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살리고 희망 살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인터뷰] 작가로 왕성한 활동하는 김풍배 목사의 '문학이야기'
▲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김풍배 목사. ⓒ 최미향
여행을 하다 피곤해지면 벤치에 앉아 배낭에 넣어둔 책을 꺼내 읽었다. 여행지에서 읽는 한 권의 책은 피로감을 씻어주는 동시에 청량제 역할을 해 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가만히 책을 덮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작가와의 거리가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책 속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낸 작가의 고된 시간들, 동시에 그 속에서 상처를 치유했으리라 생각하니 다행스럽다.
지난 15일 서산 비전교회 김풍배 목사를 만났다. 그는 시, 시조, 소설, 수필로 늦깎이 등단을 한 작가로 지역에서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목사님으로 불러주는 게 더 좋다(웃음). 나에게 문학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학창 시절 잠시 꾸었던 문학이란 꿈은 삶이란 현실 앞에 한낱 사치로 여겨졌다. 그러는 사이 문학은 나에게서 멀어져갔고 아름다운 감성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관념 앞에 무너져버렸다. 그러다 정년퇴직을 했고 허한 마음에 글을 썼다. 그것이 문학인 줄 몰랐다. 숫자는 나에게 밥을 먹여 주었고, 집을 장만하게 해 주었으며 아이들을 가르쳐 주었다.
돈과 조그만 명예(?)를 준 직장도 때가 되자 나를 놓아버렸다. 정년은 나에게 낭떠러지 같은 절망을 몰고 왔다. 의지할 곳도 찾아갈 곳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알면서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기분을 무엇에 비유할까? 마치 마라톤 선수가 사력을 다해 42.195Km를 달리고 골인 지점을 통과한 후 바닥에 쓰러진 그 기분? 그때 어째서 정년 퇴임한 사람들의 25%가 죽거나 병에 걸리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면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있지?'에 놀라고, 아침 먹은 후 어디론가 가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조바심에 놀랐다. 집을 나섰다.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갈 곳이 없음을 알고 난 후의 허망함과 낭패감. 아이들도 이미 가정을 이뤄 잘 살고, 걱정 없는 삶이 일편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할 텐데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 끝난 것 같은, 외톨이가 된 것 같은, 망망한 바다에 홀로 남겨진 섬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때 문득 책상에 앉아 마음에 차오르는 생각의 응어리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썼다가 찢기도 하고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가 버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썼던 글. 가슴 속에서 용트림하다 툭 튀어나왔던 글, 그것이 문학인 줄 몰랐다. 그것이 시가 될 줄 몰랐다.
시는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문학이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다. 나는 생각날 때마다 썼다. 때로는 모아두기도 했다. 외로울 때마다. 심란할 때마다, 삶에 대한 회의가 찾아올 때마다 썼다. 그렇게 쓴 글들이 책상 한 모퉁이에 두툼하게 쌓여 갔다. 그 때쯤 친구 박영춘 시인을 만났다."
▲ 서산문화원에서 열린 시화전. ⓒ 최미향
- 문학 공간에서 시 부문으로 등단의 영광을 안았다. 박영춘 시인과의 관계를 말해달라.
"박영춘 시인은 나와 고교 동창생이다. 그는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 병을 얻어 퇴임하고 시인이 됐다. 우리는 자주 그의 집 바로 아래 슈퍼에서 막걸리 한 병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 호주머니에서 '어머니의 바다'란 시 한 편이 손에 잡혔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사이 '괜한 짓을 했구나'란 후회가 들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 나부랭이를 붙들어 적은 것뿐인데….'라는 생각이 들자 다시 돌려받고 있은 심정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던 그가 "당장 등단하세"라고 했다. 나는 운 좋게도 친구 덕분에 '문학 공간'에서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다 시인이 된 케이스가 아니고 뭐겠는가. 후에 서산 문화 대상을 수상하는 데 일조하여 친구에게 다소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 충남문학제 회원들과 함께, ⓒ 최미향
- '창조문학'에서 시조 신인 문학상을 받았다. 시를 쓰시다가 다시 시조로 등단하셨는데.
"시의 흐름이 바뀌면서 따라가기 힘들던 차 시조를 접하게 됐다. 아시다시피 느닷없는 '시' 등단과 함께 그때부터 본격적인 '시' 공부를 시작했지 않았나. 물론 독학이었다. 시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사서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해서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을 구해 읽었다. 많이 써야 한다고 해서 하루에도 여러 편씩 시를 썼다. 거의 한동안 시에 미치다시피 묻혀 지냈다.
