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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하는 축구는 즐거움이고 행복이죠"

[인터뷰] 몬스터FC축구교실 김남하 감독

등록|2022.03.16 09:39 수정|2022.03.16 09:39

몬스터FC축구교실 할로윈행사2020~2021년은 할로윈행사를 하지 못해 서산관내 학교에서 추천받은 학생들을 직접 돕고있다. ⓒ 최미향


"결혼 전부터 미국인 아내와 함께 주변의 어려운 친구를 조금씩 돕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하나뿐인 딸이 6년간 기른 머리를 기부하였다고 들었어요. 코로나가 없던 해에는 할로윈 파티를 열어 수익금으로 2년 동안 불우이웃 돕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분들은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도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했어요."

얼마전, 착한 사람이 있다는 말과 함께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분으로, 특히 이웃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축구 감독이 서산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며 인터뷰를 추천했다. 지난 12일, 충남 서산 인지면에 있는 '몬스터FC' 축구교실 김남하 감독을 만났다.
   
- 언제부터 축구를 하게 됐나?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 아버지가 해미초 축구 감독님이셨다. 아버지를 열심히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축구는 내 인생의 전부가 됐다. 1학년이 되던 해였다. '왜 저에게는 유니폼을 주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넌 아직 어려서 안 주는 거야. 3학년이 되면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어와!'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나는 3학년이 될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입단한 축구부가 벌써 34년 전이다. 막상 들어가고 보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축구가 마냥 즐거운 운동만은 아니란 사실을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알았다.

재미는 있었지만 운동장을 엄청나게 뛰어야 했고, 팀 운동이다 보니 개인이 못 해도 단체가 벌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도 나에게 축구를 뺏어갈 수는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재미, 잘 안 되는 기술을 노력해서 이루는 쾌감, 모든 것이 겨우 10살인 내겐 행복 그 자체였다."
 

▲ 몬스터FC축구교실 김남하 감독 ⓒ 최미향

   
- 서산에서는 꽤 이름난 스포츠 집안이었다. 가족들을 소개해달라.
"서산시 해미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해미초등학교 축구 지도자셨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우리 4남매는 모두 다 운동을 좋아했다. 큰누나는 육상, 높이뛰기, 발레를 했고. 둘째 누나는 육상, 포환, 유도국가대표 상비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다. 셋째 누나는 태권도와 축구를 하는, 그야말로 우리 집은 스포츠 가족으로 유명했다.

면민 체육대회, 시 체육대회, 도 체육대회, 전국대회가 열리는 곳은 우리 가족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성인이 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막내인 내가 축구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힘든 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가 기대했던 만큼의 운동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남들보다 힘들고 엄하게 하면 아들이 운동을 그만두리라 생각하셔서 더욱 강하게 운동을 시키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혹독함이 오히려 '좀 더 노력해야겠구나' 스스로를 강하게 채찍질하는 계기가 됐고, 덕분에 초등학교 졸업 당시 서울, 경기의 여러 축구 중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스카우트를 물리치고 나는 해미중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프로 축구 선수 출신의 지도자 박석규 선생님(현 명지중학교 교감)을 만나 전혀 다른 스타일의 축구를 배우게 됐다. 동계 합숙 훈련 중, 눈 쌓인 아침 타이어를 끌어서 운동장 눈을 치웠고 그것도 부족해 울퉁불퉁한 운동장을 평평하게 될 때까지 타이어를 끌어야 했다.

그 당시 다른 신입생들보다 체격이 컸던 내게 박석규 선생님은 친구들보다 더 큰 타이어를 주며 2단 뛰기를 시키셨다. 사실 덩치만 컸지 2단 뛰기를 하지 못한 나를 알에서 깨어나게 해주신 분이 박석규 선생님이시다."
   
- 살아가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1992년은 내 생애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가을이었다. 어머니는 충남 체고에 다니던 누나를 만나기 위해 일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논산으로 출발했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덤프트럭과 충돌하여 전신의 뼈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한 달 만에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월요일 새벽이었다.

