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가 천만장자의 별장에서 사망한 사연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창학
친일파 최창학은 손꼽히는 일제강점기 재벌이었다. 그는 금광왕으로 불렸다. 1934년 1월 13일 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 등에서도 "금광왕 최창학 씨"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로도 조선 왕실은 그대로 유지됐고 조선 군주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왕이란 표현이 여전히 사용됐기 때문에, 민간인이 왕으로 불리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용인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재력이 막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그가 해방 뒤 얼마 뒤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해방 10년 뒤에 발행된 1955년 11월 20일 자 <경향신문> 3면 하단 기사는 "왕년의 광산왕 최창학 씨"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게 불린 것은 그 이전부터 그의 쇠락이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위 기사가 나오기 6년 전에 발행된 1949년 8월 10일 자 <조선일보> 2면 하단 기사는 최창학을 "과거 조선 광산왕"으로 소개했다. 같은 달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 기사는 광업계의 원로급 지도자 다섯이 그달 1일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금광 개발을 건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30일 자 기사는 최창학을 그 다섯 중에서 첫 번째로 거론했다.
이는 1949년 당시의 최창학이 예전 같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재계 원로로 활동할 만큼의 재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반에는 훨씬 더 쇠락해졌던 것이다.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그의 사업장 중 하나가 매각된 사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1938년에는 자신 소유의 광산을 니혼광업주식회사에 650만원에 팔아 일명 천만장자로 성장했다"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1938년 무렵의 그는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로 불렸다.
그만한 재산이 있었기에 일제 침략전쟁을 위해 헌납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의 기부는 여느 친일파와 차원을 달리했다. 금전을 많이 기부한 것은 물론이고 전쟁 무기도 기꺼이 헌납했다.
일례로, 1933년에는 기관총 1정을 헌납하고, 이듬해에는 기관총 2정 값을 현금으로 기부하고, 1935년에는 국방 경비용 화물차 3대를 헌납하고, 1937년에는 애국비행기 1대를 헌납했다. 소방서·파출소·경찰서 신축비도 과감히 내놓았다. 위 사전에 따르면, 1938년에 그는 "오늘날 약간의 돈을 모은 것도 국가의 원조였으니, 국가를 위하는 운동에 이 돈을 쓰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라며 '겸양'을 표했다.
그런 반민족행위 덕분에 도의원에도 임명되고 표창도 많이 받았다. 전쟁 지원 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감투도 받았다. 그가 일제에 바친 것들, 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다.
1938년부터 천만장자로 불렸던 그가 1949년에는 '과거의 광산왕'으로 불렸다. 이때는 여전히 광산업계 지도자였다. 그러다가 1955년에는 '왕년의 광산왕'으로 불렸다. 해방을 전후한 시점에 고리대금업에 좀 더 치중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업종에서 여전한 재력을 과시했다면 굳이 '과거의 광산왕'이니 '왕년의 광산왕'이니 같은 표현이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1945년 해방 뒤부터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8·15를 계기로 그의 재력에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쇠락
그가 쇠락의 길에 접어든 것은 친일파였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1949년에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입건되기는 했지만, 여타 친일파들처럼 그 역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가 기울게 된 것은 고리대금업을 한창 하던 해방 직후에 인플레이션이 심해진 것과도 무관치 않지만, 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금(金)이라는 글자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최창학은 동학혁명 3년 전인 1891년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서희의 강동 6주 및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구성군이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광구 100여 곳을 보유한 금광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06년부터 대동학교와 향산학교에서 수학하다 1912년 사립 진명학교를 졸업했다", "10여 년간 탐광 활동을 한 뒤 1923년 평안북도 의주군의 삼성금광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등의 문장으로 설명한다. 만 21세 이후부터 10여 년간 금을 찾아다니다가 32세부터 금광 경영자가 됐던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일제강점기 평안북도에서는 다소 극적으로 소문나 있었던 듯하다. 구성군 근처인 운산군에서 출생한 언론인 리영희(1929~2010)의 말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단일 매장량으로는 세계 최대라는 운산금광이 있는 데서 태어난 리영희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집인 <대화>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에 세 사람의 거부가 있었어요"라며 "친일파의 거두였던 한상룡과 박흥식 그리고 최창학이야"라고 한 뒤 최창학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괄호 속 내용은 원문 그대로다.