인터넷에 시 관련 카페에 가입하여 글을 쓰는 대로 올렸다. 그때 올렸던 시들이 나는 까맣게 잊었는데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다. 문학회도 여러 곳 가입하여 활동했다. 원고 청탁이 있건 없건 여기저기 문학지에도 작품을 발표했다. 그간 3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등단한 후 10여 년이 지났다. 그렇게 지나는 동안 시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정적 표현이 주를 이루었다면, 자기 내면적 표현을 그려내기 시작하면서 차츰 난해한 시를 쓰는 것이 트렌드가 됐다. 나이 많은 사람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책꽂이 한 켠에 꽂힌 빛바랜 책이 눈에 들어왔다. 1950년도에 김종식 선생이 지은 시조 개론과 작시법이었다. 많은 고시조를 소개하고 거기에 따른 해설과 시조의 역사적 고찰, 시조 시작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시조에 대한 흥미와 새로운 의욕이 솟구쳤다. 나는 문학을 정통으로 배운 김가연 시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시조 시학이란 잡지를 몇 권 얻어 왔다. 바로 편집주간인 경기대 이지엽 교수와 통화를 하게 되고 여러 가지 조언을 들으며 '시조 시학'을 정기 구독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편집인 윤금초 교수님과도 연결되어 꽤 오랫동안 '정형 시학'도 구독하게 되었다. 두 잡지를 통해 시조에 대한 이해와 현대 시조의 흐름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자유시가 가지고 있지 못하는 정형시의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시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초 나를 외면했던 '창조문학'에 시조 신인 문학상에 응모했고 신인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로부터 '내용이 참신하고 낭만적인 서정 시조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다.
연작시조집 '노을에 기대어 서서'를 발표하고 두 번째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창조문학 대상을 받았다. 참 의미 있는 글이다. 마침 요양원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느낀 것들을 '연작 시조로 쓰기 시작했다. 4년여 동안 요양원에서 맞닥뜨리는 노년의 삶과 애환을 '노을에 기대어 서서'란 연작시조집으로 500여 권 발행했다.
당시 '창조문학' 대표이신 홍문표 전 오산대 총장은 해설에서 '우리 시사에서 처음 보는 노인 문학일 뿐만 아니라 정말 시로 쓴 감동적인 노인학의 역작이 아닐 수 없다'라는 극찬을 해 주셨다. 발간하여 배포하자 의외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2주 만에 동이 났다. 다음 해 '노을에 기대어 서서'로 창조문학 대상을 받게 됐다. 부상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었다. 두 번째 받는 문학상이었다."
▲ 소설 ’눈물먹고 핀꽃’ 북 콘서트 장면. ⓒ 최미향
- '시'에서 '시조'로도 모자라 '소설'까지 출간했다. 소설은 언제부터 썼는지 궁금하다.
"어릴 적 꿈이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군에 복무할 당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단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어느날 문득 '더 미루다가는 영영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미친 듯이 여러 편을 썼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3년여를 도전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다만, 불교 신문에서 작품에 대한 좋은 평가와 함께 '신춘문예는 역량 있는 신인 젊은 작가를 발굴하여 육성하는 뜻이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 후로 신춘문예 등단을 포기했다. 2015년이 저물어 가던 그해 끝자락, 우연히 한국 인장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문득 인장에 얽힌 소설을 써 놨던 생각이 나서 관장 이재인 교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한번 보자고 했다.
그는 경기대 문창과 교수로 소설 '악어새' 인기도서 작가기도 하다. 이런 사람에게 내 작품의 수준을 알아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 같아 메일로 '도장'이란 제목의 단편 소설을 보냈다.
12월 27일 밤 10시 가까운 시간에 전화가 왔다. 이재인 교수의 들뜬 음성이었다. 과찬의 칭찬과 더불어 마침 그가 발행하고 있는 '문학 앤 문화'에서 신인상 공모를 계획하고 있는데 꼭 이 작품을 응모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뜻밖의 칭찬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다음 해 3월 소설부문 신인상에 당선됐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 공무원 문학회 김완용 회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2016년, 한국 공무원 문학에도 신인상을 받았다."