모든 것이 어두웠고, 모든 것이 무너졌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운동도, 밥도,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루가 멀다고 나는 숨어서 혼자 울기만 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문득 저 하늘에서 어머니가 내 모습을 보면서 슬퍼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긴 시간을 보내다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어머니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미친 듯이 훈련에 매달렸다. 아들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남하 선수. ⓒ 최미향


- 어린 마음에 정말 큰 상처였을 것 같다. 그 후가 궁금하다.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또 인생인 것 같다. 갑자기 찾아온 허리 통증이 나를 다시 주저앉혔다. 새벽에 일어나려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만큼 큰 통증이 나를 무력하게 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며 근육통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져 양말 한 짝도 신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병원으로 달렸다. 검사 결과는 '요추분리증으로 인한 허리디스크 파열'이었다. 선수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중학교 2학년 열다섯 나이에 요추분리증과 허리디스크 파열이라니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었다.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 '허리에 철을 이식하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못 걷습니다! 거기에 디스크까지 파열돼서 운동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청천벽력 같은 의사 선생님 말씀에 '걷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운동만은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며 돌아서 나와 버렸다. 눈물이 흘렀다.

그때부터 허리 전문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다행히 대전의 한 병원에서 '야구 김재박 선수도 요추분리증이 있으며 치료받은 후에도 야구를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보았다. 그 후 디스크 파열된 부분만 수술하고 재활 훈련을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어나 운동장을 밟았다. 그렇게 나는 꿈에 그리던 기회를 손에 쥐게 됐다."
 

해미중학교 소년체전 우승사진. ⓒ 최미향


- 두 번의 위기 뒤에 찾아온 엄청난 기회가 궁금하다.
"'대한축구협회 축구 꿈나무 제1회 브라질 축구 유학'이라는 멋진 타이틀을 손에 쥐게 됐다. 그때 브라질로 간 것이 비상할 수 있는 발판이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국만리 운동장에 첫발을 내디디니 이미 운동장 여러 클럽에는 일본 아이들이 뛰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가위·바위·보'조차 패하면 안 된다는 일본과의 경쟁은 대한민국 대표로 선발되어 갔던 우리의 가슴 속에도 깊이 박혀 있었다.

브라질에서의 훈련은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부드러운 훈련으로 진행됐고, 지도법 또한 나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해미중학교 충남 소년체전 축구 창단 이후 첫 우승'이라는 감동을 목에 걸었다. 당시 상대 팀은 공주 유구중학교로 전국대회 우승 학교였고, 천안중학교는 전국대회 4강 팀이었다."

- 당시 브라질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이유가 뭔가?
"사실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브라질로 다시 떠나려고 준비했는데 준비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포기했다. 대신 수원공업고등학교에 스카우트 됐다. 하지만 선배의 백태클로 인해 그만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었고 '병원에 늦게 와서 인대가 너무 많이 말려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또 찾아온 부상과 방황이 시작됐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여 드린다는 게 너무 슬펐다. 아버지께 훌륭한 선수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도 마음 아팠다. 차라리 선수가 되지 못한다면 아버지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건 어떨까 혼자 고민하는 날들이 깊어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 말 한서대학교 축구팀 창설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팀이 창단된다는 것은 분명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당시 한서대학교 팀에서 주전 골키퍼의 훈련 도우미를 하며 1년 동안 트레이닝을 받았고, 그 후 최종덕 유명 어린이 축구교실을 시작으로 언암초등학교에서 지도자 생활로 출발했다."
 

우승트로피“애들이 즐길 수 있는 축구를 가르쳐라! 탄탄한 기본기를 가르쳐라! 23년 넘게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더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 감독 ⓒ 최미향

 
- 부자지간에 축구 지도자가 됐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다.

