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서울 구획정리사업을 비밀에 부친 이유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시행된 1930년대 경성도시계획
근대화로의 이행은 지역이나 나라마다 각기 특색을 갖는 게 일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통상 정치·경제·사회·문화·가치관 등이 동시다발적 혹은 상호의존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구조적 변화를 추동, 자본주의로 이행해 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서구화·공업화·민주화·합리화·도시화 등 파편적 혹은 다의적 개념으로 축약하여 적용하기도 한다.
▲ 경성시구개수 노선도(1910년대)기존 도심과 용산 중심의, 식민통치공간 조성을 주 목적으로 한 식민도시 경성의 제1기 건설사업이었다. ⓒ 국토지리정보원
도시화 측면에서 19세기 후반 서울은 분명 봉건 도시다. 근대 도시로 나아가려는 그나마의 노력마저 좌절되고, 가장 먼저 철도가 장악당한다. 1905년 전후, 용산 일대가 철도 조차장과 군사기지로 탈바꿈하면서 식민화 무력 기반이 완성된다.
남산이 일제의 정치와 행정, 문화 및 종교 중심지로 변모하고 명동 일대가 일본인을 위한 근대 도시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피식민지 초 기획된 '경성시구개수(1912, 1919)'는 식민도시 건설 착수단계였다.
이로써 도시공간구조가 재편되고 총독부·경성부청사 건립으로 식민통치공간이 창출되었으며, 태평로와 을지로 등 신작로가 개설되는 1920년대 중반에 식민도시 1차 건설이 완료된다. 이때의 도시 개조는 통치기반 구축이 주목적이었다.
일제의 도시계획 인식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고도화로 서구 유럽은 폭발적 도시화에 직면한다. 인구증가로 전염병과 교통난, 슬럼화한 주택지 등 도시문제가 극심해지자 이의 해결 대안으로 도시계획이 유행처럼 번져간다. 1898년 영국에서 탄생한 '전원도시론'이 전 세계를 풍미한다. 일본도 도시계획법(1919)을 제정하나, 실효는 없었다.
일본인 건설 및 부동산업자와 관료, 친일파들이 이익단체 격의 경성도시계획연구회(1921)를 결성한다. 이들이 도시발달 견인 명분으로 도시조사를 시행하는 등 '법' 제정을 청원하지만, 실체는 땅 투기 다름 아니다. 이 시기 일제는 도시계획을 '국익에 반하는 수단'으로 여겼고 자연스레 총독부도 이런 기조였다.
1929년 세계 대공황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제는 돌파구를 만주사변(1931)이란 식민지 개척에서 찾는다. 만주국이 세워지고 군국주의로 전환한 일제는 중국 침략을 준비한다. 이에 만-선 공업화 필요성이 대두하고 '일-선-만 공업화 블록'이 실행에 옮겨진다.
하지만 만-선 공업화는 섬나라 그것에 철저히 보완·종속적 기능이어야 했다. 또한 일본 전범 기업의 진출 방편으로 기존 도시의 확장 필요성도 같이 제기된다. 이 계획을 완성하려는 수단으로 '북선(北鮮) 루트' 개발이 이뤄져, 함경도의 한적하던 어항 나진이 공업 및 군사도시로 순식간에 변모(1932)하는 천지개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도시를 넘어 지역계획이자 나아가 전쟁을 위한 국토계획 시작이었다.
일제는 국가가 통제하는 도시개발로 토지자원 수탈과 침략거점 확보 수단으로써 도시계획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마침내 인식하게 된다. 일본 도시계획법을 개정(1931, 1933)하여 국가주의 틀을 완성해 나간다. 이는 도시확장과 확장된 공간에 국가통제라는 개념이 교묘히 결합한 형태로 구현된다. 나라 전체를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여 군국주의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구현의 첨병으로 도시계획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조선시가지계획령
일제는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조선인을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야만인으로 보았다. 이런 인식과 배경에서 '조선시가지계획령(1934.06)'이 제정된다. 도시계획도 아닌 법도 아닌 모호한 명칭이 우선 눈에 보인다. 내용은 국가가 주도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다름 아니다.
이는 사업에서 지주 조합을 배제하고 총독부가 주도함으로써, 가장 효율적인 토지 수탈 제도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시가지계획령은 일본 도시계획법보다 더 과감했다. 기존 주거지의 슬럼화와 교통 등 기성 도심의 문제 해결보다는, 구획정리사업을 통한 신시가지 확장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이는 일본 도시계획법이 내재한 허점을, 식민지 조선에서 실험적으로 적용해 봄으로써 그 개선방안을 찾아내겠다는 계산이었다.
일본 도시계획법에 설치된 각종 심의기구 또한 없었다. 조선 총독 혼자 결정하면 그게 바로 계획이요 정책이었다. 주거, 상업, 공업지역으로 나뉜 용도지역제에서 미지정지역을 별도 분리하여, 일본 독점기업의 공장부지 확보가 수월하도록 고려한 점도 눈에 띈다.
