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삼별초의 기억을 담은 강화 외포리 망양돈대
[돈대를 찾아가는 길 8] 강화도 외포리 '망양돈대'를 찾아서
1270년 음력 6월 1일, 그날은 비가 왔을까? 장마철로 막 접어들 무렵이니 비가 왔을 것도 같다. 설혹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았더라도 그날 강화도는 눈물의 홍수가 흘러 내렸을 것 같다.
살기 위해 떠나지만 그 길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길이었다. 전라도 진도까지, 바닷길로 천 리도 넘는 길을 가야 한다. 항해에 익숙한 사람들도 아니다. 무예에 단련된 병사도 있었지만 부녀자를 비롯해 일반 백성들까지 태운 배가 천 척도 넘게 외포리 앞 바다에서 출항했다.
삼별초 출항지 강화 외포리
고려 삼별초 이야기다. 망양돈대가 있는 외포리는 삼별초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고려가 몽골과 화친을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할 때 삼별초는 몽골에 머리를 숙이는 삶을 거부하고 진도로 떠났다. 그 길은 쫓기는 길이었다. 여몽연합군에게 쫓겨 삼별초는 강화에서 진도로 갔고, 그곳에서 또 제주로 갔다가 마침내 저항의 불꽃이 꺼졌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3월의 끝자락에 외포리에 갔다.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외포리는 조선시대에는 '정포'라고 불리었다. 동네 초입에 우물이 있어 우물 정(井)자, 포구 포(浦)자를 쓰서 '정포(井浦)'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정포는 배를 댈 수 있는 마을이었다. 강화는 섬이지만 배를 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바닷가는 물이 빠지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이 많았다. 배를 댈 수 있는 정포는 그래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배를 댈 수 있는 곳, 정포(외포리)
조선시대 강화는 수도 한양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나라에서는 강화에 5개의 진과 7개의 보 그리고 54개의 돈대를 쌓아 강화의 해안을 방비했다. 정포에도 정포보(井浦堡)'를 두어 바다를 경계하고 방비했다.
정포보 관할 아래 석각돈대, 삼암돈대, 건평돈대, 그리고 망양돈대 등 4개의 돈대가 있었다. 석각과 삼암 그리고 건평돈대가 정포(외포리)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면 망양돈대는 정포에 있는 돈대였다.
망양돈대는 바닷가 경사진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다. 돈대 성벽 위에 서면 사방이 훤히 다 내려다보인다. 외포리 앞 바다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멀리 마니산과 그 아래 바다도 다 보인다. 그래서 돈대 이름도 '망양(望洋)'인 걸까. 바다를 멀리 내다보는 돈대라니, 외포리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와 딱 맞는 이름 같다.
정포는 서해로 나가는 포구였다. 그래서 삼별초는 이곳에서 진도로 향해 배를 띄웠을 것이다. <고려사>에서 보면 삼별초 군은 배중손을 대장으로 강화의 구포(仇浦)에서 출항했다. 구포는 외포리 위쪽에 있는 현재의 내가면 구하리 일대를 말한다. 구하리는 지금은 간척을 해서 평야지대가 되었지만 삼별초가 출항했던 고려시대에는 바다와 통하는 하구였다.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듯
구하리에서 외포리까지의 바다는 강화를 떠나 진도로 향하는 배들로 빽빽했을 것이다. 천 척이나 되는 배가 한꺼번에 출항했으니 그 정경은 말해 무엇 할까. 몽골과의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강화를 떠났지만 실상은 패자의 퇴로였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뒤를 쫓았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길이었다.
삼별초군은 망양돈대가 들어선 언덕에서 서해로 가는 바닷길을 바라봤을 것이다. 항파(缸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어 있는 바다였다. 천 척의 선단은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듯이 외포리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삼별초가 떠났던 외포리에 돈대가 들어섰다. 숙종 5년, 1679년이었으니 삼별초가 떠난 지 400여년 뒤다. 돈대가 들어선 곳의 지명을 따서 정포돈대라고 이름을 지었을 법도 한데 '망양돈대'라고 명명했다. 삼별초의 피눈물이 외포리에 전해져 내려왔던 것일까. 그래서 돈대 이름을 바다를 멀리 내다본다는 뜻의 망양(望洋)이라고 지었을 듯 하다.
망양돈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7호로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에 위치한다. 돈대의 생긴 모양새는 정사각형이며 둘레는 130m로 54개 돈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바다로 향한 성벽에는 대포를 앉히기 위한 포대가 4개 있으며 성축의 윗부분에는 성가퀴(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가 40개 있었는데 현재 원형을 살려서 복원해 놓았다.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
외포리는 이렇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삼별초가 떠난 지 400여 년 뒤에 망양돈대를 쌓았다.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몽골에 대항했고 조선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돈대를 쌓았다.
