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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통 오지 않는 아들, 답을 찾았습니다

잔소리 대신, 밥 한 그릇 잘 먹였습니다

등록|2022.04.11 17:16 수정|2022.04.11 17:16
어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잔소리 대신 밥을 먹인 일이다.

부쩍 예민해진 아들을 오랜만에 불러놓고 훈계라는 이름으로 부모 노릇을 하려던 계획을 접었다. 몰라서 안 하든 마음이 없어서든 따져 물으면 뭐하겠나 싶어서였다.

집에서 10분 거리 원룸으로 독립한 지 2년째. 내가 붙여준 아들의 닉네임은 '해외동포'다. 전화든 방문이든 그 텀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요즘엔 가족들이 모이는 대소사 때나 겨우 짬을 내어 다녀가곤 한다. 또 다른 일정이 잡혀있다며 서성거리다 나갈 땐 씁쓸하다. '잘 살고 있는 걸까.'

오늘은 꼭 전해줄 게 있다고 아들을 잡아당겼다. 바쁜 일정을 내세웠지만 30분도 안 되겠냐고 더 힘을 주었다. 엄마의 확고한 의지를 느꼈는지 더 이상 버티지 않았다. 마지못해 잠깐 들르겠다는데 언제 올지는 막연했다.

갈수록 바쁘다는 말을 더 자주 하는 아들이 안쓰럽기도 하면서 못마땅했다. 부모의 안부도 몰라라 하는 것 같아 괘씸한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얼굴 좀 보자는 말에도 발끈하며 바쁘다고 일관했다. 우리 부부의 오미크론 격리기간이 끝나고 몇 주가 흘렀다.

'그렇게 바빠?' 이제는 콧방귀가 나왔다. 안부를 챙기는 건 관심의 문제지. 일이 없어도 만나는 게 가족이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여 이 놈아. 생각이 꼬리를 물더니 어느새 나는 '꼰대'로 돌아와 있었다.

감정이 여기까지면 대화가 될 리 없다. 기껏 오라고해서 서로 맘만 상하면 손해 보는 장사다. 엄마의 권위로 아들에게 죄책감만 얹혀줄 게 뻔했다. 예상되는 결과가 그려지는데 답습할 필요가 있을까. 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자문자답했다.

서른 살을 앞둔 아들에게 엄마도 성장해야 한다는 각오로 몇 가지 대안을 떠올렸다. 브런치 카페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해볼까. 시간이 없다고 하면 차 한 잔으로 좁혀봐야지. 부드러운 말로 시작하면 술술 풀리려나? 아니야. 틀림없이 내 속을 훤히 보고 되받아칠 게 분명해.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아들이 대놓고 나를 흉보는 게 있다. 어릴 적,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의 잔소리가 너무 길었다는 거였다. 몇 시간이 흐르는 경우도 많아서 나중엔 화가 났다던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랬다. 다짐을 받고 다시는 번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제대로 뉘우치는 걸 봐야 했다. '잘못했다'는 한마디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들은 엄마가 잠깐 보자거나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뒤로 물러섰다.

훈계니 조언이니 하는 포장은 결국 내 욕심을 채우려는 다른 모습일 뿐이었다.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세상 안에서 잘 배워 나가겠지. 대안은 무슨. 대안을 버리는 게 대안일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밥을 하고 반찬을 준비했다. 밥을 먹는다고는 안 했지만 혹시라도 배고픈 채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실 말씀이 뭐예요?"

식탁에 앉으며 나오는 첫마디. 어렵사리 왔다는 말과 잔소리를 예상하고 왔다는 뜻이 숨어있었다. 기대했던 문안인사는 아니었지만 나는 엄마가 아닌가.

"밥 먹으라고."

사심 없는 말이라는 걸 확인한 아들은 벙긋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밥을 안 먹고 와서 반갑다. 좋아하는 콩나물무침과 불고기, 올봄에 처음 올라온 머위잎으로 맛있게 먹는 모습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 놈의 모성애는 속도 없다.

섭섭함도 괘씸함도 눈 녹듯 사라지고 도란도란 웃음을 나누고 나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밥이 답이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 및 브런치 게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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