연대를 형성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일마즈: "볼셰비키 지도부가 국가 정체성에 대해 특정한 입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볼셰비키는 국제주의자였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국가 정체성의 힘을 이해했다. 좌파가 1차 세계대전을 내전으로 전환하지 못했을 때 민족주의의 힘을 인식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당 대표는 '이 전쟁은 자본주의 열강 간의 전쟁이기 때문에 전선에 나가서는 안되고 프랑스 정부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노동자들은 우리를 때리거나 죽일 테니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대부분의 볼셰비키 지도부는 유럽에 있었고(예를 들어 레닌은 스위스에 있었음) 민족주의의 힘을 목도했다.

내전 이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을 때 새로운 정체성, 즉 현대적 정체성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인구의 80~90%가 반고립된 마을에 사는 문맹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민족주의나 국가 정체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면 오히려 더 강화되고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인식했다.

게다가, 볼셰비키는 자본주의 경쟁자를 능가하기 위해 국가를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이전에는 서로를 공격하고 죽였던 다양한 집단(코카서스의 아르메니아인과 무슬림을 예로 들 수 있음)이 한 국가가 됐다고 상상해 보라. 어떻게 아르메니아 기술자, 아제르바이잔 공장장, 조지아 철도 기술자를 필요로 하는 전기 수력 발전 댐이나 관개 수로, 직물 공장을 지을 수 있을까? 그런 반목이 있었는데 어떻게 함께 모여 일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기능하는 경제와 정치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분위기와 혁신적인 유화책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볼셰비키는 민족주의자와 국가 정체성을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로 보았다. 브레이크가 없는 차를 어떻게 세울 수 있는가. 더 빨리 달리게 만들면 연료가 고갈되고 결국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국가 정체성은 자본주의 경제 관계와 함께 시작된 일시적인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에 끝이 있다고 본 것이다. 모든 차이점들, 모든 문화가 인간애, 인간문화에서 생겨날 것이고, 이는 '소비에트' 문화가 될 것으로 봤다."

"러시아는 인접국 영토를 '완충지대'로 본다"
 

▲ 6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 외곽의 이르핀에서 공장과 상점이 불타고 있다. ⓒ AP=연합뉴스


ISC: "푸틴이 공개적으로 소련에 속했던 비러시아계 민족에 대한 당시 소련의 정치를 비판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푸틴의 비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마즈: "이후 소련에서 일어났던 일과도 연관돼 있다. 소련 구조 내에서 러시아 국가 정체성이 국제주의 프로그램을 가로채기 시작했고 점점 더 지배적이 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마디로 소련 담론에서 러시아 국가 정체성이 점점 더 우세해지면서, 국제주의 프로그램을 가로채버렸다. 동시에, 다른 국가 정체성도 강화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소련 붕괴의 원인이 된 국가 정체성 간의 경쟁이 생겼다. 이론처럼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1990년대까지, 다른 민족 국가들이 있었고, 소련으로부터 받은 민족 담론과 정체성을 계속해서 구축해 나갔다. 현재 러시아는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처럼 매우 러시아 민족주의적이고 국가 중심적이다.

문제는 구소련 공화국 대부분이 이런 민족주의 담론에 대항할 정치적 움직임이나 이념이 없다는 점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정치적 스펙트럼에는 민족주의가 있지만, 국제주의적인 접근도 있다. 즉, 우파를 상쇄할 세력이 있다. 옛 소련 공화국에는 그런 세력이 없었다. 볼셰비키의 유산 중에서 근대 국제주의 사회주의 운동이 파괴되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오늘날 중도좌파를 표방하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민족주의적이다."

ISC: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같은 인접국에 대한 푸틴의 비전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일마즈: "외교정책이나 안보정책 측면에서, 러시아 지도부는 인접국 영토를 러시아의 완충지대로 본다. 안보상 매우 중요하다. 유라시아 한 가운데에 있는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러시아는 미국이나 영국처럼 좌우에 바다가 있는 섬이나, 외떨어진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대륙 국가이다. 그래서 인접한 영토를 완충지대로 본다."

ISC: "포스트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항할 이념이 없다고 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소련의 몰락 때문인가?"