망양돈대 아래에는 삼별초를 기리는 비석이 하나 서있다. 비문의 앞면에는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뒤에는 삼별초를 기리는 문장이 적혀 있다.
삼별초 유허비 앞에는 돌하르방과 진돗개 모형물도 있다. 삼별초가 터를 잡았던 강화도와 진도 그리고 제주도를 상징하는 조형물들이다.
바다도 포구도 세월 따라 변했다. 삼별초가 출항했던 구하리 앞 바다는 간척을 해서 드넓은 들판이 되었다. 정포라고 불리었던 포구 마을도 이름이 바뀌었다. 밖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했던 포구였지만 이제는 그런 외침의 위협과 불안은 없다.
외포리(外浦里)는 밖을 내다보는 곳이다. 외적의 침탈이 있을까 불안해하는 곳이 아니라 그 너머를 모색하고 궁리하는 곳이다. 안에서 벗어나 밖을 지향하는 포구가 바로 외포리다.
삼별초의 기억이 남아있는 외포리 망양돈대에서 750여 년 전인 1270년 6월 1일을 그려본다. 무심한 갈매기들이 그때인 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망양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37호.
. 크기 및 모양 : 정사각형이며 둘레는 130m.
. 망양돈대의 보존 현황 : 1995년 지표 조사후 정비, 복원함.
. 근처 돈대 : 북쪽으로 삼암돈대가 남쪽으로 건평돈대가 있음.
. 주변 볼거리 : 외포젖갈시장이 근처에 있음.
살기 위해 떠나지만 그 길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길이었다. 전라도 진도까지, 바닷길로 천 리도 넘는 길을 가야 한다. 항해에 익숙한 사람들도 아니다. 무예에 단련된 병사도 있었지만 부녀자를 비롯해 일반 백성들까지 태운 배가 천 척도 넘게 외포리 앞 바다에서 출항했다.
고려 삼별초 이야기다. 망양돈대가 있는 외포리는 삼별초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고려가 몽골과 화친을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할 때 삼별초는 몽골에 머리를 숙이는 삶을 거부하고 진도로 떠났다. 그 길은 쫓기는 길이었다. 여몽연합군에게 쫓겨 삼별초는 강화에서 진도로 갔고, 그곳에서 또 제주로 갔다가 마침내 저항의 불꽃이 꺼졌다.
▲ 강화 외포리 삼별초 유허비 ⓒ 이승숙
봄을 재촉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3월의 끝자락에 외포리에 갔다. 강화군 내가면에 있는 외포리는 조선시대에는 '정포'라고 불리었다. 동네 초입에 우물이 있어 우물 정(井)자, 포구 포(浦)자를 쓰서 '정포(井浦)'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정포는 배를 댈 수 있는 마을이었다. 강화는 섬이지만 배를 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바닷가는 물이 빠지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이 많았다. 배를 댈 수 있는 정포는 그래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배를 댈 수 있는 곳, 정포(외포리)
조선시대 강화는 수도 한양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나라에서는 강화에 5개의 진과 7개의 보 그리고 54개의 돈대를 쌓아 강화의 해안을 방비했다. 정포에도 정포보(井浦堡)'를 두어 바다를 경계하고 방비했다.
정포보 관할 아래 석각돈대, 삼암돈대, 건평돈대, 그리고 망양돈대 등 4개의 돈대가 있었다. 석각과 삼암 그리고 건평돈대가 정포(외포리)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면 망양돈대는 정포에 있는 돈대였다.
▲ 강화 외포리 망양돈대 ⓒ 이승숙
▲ 강화 외포리 망양돈대 ⓒ 이승숙
▲ 강화 외포리 망양돈대 ⓒ 이승숙
망양돈대는 바닷가 경사진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다. 돈대 성벽 위에 서면 사방이 훤히 다 내려다보인다. 외포리 앞 바다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멀리 마니산과 그 아래 바다도 다 보인다. 그래서 돈대 이름도 '망양(望洋)'인 걸까. 바다를 멀리 내다보는 돈대라니, 외포리가 가진 역사적인 의미와 딱 맞는 이름 같다.
