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싸움' 계속하셨던 산민 한승헌 선생을 기리며
[추모글] 시대적 소용돌이 속에서 불의한 무리와 맞섰다
▲ 군사정권 시절 수많은 양심수와 시국 사범을 변호하며 '1세대 인권변호사'로 불렸던 한승헌 변호사가 20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 연합뉴스
대한민국 70년 사법사에서 판사·검사·변호사·피의자·증인·방청인을 모두 거친 이는 딱 한 사람뿐이었다. 4월 20일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신 산민(山民) 한승헌 선생이다.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그동안 나는 심판관석(군 법무관 때), 검찰관석을 거쳐 변호인석으로 옮겨 앉다가 마침내는 피고인석과 방청인석까지 두루 거친 다음 1983년 복권되어 다시 변호사의 자리로 돌아왔다. 한 번 되기도 어려운 변호사를 두 번이나 되는 행운(?)을 누렸는가 하면, 감옥만 해도 서울구치소를 '재수'까지 마치고 육군교도소를 거쳐 50대 나이에 소년교도소까지 두루 거쳤다. 여자교도소만 못 가봤다. 기록이라면 기록일 수도 있는 이 모든 곡절을 팔자 탓이라고 돌릴 수도 있겠으나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불행한 조국의 임상노트 : 정치 재판의 현장〉
산민은 법조 전역을 거쳤지만 어디까지나 본령은 변호사였다. 군사독재가 사법부를 통치의 하수기관으로 만들어 인권을 유린할 때 그는 빼어난 인권변호사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한때 감사원장을 지냈으나 곧 재야로 복귀하여 국민의 인권보호에 앞장섰다.
학생·민주인사들에 대한 검찰의 구형과 판사의 선고가 똑같아서 '자판기 판결', '정찰제 판결'이란 명언을 남겼다. 사법부(검찰 포함)의 타락·탈선에 대한 100마디의 설명보다 효과적인 '판결'문이었다. 그가 사법부의 비민주성을 질타하는 불화살을 날린 것이다. 군법회의 법정이 구형량에서 한 푼도 깎아주지 않던 유신·5공시대의 판결을 산민은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 아닌 군법회의에서 최초로 확립되었다"고 판시했다.
선생의 넉넉한 유머와 마음씨
비화가 있다.
산민이 변호를 맡았던 모 정치인이 어느 날 밥집에서 "한 변호사가 변호한 사람 치고 징역 안 간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라고 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한 변호사 왈 "징역 가면서도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 안 한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시라"고 응대하여 다시 한번 밥집을 진동시켰다.
작년 이맘때였던가. 청암 송건호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회가 끝나고 근처 찻집에서였다. 몇 달 전에 뵜을 때의 감기가 그대로인지 몸이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변호사님 아직도 감기가 안 떨어졌나 봐요?"
"내 감기는 주한미군입니다."
얼른 감이 잡히지 않아 얼떨떨해 있는데,
"한 번 들어오면 나갈 줄 몰라요."
예의 위트가 발동한 것이다.
"그런데 저는 반미주의자가 아닙니다."
웬 느닷없이 '반미론'인가, 다시 얼떨떨해 있는데,
"저는 커피는 아메리카노만 마십니다."
필자가 불현듯 "아메리카 노(NO)이네요."
한바탕 웃고 '저작권'을 얻어서 가끔 써먹는데, 분위기는 썰렁하다.
여러 해 전이다. 전화가 왔다. 부탁이 있다는 거였다. 내용인즉슨 필자가 쓴 〈한국필화사〉에 실린 한 편을 당신의 책에 싣고 싶다는 것, 글은 〈어떤 조사(弔辭)〉였다. 이 글은 선생이 1972년 9월 여성잡지에 썼던 것을 1974년 간행된 〈위장시대의 증언〉에 실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결국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했던 당신의 글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책은 물론 관련 자료를 모두 '싹쓸이' 해 가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자신의 글을 자신의 책에 싣겠다고 타인에게 양해를 구하는 마음씨, 뒷날 그 까닭을 물었더니 저작권법을 연구하다가 내린 결론이라는 것, 선생은 저작권 연구의 대가이기도 하다.
1989년 6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제'에 한국외국어대생 임수경씨를 참석시켜 북녘 동포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귀환하여 구속되었다.
'통일의 꽃'이 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되고 산민은 변호인으로 자원했다. 옥고를 치른 뒤 임수경씨가 결혼을 할 때 이런 인연으로 주례를 맡았다. 주례사 왈 "이 혼인이 결코 어느 한쪽에 의한 흡수통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 찬양·고무·동조하면서 잘 살아가기 바란다."
검찰공화국 우려되는 시기 선생의 부재
▲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 연합뉴스
선생은 세상에는 덜 알려졌으나 시인이기도 하다. 시집 〈하얀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여기 실린 '백서'의 한 대목.
거센 비바람이야 어제 오늘인가
아직은 목마름이 있고
아직은 몸부림이 있어
시달려도 시달려도 찢기지 않는
꽃잎 꽃잎
꽃잎은 져도 줄기는 남아
줄기 꺾이어도 뿌리는 살아서
상처난 가슴으로 뻗어 내려서
잊었던 정답이 된다.
선생은 암흑의 시대 정의로운 사람들과 힘없는 민초들을 변호하며 넉넉한 유머·기지·해학으로 세상을 밝혀주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바이런이 "사람은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고 했듯이 산민 선생은 불의한 시대에 굽히지 않고 '지는 싸움'을 계속하셨다. 시대적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법조인과 언론·지식인들이 재물과 허영은 좇으며 시류에 영합할 때 선생은 타고난 반골정신과 탐구심으로 법전은 물론 문·사·철·시·서를 넘나드는 필봉으로, 행동으로, 불의한 무리와 맞섰다.
시대가 다시 법조인들이 '궐기'하고 검찰공화국이 우려되는 시기에 선생의 부재는 큰 손실이지만, 1991년에 쓴 〈시대의 격랑 속에서〉의 한 대목을 새긴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랑스럽게는 못 살망정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는 것, 지식인의 도리는 다 하지 못 할지라도 학기(學妓)는 되지 말자는 것 - 이런 자계(自戒)는 여전히 유효하다."
산민 한승헌 선생님, 영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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