일마즈: "가장 큰 이유는 소비에트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소련의 부정적인 부분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국가와 국가 기구가 여전히 모든 것을 지배한다. 좌파나 국제주의 운동의 부재는 소련 시대의 안타까운 유산 중 하나다.

예를 들어, 강력한 노조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소비에트 시대에 노동조합은 관료적인 종이 호랑이가 됐다.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데, 자본주의 시대의 노조가 왜 필요한가라는 논리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조의 기능은 없어졌고 우리가 아는 정당은 일당체제였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민중의 정당이었다면 왜 다른 정당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하여 강력한 전통적인 정당이 없다. 정당 지지도는 1991년부터 문제가 되었고, 노동조합은 약화되었고, 좌파 정치는 그보다도 더 힘이 없다."

ISC: "소련의 국가주의가 소련 이후 시대에 이념이나 정당이 등장하고 꽃피울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마즈: "덧붙이자면, 이런 결과로 여러가지 세부사항과 함께 우익 담론, 특히 때때로 극우 담론이 더 인기를 끌게 됐다. 이런 현상은 독일에서 볼 수 있다. 독일 민족주의는 이전 서독보다 동독이 더 강하다. 독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ISC: "과거에 푸틴은 비용 효율적인 전략가로 규정됐다. 특히 좌파 중 다수는 러시아가 장기간 전쟁에 빠져있는 아프가니스탄처럼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강한 저항을 고려해보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보인다. 푸틴이 비용 효율적인 전략가가에서 변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마즈: "맞다. 나를 포함해 좌우파를 막론하고 다수의 전문가들, 특히 현실주의적 접근하는 사람들도 푸틴을 영리한 전략가로 모험을 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주의깊게 비용편익 분석을 하고 위험이 낮을 때 행동할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경우, 비용 효율적으로 보지 않았다. 이전처럼 분리주의자를 지원하거나 2차 민스크협정 이행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압박했을 수도 있다. 현재 푸틴의 무모함을 보면 미국의 군사적 모험이 연상된다. 아마도 이념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푸틴은 러시아 민족주의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조치를 취한 것일 수도 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역사 강연에서 푸틴은 전략가라기보다는 러시아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현대 우크라이나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전형적인 민족주의자가 그러하듯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 세기 전의 사건들을 이용했다.

한마디로 러시아 민족주의자인 푸틴이 전략가 푸틴을 집어삼킨 셈이다. 이것이 나의 입장이지만, 누군가는 푸틴이 더 기다리고 전략가로 활약하는 비용이 더 많은 위험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푸틴이 이렇게 분석했을지는 몰라도 그 분석 뒤에는 전략가가 아닌 민족주의자의 접근이 있다고 본다."

"나토의 확장이 러시아 국경에 더 가까워지자 긴장 심화"
 

▲ 지난 2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고렌카에서 영토방위대원인 한 시민이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피해를 입은 집 뒷마당에서 얼굴을 닦고 있다. ⓒ AP=연합뉴스


ISC: "서구 언론은 러시아의 군사적 행동을 이유 없는 침략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북한을 다루는 언론과 매우 유사하다. 미국 패권에 반대하는 국가의 공격은 종종 아무런 맥락 없이 단순히 비이성적이거나 이유 없는 것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러한 행동을 합리적인 지정학적 계산의 일부로 간주하는 분석을 하려는 시도는 북한이나, 이번 경우는 러시아인 침략자에게 지나치게 동조하는 것으로 그린다.

이 경우 주류 언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친러시아' 혹은 우크라이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난받는다. 하지만, 현재의 갈등을 부추기거나 고조시키는 데 있어서 미국의 역할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비용 효율적인 전략가 푸틴이 민족주의자 푸틴으로 변한 것은 결코 오랜 기간동안 나토가 러시아를 향해 확장해온 사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마즈: "막대한 권력 경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시카고 대학의 존 미어샤이머 교수도 강대국은 자국 영토 근처의 잠재적인 위협에 항상 민감하다고 언급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반구에 군대를 배치하는 강대국을 용납하지 않는다. 19세기부터 시작한 먼로 독트린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접근은 캐나다나 멕시코 내의 중국 세력과 같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나토가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로 확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서방 국가에게 여러 차례 언급했다. 게다가, 2008년 러시아는 러시아-조지아 전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사카슈빌리 조지아 대통령은 2008년 나토 회원국이 된 뒤 더욱 자신감을 가졌고, 서양군 장교가 훈련시킨 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남오세티야에서 러시아의 보호하에 있는 분리주의 지역을 수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분리주의자를 지원하고 조지아인들을 조지아로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 모든 것이 2008년에 발행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소련 외교정책을 저술한 미국의 저명한 외교관 조지 케넌조차 1998년 나토의 확대는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러시아인들은 '결국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고, 러시아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전략적인 실수였으며, 확장을 해야하는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러시아는 다른 국가를 위협하지 않았다.