▲ 충주호반에 세워진 김풍배 작가의 시비. ⓒ 최미향
- 소설 '눈물먹고 핀 꽃'과 '원산도'가 출간됐다. 또 충남문인협회 특집호에 소설 '엄마의 일기'가 수록됐고, 신앙시집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동안 써 놨던 단편집을 모아 충남문화재단의 사업비 일부를 지원받아 '눈물 먹고 핀 꽃' 소설집이 출간됐다. 조규선 전 서산시장님의 도움으로 '눈물 먹고 핀 꽃'이 지방지 11개에 소개됐다.
홍주 천년문학관에서 개관 기념으로 '눈물 먹고 핀 꽃' 북콘서트를 가졌다. 이때 내포 지역의 많은 문학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상범 월남 참전자회 서산시지회 회장이 뜻밖에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어 마음의 짐을 얻었다. 한 세상 살면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분들이다.
다음 해에 연이어 두 번째 소설집 '원산도'를 내놨다. 소설집 '눈물 먹고 핀 꽃'으로 제3회 서울 중앙뉴스가 주는 문학 부문 문화예술상을 받았고, '원산도' 소설집으로 2021년 충남 문학상 작품상을 받았다. 특집으로 나의 소설 '엄마의 일기'가 실렸다.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큰상이었다. 수상 소감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충남 문학의 자랑, 충남 문인협회의 역사에 조그만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다고 생각하니 어찌 가슴이 뛰지 않겠는가? 스러지는 그 날까지 황혼의 불꽃 태우리라. 밤하늘의 별 같은 선배님들의 영예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리라'
팔을 쓸 수 있고 정신이 있는 한 글을 쓰리라 다짐했다. 그간 계속되는 독자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요양원을 주제로 한 시조에 당시 느꼈던 소회를 보태어 시조집 '나무'를 발간했다. 신앙인으로 한 편의 신앙시집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십자가를 그려 보셔요'란 제목의 신앙시집도 냈다."
▲ 서산문인협회지부장 이·취임식. ⓒ 최미향
- 장편소설에 이어 수필로도 등단의 영광을 안았다. 수필은 어떤 계기로 쓰게 됐고, 또 다른 도전은 계속될 것인지?
"소설집 '원산도'를 배포하고 난 얼마 후 지역 신문사 오피니언에 '김풍배 칼럼'이란 고정란이 생겼다. 욕심이 생겼다. 칼럼을 쓰기 시작했으니 칼럼집을 내고 싶었다. 기왕 쓸 바에야 수필 부문에 등단이란 절차를 거치고 싶었다. 등단이란 '호적처럼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당선이 됐고, 2022년 2월호에 내 작품 '추억의 먹거리'와 함께 심사평에 이어 당선 소감이 실렸다. 이로써 '시, 시조, 소설, 수필' 네 부문 모두 등단의 영광을 안았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인즉슨, 하던 일을 자주 바꾸면 아무 성과가 없으니 오직 한 가지만 꾸준히 하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꼭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유한하다. 남은 생의 길이를 생각해보았다. 뒤늦게 문학에 입문했으니 목마름이 많았다. 한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호기심은 자꾸 다른 장르에 눈을 돌리게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전하다 보니 시, 시조, 소설, 수필을 쓰게 됐다. 대전 창의 문학관 주최 '3‧1절 100주년 전국 시 낭송 대회'에 나가 동상을 획득하기도 했다.
나는 악기도 좋아한다. 대부분 혼자 연주할 수 있는 걸 택하여 즐긴다. 하모니카, 아코디언, 피리, 멜로디언을 연주한다. 물론 정식으로 배운 건 하나도 없다. 취미로 연주한다. 하모니카를 불다가 싫증 나면 아코디언을 멘다. 때로는 멜로디언과 피리를 분다. 그때그때 내가 좋아하는 대로 연주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설프다. 자신 있게 자랑할 만한 작품도 없다. 한 분야에 몰두했더라면 하는 가정도 해보지만, 결과는 같았으리라.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셈하여 마음 곁에 놓는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내게 문학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스스로 위로하고 기쁨을 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렇다면 이미 난 목적을 달성했다."
▲ 추수감사절예배 특별연주. ⓒ 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인생의 황혼기에 목회자가 되었다. 문학도 살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영혼을 살리고 희망을 살리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랑과 용서와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점점 저물어 가는 육신을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다만, '한 편이라도….' 라는 욕심을 내 본다. 멋진 황혼으로 물들이고 싶다. 임종의 시간,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학을 사랑한다. 그래서 모두 갖기를 원했고, 그리고 다 가졌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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