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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한적한 골짜기가 '아트 밸리'로

경북 상주 연악산에 위치한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아래’와 ‘에파타’ 이야기

등록|2022.04.09 11:11 수정|2022.04.10 13:47

▲ 갤러리 카페 '포플라나무아래'는 2018년 6월에 문을 열어 지금껏 60여회의 전업 작가와 동호인 모임의 각종 전시회를 치러냈다. ⓒ 장호철


며칠 전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아래'가 있는 상주 연악산 골짜기를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포플러나무아래'를 운영하는 안인기 화백(60)을 만났고, 카페 건너편 언덕에 문을 연 새 갤러리 '에파타(Ephatha)'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은퇴한 미술 교사, 무료 갤러리 '포플러나무아래'를 열다

안 화백이 연악산 갑장사로 오르는 길섶에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아래'를 연 것은 2018년 6월이었다. 그해 2월 명예퇴직으로 3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감한 미술 교사 안 화백은 자연석과 철을 이용한 몇 가지 입체 작업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요즘 그는 철판에 플라스마 용접기를 이용하여 독특한 질감과 색채를 표현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상주시 지천1길 130번지 카페 건물을 매입했다. 인근에 작업실을 찾고 있던 그는 카페 건물을 지었으나 영업 허가나 나지 않자 팔려고 내놓은 건물을 망설이지 않고 샀다. 서른 평쯤 되는 카페는 2층이지만 1층이 언덕 아래 가려져 있어 호젓한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안 화백은 아래층은 살림집으로 쓰고, 2층은 전시 공간으로 개조하여 '무인 셀프바'로 운영하면서 전시를 희망하는 이에게 무료로 대여하는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아래'를 열었다. 전시 공간이 부족한 지역에 미술 관련 작가들과 동호인들에게 부담 없이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개방적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 작품 '포즈'. 요즘 안인기 화백은 철판에 플라스마 용접기를 이용하여 독특한 질감과 색채를 표현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 장호철

   

▲ '우일란 개인전'(3.22.~4.9.)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포플라나무아래'의 내부 모습. 중앙 탁자에 앉은 이 중 마스크 낀 이가 우일란 작가다. 작가 뒤편으로 셀프바 주방이 보인다. ⓒ 장호철


'셀프바'라 했지만 갤러리 카페에선 물론 술을 팔지는 않는다. 대신 2천 원의 이용료를 통에 넣고 입맛대로 차를 타 마시면서 전시 작품을 둘러볼 수 있다. 갤러리는 전시회를 연 이가 지킬 때도 있지만, 비어 있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이용료는 사실상 강제되지 않는다.

안 화백은 특별한 갤러리 운영 원칙을 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한 전업 작가든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작가든 수준을 따지지 않고 전시하며 특히 대관료, 리플릿과 현수막 제작 등에서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갤러리를 운영해 왔다.

전업과 아마추어 불문 전시장 무상 제공하는 갤러리 카페

그해 8월 중순께 나는 처음 그의 갤러리를 찾았는데, 주방 앞에 붙은 "수익금은 갤러리 운영에 사용됩니다"라거나 "거스름돈이 없으면 외상으로……" 따위의 안내를 읽으면서 반신반의했다. 거의 종일 냉방기를 틀어놓고, 드나드는 사람이 찻값으로 내는 돈으로 전시장을 운영한다는 게 어쩐지 미덥지 않아서였다.

내 쪼잔한 염려에 그는 "돈이 되지는 않겠지만 망할 걱정도 없다는 장점도 있다"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는 바지런히 몸을 움직임으로써 금방 적자가 쌓일 것 같은 갤러리 살림살이의 균형을 잡아냈다.