"재미있는 일보다 배움이 깊어졌다. 제1회 최종덕 어린이 축구대회에서 언암초가 우승하면서 나는 모교인 해미초등학교 코치로 들어가게 됐고, 아버지는 대신 언암초등학교로 들어가 훈련을 시키셨다. 당시만 해도 해미초는 70년 전통의 축구부가 있었지만, 우리가 졸업한 후에는 이렇다 할 성적이 없던, 거의 끝나가던 팀이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어느 정도 실력이 올라왔을 때 즈음, 아버지가 가르치는 팀과 연습게임을 하자고 신청했다. 결과는 패배였다. '기술뿐만 아니라 체력도 좋은데 패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애들이 즐길 수 있는 축구를 가르쳐라! 탄탄한 기본기를 가르쳐라! 23년 넘게 아이들을 지도하다 보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더라' 그 한마디는 내 머릿속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았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여전히 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수많은 이야기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침이 되고 있다."
   
- 조심스러운데 당시 아버님의 사망 소식은 서산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 가족들을 정말 힘들게 했다. 그날도 나는 다음날이면 충남소년체전에 나갈 선수들을 훈련하던 중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정년퇴직을 앞두신 아버지는 한 달간의 휴가를 받으셨다. 불의의 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아버지. 나는 우러러볼 하늘을 잃었다는 슬픔에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열네 살에 어머니를 일찍 보내드리고, 또다시 십 년 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나니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평생 아이들을 위해 사신 아버지마저 데려간 세상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상을 치르자마자 나는 해미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을 데리고 충남 소년체전에 출전했고 우리는 준우승을 했다.

그리고 그해 지도자를 그만두고 4년 동안 방황을 했다. 그때 나를 다시 잡아주신 건 해미 출신 축구 국가대표 감독 이태형 선생님이셨다. "다시 한번 축구를 가르쳐 보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장이 그렇게 뛸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은 그라운드였어.'"
 

2019년 3월 17일에 있었던 HI SPRING 전국 유소년 축구대회 고학년 우승. ⓒ 최미향


- 다시 운동장으로 복귀를 하셨는데 마음가짐이 새로웠을 것 같다.
"물론이다. 고민 끝에 다시 해미중학교 축구부를 지도했고 결국 충남 리그 2위와 전국 왕중왕전 출전을 하게 이르렀다. 그해 출전을 끝으로 서림초등학교 스포츠 강사로 입사하면서 축구 클럽을 만들어 운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모티브는 '즐거운 축구! 자존감을 높여주는 축구! 올바른 리더십을 가르치자! 사회성을 길러주자!'는 것이었다.

내 생각은 옳았다. 그때 축구를 배운 아이들은 존중과 희생, 긍정적 변화로 학교생활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그 아이들은 향후 서산중 전국 우승대회라는 축구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학생들로 성장했다.
   
그 후 서산시에서 운영하는 서산FC 수석코치로 입사하면서 창단 첫해 충남 초등리그 3위, 이듬해에는 2위,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충남에서는 상위권으로 팀을 올려놓고 코치 자리에서 물러나 지금은 일반 학생들을 위한 '몬스터FC'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를 운영하면서도 지도자로서 더 많은 경험과 견문을 넓히고자 4년 전에는 독일로 축구 연수를 다녀왔다.

2018년 독일 연수당시 샬케 홈경기 관람 빈자리를 찾아 볼 수없을 만큼 사람들이 축구를 사랑하는 것을 느꼈다. 그 외, 여러나라로 연수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우선 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 실력을 올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과 아이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주는 것, 아이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준다는 것이다. 그때 배운 것들은 우리 몬스터FC의 신조가 되어 즐거운 축구, 자존감을 높여주는 축구로 아이들의 행복에 일조하고 있다."
 

할로윈축제할로윈 축제 수입금으로 불우이웃 돕기를 했다. ⓒ 최미향


몬스터실내축구센터는 2018년 9월 창단하여 각종 대회에서 빛나는 수상을 한 데 이어 올해는 축구를 사랑하는 여성들을 위한 '공 때리는 그녀들'을 오픈했다. 앞으로도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건강한 장소를 만들고자 노력할 예정이라는 김남하 감독은 부모님 얘기를 할 때는 슬픔에 가슴을 쓸어내리다가도 축구 얘기에서는 다시 평상심을 찾아 행복한 미소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가 말하는 '꿈을 키우고, 자존감을 높여주며, 친구를 만들어주는,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의 밝은 내일을 만들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곳이 바로 몬스터FC축구교실이기를 기원해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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