정포는 서해로 나가는 포구였다. 그래서 삼별초는 이곳에서 진도로 향해 배를 띄웠을 것이다. <고려사>에서 보면 삼별초 군은 배중손을 대장으로 강화의 구포(仇浦)에서 출항했다. 구포는 외포리 위쪽에 있는 현재의 내가면 구하리 일대를 말한다. 구하리는 지금은 간척을 해서 평야지대가 되었지만 삼별초가 출항했던 고려시대에는 바다와 통하는 하구였다.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듯
구하리에서 외포리까지의 바다는 강화를 떠나 진도로 향하는 배들로 빽빽했을 것이다. 천 척이나 되는 배가 한꺼번에 출항했으니 그 정경은 말해 무엇 할까. 몽골과의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강화를 떠났지만 실상은 패자의 퇴로였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뒤를 쫓았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길이었다.
삼별초군은 망양돈대가 들어선 언덕에서 서해로 가는 바닷길을 바라봤을 것이다. 항파(缸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어 있는 바다였다. 천 척의 선단은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듯이 외포리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 외포리 앞 바다와 갯벌. 저 멀리 마니산이 보인다. ⓒ 이승숙
▲ 망양돈대 포대 구멍으로 내다본 바다 ⓒ 이승숙
그렇게 삼별초가 떠났던 외포리에 돈대가 들어섰다. 숙종 5년, 1679년이었으니 삼별초가 떠난 지 400여년 뒤다. 돈대가 들어선 곳의 지명을 따서 정포돈대라고 이름을 지었을 법도 한데 '망양돈대'라고 명명했다. 삼별초의 피눈물이 외포리에 전해져 내려왔던 것일까. 그래서 돈대 이름을 바다를 멀리 내다본다는 뜻의 망양(望洋)이라고 지었을 듯 하다.
망양돈대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7호로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에 위치한다. 돈대의 생긴 모양새는 정사각형이며 둘레는 130m로 54개 돈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한다. 바다로 향한 성벽에는 대포를 앉히기 위한 포대가 4개 있으며 성축의 윗부분에는 성가퀴(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가 40개 있었는데 현재 원형을 살려서 복원해 놓았다.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
외포리는 이렇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삼별초가 떠난 지 400여 년 뒤에 망양돈대를 쌓았다.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몽골에 대항했고 조선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돈대를 쌓았다.
망양돈대 아래에는 삼별초를 기리는 비석이 하나 서있다. 비문의 앞면에는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뒤에는 삼별초를 기리는 문장이 적혀 있다.
▲ 삼별초 유허비 앞의 돌하르방과 진돗개 모형 ⓒ 이승숙
'이 터전은 강화도 삼별초군이 1270년 6월 1일 몽고에 대항하여 내 나라를 지키고자 궐기한 근거지이다. 원나라의 볼모가 된 원종 임금이 환국할 새 문인 중신들마저 강화도를 버리고 개성으로 돌아가니 용사들로 조직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삼별초군은 강화섬 여기를 발판 삼고 단호히 몽고군에게 결사항전 정황 따라 전라도 진도로 제주도까지 싸우다가 끝내 아름다운 꽃으로 흩어졌다.'
삼별초 유허비 앞에는 돌하르방과 진돗개 모형물도 있다. 삼별초가 터를 잡았던 강화도와 진도 그리고 제주도를 상징하는 조형물들이다.
▲ 강화 외포리 삼별초유허비와 그 뒤 언덕에 있는 망양돈대 ⓒ 이승숙
▲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외포리 주민 ⓒ 이승숙
바다도 포구도 세월 따라 변했다. 삼별초가 출항했던 구하리 앞 바다는 간척을 해서 드넓은 들판이 되었다. 정포라고 불리었던 포구 마을도 이름이 바뀌었다. 밖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했던 포구였지만 이제는 그런 외침의 위협과 불안은 없다.
외포리(外浦里)는 밖을 내다보는 곳이다. 외적의 침탈이 있을까 불안해하는 곳이 아니라 그 너머를 모색하고 궁리하는 곳이다. 안에서 벗어나 밖을 지향하는 포구가 바로 외포리다.
삼별초의 기억이 남아있는 외포리 망양돈대에서 750여 년 전인 1270년 6월 1일을 그려본다. 무심한 갈매기들이 그때인 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망양돈대 기본 정보>
.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 37호.
. 크기 및 모양 : 정사각형이며 둘레는 130m.
. 망양돈대의 보존 현황 : 1995년 지표 조사후 정비, 복원함.
. 근처 돈대 : 북쪽으로 삼암돈대가 남쪽으로 건평돈대가 있음.
. 주변 볼거리 : 외포젖갈시장이 근처에 있음.
덧붙이는 글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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