카페를 열면서 그는 바닥의 에폭시 작업, 카페 안 탁자나 장식물 등을 전부 스스로 해결했다. 정크아트(Junk Art) 작업을 하는 그는 용접에 능해 온갖 방식으로 물건을 재활용했다. 나무나 철제의 소품을 뚝딱 만들어내는 그에게 손님들의 이어지는 주문은 적자를 보전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 나는 미덥잖아 했지만, 갤러리 포플라나무아래는 지난 4년간 60여 회 이상의 각종 전시회를 치러냈고 올해도 20회 이상의 전시가 계획돼 있다. 2021년과 2022년의 월별 전시 목록. ⓒ 장호철


아무리 지역 문화에 관심이 각별하다고 해도 돈이 안 되는 일에 수억의 돈을 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그는 그걸 해냈고, 당시 카페의 전시 계획은 이듬해 11월까지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옹근 3년이 흘렀다. 그중 2년간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얼어붙은 시기였다. 지난 2월에 그와 안부 전화를 하다가 여전히 갤러리 전시회는 이어지고 있고, 근처에 비슷한 형식의 갤러리가 또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날을 받아 그를 다시 찾았다.
 

▲ 포플라나무아래 맞은편 언덕에 2021년 4월에 문을 연 이정애 화백의 갤러리 ‘에파타(Ephatha)’. 지난 1년간 에파타에서는 전업 작가 중심의 10여 회의 전시가 이루어졌다. ⓒ 장호철

 

▲ 갤러리 ‘에파타(Ephatha)’의 전시장. 중앙의 계단으로 1, 2층이 연결된 내부는 구조적으로 대형 전시가 가능한 공간으로 현재 진행 중인 전시는 '권오준 조각전'(3.15.~4.10.)이다. ⓒ 장호철

 
팬데믹 기간에 무려 60회의 전시회를 치러내다

어쩐지 미덥잖아 했던 내 우려와 달리 그간 안 대표의 갤러리 카페에서는 대략 60여 회의 개인전 및 그룹 전시회가 열렸다. 인구 9만5천(2022년 3월 현재)의 상주시에 화랑이라곤 상주문화회관 지하 전시장 하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의 갤러리가 얼마만 한 구실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3월 30일, 수요일 오후에 그의 갤러리를 찾았을 때, 작지 않은 마당에 차가 빼곡했다. 전시장을 찾는 이는 얼마나 될까 늘 근심스러웠는데, 요즘은 하루 40~50명 이상이 찾아온다고 했다. 갤러리는 이미 1년 뒤까지 예약이 꽉 차 있다. 그건 달리 말하면 갤러리가 이 소도시의 '문화 수요'를 온전히 받아안고 있다는 뜻이다.

전시 중인 '우일란 개인전'을 둘러본 뒤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갤러리가 쉴 틈이 없는 이유를 인구는 적어도 동호회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역의 특성에서 찾았다. 여기엔 지역 대학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원의 영향도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회로 한 퇴직 공무원이 수십 년 모아온 희귀한 장서와 소장 작품을 전시한 것을 꼽았다. 전시 공간에 책과 소장 작품을 전시하니 갤러리가 미니 도서관이 되었다고. 그는 "갤러리에 미술 작품이 걸려있는 거라는 생각을 바꾼 멋진 전시회"였다고 회고했다.

갤러리 '포플러나무 아래' 건너편 산자락에 갤러리 '에파타(Ephatha)'가 문을 연 것은 지난해 4월이다. 지역에서 오래 작품활동을 해온 서양화가 이정애 화백(63)이 안 화백의 갤러리와 같은 형식으로 문을 연 것이다.

주인이 부재중인 갤러리에는 안동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권오준의 초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실은 1층 중앙의 나무계단을 오르면 다락방처럼 꾸며진 2층으로 이어졌다. 1층과 2층은 서로 완벽하게 개방되어 있는데 2층에는 무인 셀프바가 마련돼 있다.

