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의 생일상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일상 ⓒ 정지현
내가 중학생일 때부터 부모님은 마트를 운영했다. 삼십오 년 전 큰 도시도 아닌 작은 소도시에서 직원도 십여 명이나 되는 마트였으니 규모가 꽤 컸던 대형마트였다. 부모님이 마트를 운영하다 보니 남들은 좀처럼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과자나 음료들도 난 손만 뻗어 먹을 수 있었다. 새로 나온 라면도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먹어볼 수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점들이 있었지만 그런 여러 이점에도 불구하고 상쇄가 되지 않는 약점(?)도 존재했다. 365일 연중무휴에, 아침 8시 30분에 오픈하고, 저녁 10시까지 운영하는 마트의 특성상 가족의 생일이나,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과 같이 특별한 날에 대한 추억이 많이 없다. 아니 머리가 큰 이후 있는 추억이라고는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대신해 명절 전날까지 일한 기억이 전부라고 할 정도였다.
핑계 같지만 삼사십 대 가진 것 없이 시작한 샐러리맨의 하루하루는 전쟁터 같았고, 휴일에는 내 가족을 돌보느라 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어느새 부모님이 마트 하던 시절과 다를 바 없이 부모님의 특별한 날은 그렇게 보내기 일쑤였다. 돌아보면 조금만 신경 썼으면 낼 수 있는 시간들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찰나의 시간을 내는 것조차도 그리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이년이 훌쩍 넘었다. 아직도 그리 고집스럽고, 강성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를 마음에서 조금씩 밀어냈던 그 시절 내 마음에 씁쓸함이 남아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도 아내 덕에 어머니의 마지막 5년은 따뜻한 생일상을 챙겨 드릴 수 있었다.
어머니 당신의 마지막 5년, 몸은 힘이 들었고 마음은 지치셨을 때였다. 항암제로 늘 입맛이 없었고, 밥맛이 없었던 때였지만 아내가 내어놓은 음식은 억지로라도 끌어서 한 입을 물곤 하셨다. 아픈 몸 때문에 자주 웃을 때는 아니셨지만 생일상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 순간만큼은 환하게 웃으셨다. 아니 환하게 웃었을 거라고 내가 기억 조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 항암 치료를 목적으로 6주에 한 번씩 찾던 병원에서 더 이상 어머니가 생일을 맞이할 수 없을 거라는 통보를 받았었다. 언제고 올 날임을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생일상을 받아 들고 웃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갔고, 어느새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두 달이 안 되는 시간을 보내고, 우리에게 이별을 고했다. 돌아가신 지 이년이 넘자 예전보다는 어머니 생각이 그리 자주 나지는 않는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머니 생각에 그리움은 있지만 예전처럼 아쉬움은 지우려고 애쓴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아내의 성심을 다한 생일상도, 아내와 나의 따뜻한 마음도 고이고이 품고 가셨으니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옅어지는 그리움과 슬픔만큼 어머니도 좋은 곳에서 더 이상 자식, 남편 걱정을 잊고 잘 살아가리라 믿는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아내는 돌아가신 이후에도 늘 해오던 대로 어머니의 생일상을 정갈하게 준비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사도 아닌 당신의 생일날에 또 한 번 아침상을 받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생일상을 차릴지는 모르지만 마음만으로도 훈훈해지는 밥상에 정갈한 반찬들과 함께 그리움과 따뜻함이 얹힌 기분이다.
'어머니, 아직은 날씨가 찬데 따뜻하고, 든든하게 미역국 한 그릇 하고 가세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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