나토 확대에는 흥미로운 역학관계가 있다. 물론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국가의 주체성도 고려해야 한다. 나토 가입국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동쪽으로부의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폴란드, 체코 등의 엘리트가 나토 안보체제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두 강대국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국가의 주체성이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토의 확장이 러시아 국경에 점점 더 가까워지자 당연히 긴장은 심화됐다. 그리고 미국의 정책의 역할이라고 하면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타임머신으로 1991년으로 돌아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핀란드, 오스트리아처럼 중립국으로 규정한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기회일 뿐이다. 현재는 완전히 다른 현실과 역학이 존재한다.

미국에게 우크라이나는 핵심적인 전략적 이해관계가 아니었지만 나토 가입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해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 것을 독려했다. 이로 인해 당연히 긴장은 심화되었다. 물론 2014년 이후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ISC: "민스크 평화협정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에 자치권을 더 많이 주는 것으로 돈바스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다. 일각에서는 민스크 협정이 좌초된 원인이 협정을 이행하면 EU나 나토 가입과 관련해서 동부 지역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두려워한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구 동맹국에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과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일부라고 선언함으로써 푸틴은 민스크 협정을 사실상 거부했다. 민스크 협정의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지, 향후 대안이 있다고 보는지 궁금하다."

일마즈: "맞다. 2차 민스크협정이 대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를 고려할 때 협정 이행은 어려웠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당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군사 작전 때문에 협정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협정에 서명하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힘을 키워 협정 내용을 수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유럽이나 미국도 우크라이나에게 협정 이행을 장려하지 않았다. 러시아 입장에서, 이 협정은 좋은 거래였기 때문에 러시아는 지난 6-7년 동안 협정 이행을 기다렸다. 우크라이나에 민스크협정을 이행하려는 친러시아 정부 있었다면 협정을 이행했을 것이다."

러시아 그리고 중국
 

▲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일(현지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ISC: "현재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는가?"

일마즈: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확실한 측면이 많다.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러시아는 약해질 것이다. 만약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에서 계획한 만큼 빠르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러시아 내부의 변화를 촉발시킬지도 모른다.

이는 경제위기의 영향에 달려 있다. 러시아 역사를 살펴보면 1856년 크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과 같은 군사적 어려움 이후에 대부분의 체제 변화가 생겼다. 크림 전쟁 이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농노 해방이 이뤄졌다. 또한, 1차 세계 대전 중에 1917 혁명이 일어났고 누군가는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소련군의 상황이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푸틴의 목표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러시아는 더 약해지고 고립될 것이다. 우크라이나도 전쟁으로 인한 파괴 때문에 더 약해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강대국인 중국이 판도를 바꾸는 첫 유럽의 위기 또는 세계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중국은 신중한 외교를 하고 있다. 미국은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중국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러시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징후가 보이기 때문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언론과 유출된 문서를 보면, 미국이 중국의 개입을 요구하는 그림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세계 정치에서 부상하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갈등하는 강대국 간의 평화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여기 권력 경쟁 구도가 있다.

중국은 이번 위기 이후 일정한 균형을 보장함으로써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래서 서구에게는 쇠퇴하는 수정주의 러시아를 통제하기 위해 중국이 필요하다. 그리고 푸틴은 누구보다 시진핑의 말을 잘 듣는다. 궁극적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에 상관없이 중국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이 끝나면, 중국은 세계 질서 재편에 더 많은 발언권을 갖게 될 것이다."

ISC: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마즈: "이 전쟁은 누구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전쟁이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유럽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이 전쟁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전쟁은 파괴적이고 반동적인 전쟁이다. 아무 이득도 없고, 좋을 게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국제전략센터 웹사이트(www.goisc.org)에 영문과 한글로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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