▲ 시계(市界)확장(1936)기존 도심과 용산 면적의 3.5배에 해당하는 지역을 경성부로 편입시킴. 고양군(연희, 은평, 용강, 숭인, 둑도, 한지)과 시흥군(영등포, 북면) 지역이 편입 대상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가지계획령 제정 이전(1933.07) '도시계획조사위원회'가 꾸려져 경성시가지계획구역 범위를 조사·결정한다. 이때 고양군 연희·은평·숭인·용강·한지·둑도면과 시흥군 북면, 영등포읍이 경성부에 편입(1936.04)된다. 확장 면적은 기존 경성부의 3.5배다. 위원회는 곧장 '경성시가지계획'을 수립한다. 원칙은 기성 도심부는 현상 유지, 신규 편입지역 위주로 신시가지 개발이 주 내용이다.
▲ 경성시가지계획평면도노란색이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이고 붉은 색과 녹색이 신설계획 가로망을 표현한 것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본계획(Master Plan)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기존 도심과 용산을 제외하고, 토지이용은 철도와 전차선 축을 고려해 권역별로 용도지역을 배분했다.
연희(신촌)와 용강(마포)은 주거와 공업 혼용, 은평(홍제)은 주거와 풍치지구, 숭인(청량리)과 한지(왕십리)는 주거 위주에 소규모 공업, 한지(한남동)는 고급주거지, 영등포는 공업, 북면(노량진)은 주거로 개발한다는 기본구상이다.
▲ 가로망계획도(1936)폭에 따라 도로의 위계와 기능을 정해, 격자형을 기본으로 계획된 경성의 가로망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1936년 고시된 가로망 계획은 경성을 7개 지구로 구분하고, 경성부청을 중심으로 삼아 지구별 부도심을 연결하는 직선 가로망을 기본으로 하였다. 도로 위계는 폭을 기준으로 광로, 대로, 중로로 나누고, 기능은 주간선 및 보조간선, 지선도로로 구분하였다.
구획정리사업, 수탈의 이데올로기
가로망 계획에 이어 구획정리사업이 입안된다. 총독부는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개발 수요와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공개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투기 예방과 지가상승을 고려했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수월한 토지 수탈을 위한 임시방편 성격이었다.
▲ 공원계획도(1936)공원을 자연공원과 근린공원, 대공원과 운동장으로 구분하여 지형과 지세에 따라 계획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
총독부는 1937년부터 신규 편입된 지역에 강력한 토지거래 및 건축규제를 실시한다. 구획정리계획이 1938년에 공개되고, 용도지역제가 1939년 9월에서야 발표한다.
▲ 상수도계통도(1936)물 흐름에 따라 상수도 공급망을 4구역으로 계획하고, 노량진과 뚝섬 등에 취수장을 계획하여 가정으로 상수도를 공급하려는 상수관망 계획도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1기 신규도로 30개 노선이 발표(1936.08)된다. 대부분 도심과 부도심을 연결하는 주간선과 보조간선도로다. 그러나 계획일 뿐 중일전쟁(1937) 영향으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따라서 도로 개설이 수월한 구획정리사업에 눈을 돌려 주택 및 공업단지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토지소유권을 변경시키지 않고 투입된 공사비와 도로 등 공공시설 설치비를 체비지(替費地, 사업 결과 사업시행자(국가 등)에게 환수되는 잉여 토지)를 통해 수월하게 징발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체비지라는 도깨비방망이가 춤춘다. 실상은 국가가 체비지 확보를 통해 토지를 수탈하고 막대한 이익을 편취(騙取)하는 방식임에도, 개발로 인해 상승한 땅값이 공공용지로 잘려 나가 줄어든 면적을 보전해 줌으로써 토지소유주와 시행자 모두 만족하는 방식이라 여긴다.
하지만 일제는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족으로 공사비를 토지소유주에게 직접 징발하는 '공사비 현금주의'를 채택한다. 총독부가 확보한 체비지가 매각되기도 전에 공사비를 직접 징발해 감으로써 부족 재원을 보충한다는 구상이다. 따라서 토지소유주는 앉아서 코 베이는 형국에 직면하곤 했다.
▲ 대현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계획도(1940)지금의 아현동과 이대입구, 신촌로터리 등이 생겨난 일제강점기 '대현지구' 구획정리사업 계획도이다. 주간선과 보조간선도로 등의 구분이 확연하다. ⓒ 서울역사박물관
영등포와 돈암, 대현지구가 결정 고시(1937.02)되고 3월 영등포, 돈암지구에 사업 시행 명령이 내려지나 뒤늦게 착공(1938)하여 완공(1941.11)한다. 대현지구도 착공(1939.09)과 완공(1942)이 늦어진다.
이 밖에도 1936년 수립된 10개 지구의 계획이 1939년부터 우후죽순 시작되나 공사비 및 물자, 기술인력 한계 등으로 지연에 지연을 거듭한다. 이런 현상은 일제 패망 직전까지 유사하게 벌어진 공통적 현상이었다.
이때 일제가 의도한 경성도시계획은 군사형·수탈형 도시화였다. 전쟁 수행에 활용도가 높은 기능과 토지이용을 각 지역에 분산 재배치하고, 이들 기능을 군사용 교통시설로 연결했다는 측면에서 군국주의형 도시화로 규정할 수 있다.
▲ 1943년 경성구획정리사업이 완료되었거나 진행 중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도로와 검은선의 철도가 확인되고, 도로 한가운데 붉은 선이 전차선이다. 남산 조선신궁이 유난히 강조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또한 도시빈민과 슬럼가의 존치, 민족 차별과 계급 위화감 증대, 토지 수탈 및 전쟁 준비 등 수많은 문제점을 양산하거나 도외시 했다는 농후한 한계를 날 것으로 드러낸 도시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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