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이혼도 불사하는 남자
임레 케르테스 지음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아우슈비츠는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에 의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은 죽음의 수용소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가혹한 노동과 폭력, 굶주림으로 쓰러졌고 영문도 모른 채 독가스실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아우슈비츠라 불리는 곳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지옥과도 같았던 그곳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집으로 돌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그들은 이제 집에서 남은 생을 고통 없이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인간 말살의 장면들이 그들의 뇌 속에 그대로 각인되어 시시때때로 그들을 두려움과 공포, 알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이게 했기 때문이다. 아물지 않은 기억의 상처는 몸의 곳곳에서 곪아 터져 피를 흘렸다. 단지 '살아남았다'라는 사실이 그들의 남은 생을 보장해주지 못했기에 그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임레 케르테스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이렇게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하여 귀환한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비극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케르테스는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 아픔을 견뎌내고 세상과 맞서 살아가는지를 차분하게 따라간다.
소설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라는 주인공 '나'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작가이자 번역가로 일하는 '나'는 아이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끝내 이혼까지 하게 된다. 이혼을 감수하면서까지 '나'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 세계가 비참하기 때문이다.
태어날 아이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나'가 판단하기에 이 세계는 아우슈비츠라는 만행을 용인한 세계이며, 그러고 난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가망이 없는' 세계인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나'를 괴롭히는 기억 중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구덩이 파기에 대한 기억이다. 땅파기 노동에 동원된 유대인들은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열심히 흙을 파낸다.
작업이 끝나면 유대인들은 그 구덩이에서 독일군이 쏜 총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시체를 한꺼번에 처리할 여력이 부족했던 독일군이 저지른 참극이었다. 이런 끔찍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대책 없는 슬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독일인들이 언제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불안이었다. '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인에게 또다시 끌려가는 악몽에 시달린다. 이러한 상상은 실현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를 더욱 큰 두려움에 시달리게 했다.
이렇듯 이 세계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조마조마한 마음 상태인 채로 산다는 것을 말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런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절망감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렇게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면서, 나아가 '지금의 세상이 그 전보다 나아졌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아우슈비츠의 아픔을 가진 사람의 두려움과 불안이 계속된다면, 그들이 그 참혹한 상처로 인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는 곳이 이 세상이라면, 그에 대한 잘못은 우리에게도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 케르테스는 이 소설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녀야 할 윤리'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한다. 케르테스는 그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주인공 '나'를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약탈적인 세계의 질서를 다른 것으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반성한다.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 세상을 두고 좋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먼저 가져야 할 윤리는 '부끄러움'이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지 않은 데에 대한 부끄러움이면서,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서 개인이 느껴야만 할 부끄러움이며, 이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즉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케르테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렇게 "지난 아픈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 우리로 인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부끄러워하도록."
이 세상은 우리의 부끄러움 없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바로 이것이 케르테스가 우리에게 보내는 일침이다.
소설을 쓴 케르테스 역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일여년 만에 돌아온 경험이 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야만적인 역사적 장면들을 복원하여 이를 섬세한 필치로 옮기는 일에 그는 평생을 바쳤다. 케르테스가 말년에 이르러서 쓴 이 소설은 그가 평생을 걸쳐 일궈온 유대인 수용소 문학에 관한 성찰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지옥과도 같았던 그곳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집으로 돌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그들은 이제 집에서 남은 생을 고통 없이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임레 케르테스(지은이) ⓒ 민음사
임레 케르테스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이렇게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하여 귀환한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비극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케르테스는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 아픔을 견뎌내고 세상과 맞서 살아가는지를 차분하게 따라간다.
소설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라는 주인공 '나'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작가이자 번역가로 일하는 '나'는 아이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끝내 이혼까지 하게 된다. 이혼을 감수하면서까지 '나'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 세계가 비참하기 때문이다.
태어날 아이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나'가 판단하기에 이 세계는 아우슈비츠라는 만행을 용인한 세계이며, 그러고 난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 '가망이 없는' 세계인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나'를 괴롭히는 기억 중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구덩이 파기에 대한 기억이다. 땅파기 노동에 동원된 유대인들은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열심히 흙을 파낸다.
작업이 끝나면 유대인들은 그 구덩이에서 독일군이 쏜 총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시체를 한꺼번에 처리할 여력이 부족했던 독일군이 저지른 참극이었다. 이런 끔찍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대책 없는 슬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독일인들이 언제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불안이었다. '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인에게 또다시 끌려가는 악몽에 시달린다. 이러한 상상은 실현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를 더욱 큰 두려움에 시달리게 했다.
이렇듯 이 세계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 순간 조마조마한 마음 상태인 채로 산다는 것을 말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그런 고통과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절망감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렇게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사람들의 아픈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면서, 나아가 '지금의 세상이 그 전보다 나아졌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아우슈비츠의 아픔을 가진 사람의 두려움과 불안이 계속된다면, 그들이 그 참혹한 상처로 인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는 곳이 이 세상이라면, 그에 대한 잘못은 우리에게도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 케르테스는 이 소설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녀야 할 윤리'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한다. 케르테스는 그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주인공 '나'를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약탈적인 세계의 질서를 다른 것으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반성한다.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 세상을 두고 좋은 세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먼저 가져야 할 윤리는 '부끄러움'이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지 않은 데에 대한 부끄러움이면서,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서 개인이 느껴야만 할 부끄러움이며, 이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즉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케르테스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렇게 "지난 아픈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 우리로 인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부끄러워하도록."
이 세상은 우리의 부끄러움 없이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바로 이것이 케르테스가 우리에게 보내는 일침이다.
소설을 쓴 케르테스 역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일여년 만에 돌아온 경험이 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야만적인 역사적 장면들을 복원하여 이를 섬세한 필치로 옮기는 일에 그는 평생을 바쳤다. 케르테스가 말년에 이르러서 쓴 이 소설은 그가 평생을 걸쳐 일궈온 유대인 수용소 문학에 관한 성찰의 총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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