1년 전 문을 연 갤러리 '에파타'도 10여회의 전업작가 전시회

전시장은 규모나 형태 등에서 카페로 지은 '포플러나무아래'와 비길 수 없다. 공간도 널찍하고 2층이라 벽도 성큼 높아서 대작도 얼마든지 걸 수 있는 구조다. 개관 기념전으로 연 이정애 대표 개인전에 100호에서 300호에 이르는 대작 여러 점이 전시됐다는 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지난 1년간 에파타에서 치른 전시회의 리플릿들. 에파타에서 대체로 전업작가들의 전문적인 작업 중심의 전시가 이루어진다. ⓒ 장호철

 

▲ 이정애 화백이 대표작으로 꼽는 유화 작품 '아버지의 아침'. 사회적인 현실을 자연에 반영한 300호 대작이다. ⓒ 이정애

 
며칠 뒤 이정애 대표와 서면으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가 엄격한 작가주의 화가라고 느꼈다. 그가 '포플러나무아래'와 함께 '에파타'를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하면서도 주로 '전업 작가'들의 전시를 이어온 것도 비슷한 이유로 보였다.

개관 이래 '에파타'는 그룹전에서부터 초대전, 개인전 등, 아홉 차례의 회화·공예·판화·조각·설치 작품 등 다양한 장르의 전시를 치러냈다. 전업과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전시 공간을 내주는 언덕 아래 단층의 '포플러나무아래'와 '에파타'는 상호보완적으로 그 구실을 나누고 있는 셈이다.

서양화를 전공한 이 대표는 '삶'을 작품으로 녹여내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갤러리 '에파타'에서 이루어지는 전시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공감하면서 작품활동에 더욱 정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문화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소도시에서 '예술문화보급에 작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무료로 갤러리를 열었다. 더 좋은 작품을 만날 기회를 제공하고자 연 2회 정도는 초대전을 준비하는데, 경비가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고 토로했다.

셀프바 형식으로 제공하는 음료야 이용료로 해결된다고 해도 조명과 냉·난방, 운영 유지비 등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적지 않은 것이다. 시의 지원을 받으면 어떻겠냐고 하자, 공연히 부담만 지게 된다며 머리를 흔든 안 화백과 달리 이 대표는 지원을 받으면 운영이 조금 수월해질 수 있겠다고 했다.

'에파타'의 이 대표는 5월에 계획된 계명대학교 서양화과 박성열 교수의 초대전을 잔뜩 기대하고 있다. 자신의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음이 더없이 행복하고 영광된 일이라면서. 5월이면 상주 시민들도 '에파타'에서 흔치 않은 현역 대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겠다.
 

▲ 연악산 골짜기를 일종의 '아트밸리'로 만들어가고 있는 안인기, 이정애 화백. 이들은 사실상 소도시 상주의 문화 수요를 받아 안고 있는 것이다. ⓒ 장호철, 이정애 제공


남은 전시 33건, 연악산 골짜기는 '아트 밸리'로 바뀌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연악산 골짜기의 두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는 70회에 이르고, 올해 순차적으로 열릴 전시회는 '포플러나무아래'가 23건, '에파타'가 10건이나 된다. 지자체로부터 땡전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 두 사람의 갤러리가 진 짐은 무겁고 중하다.

상주 시내에 전시를 겸하는 카페가 서너 군데가 생겨난 것은 연악산의 갤러리로 오가는 발걸음에 관한 소문이 나면서다. 어쨌든 상주의 명소 갑장사와 용흥사로 오르는 연악산 골짜기가 바야흐로 상주의 '아트 밸리(Art Valley)'로 변한 셈이다. 이제 이들의 이바지에 걸맞은, 시민의 위로와 격려가, 지자체의 화답이 필요한 때다.

'포플러나무아래'의 안 대표는 코로나 상황이 해결되면, 전시에다 소박한 공연 문화를 접목해 볼까 하는 욕심을 드러냈다. 전시장 안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고, 드넓은 마당에선 달밤 음악회가 펼쳐지는 장면은 한갓진 상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와 상주 사람들은 그런 새 길을 스스로 열어가고도 남을 뜻과 용기를 갖추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갤러리 '포플라나무아래'는 일요일, '에파타'는 월요일마다 휴관한다. 휴관일을 달리하는 것도 이 골짜기를 찾는 이들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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