일자무식이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었지만, 이런 설화는 최창학이 금광왕이 되는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빛내주는 측면도 있다. 탐광 활동을 하다가 금맥을 만나 주요 재벌이 된 그가 기울게 된 것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별장을 찾아온 손님과 관련이 있다. 그 손님의 성에도 금(金)이 들어 있었다. 그날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귀국해 죽첨장(경교장으로 개칭)에 찾아온 백범 김구(金九)가 바로 그 손님이다.
소문난 친일파인 최창학이 독립운동 지도자에게 별장을 내준 것은 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1970년 광복절에 발행된 <조선일보> 5면 전면 기사는 "광산왕인 최창학이 독립투사이던 김석황씨의 권유로 김구씨에게 내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2003년에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가 펴낸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은 "(임시정부환국 환영)준비위원장인 김석황과 최창학의 인간관계가 작용하여 결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라고 알려준다.
김석황(1894~1950)은 김구보다는 18년 뒤이고 최창학보다는 3년 뒤인 해에 김구의 고장인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2·8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등에 관여하고 자금 모집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때문에 징역 10년을 살았다. 김구와 인연이 있는 김석황의 권유를 받고 최창학이 집을 내주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쇠락의 시작이 됐다. 별장을 내준 지 3년 반 뒤인 1949년 6월 26일, 그의 별장에서 한국 현대사를 강타할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미국의 외면을 받으며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탈한 일, 김구가 미국의 적인 북한을 상대로 남북협상을 전개한 일에 더해, 김구가 그의 별장에서 서거한 일 등등은 그에게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서거 1개월이 조금 지난 그해 8월 1일, 그는 광업계 원로들을 이끌고 이승만을 만나러 갔다. 이 점은 위에서 언급했다. 초청을 받는 형식으로 간 그는 금광 개발에 대한 건의 사항을 내놓았다. 기존에 있었던 용건 때문에 간 게 아니라 새롭게 건의를 하고자 찾아갔던 것이다. 김구를 잃은 시점에 이승만을 얻으려는 의중이 있었다고 해석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시도를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그 뒤에 일어났다. 1955년에 세상이 떠들썩한 세무조사를 받고 그는 구속됐다. '맹장염 때문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라고 호소했는데도 구속은 집행됐다. 그의 쇠락을 명징하게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해방 전후에도 고리대금업을 했다. 그의 돈을 쓰는 기업인이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 때문에 세무조사를 받고 구속까지 됐다. 그만한 재벌에 대한 사법 수사가 정권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구에게 경교장을 내준 일로 괘씸죄가 적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38년부터 천만장자로 불리고 1949년까지도 광업계 원로로 불렸던 최창학이 1955년 무렵에 '왕년의 금광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유명한 친일파였던 그가 독립운동가에게 집을 내준 뒤로 그런 쇠락이 현저해졌다. 금(金)을 발견해 재벌이 된 그는 김(金)구를 만난 뒤부터 그런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로도 조선 왕실은 그대로 유지됐고 조선 군주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왕이란 표현이 여전히 사용됐기 때문에, 민간인이 왕으로 불리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주의가 용인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재력이 막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 기사가 나오기 6년 전에 발행된 1949년 8월 10일 자 <조선일보> 2면 하단 기사는 최창학을 "과거 조선 광산왕"으로 소개했다. 같은 달 30일 자 <조선일보> 2면 우상단 기사는 광업계의 원로급 지도자 다섯이 그달 1일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금광 개발을 건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 30일 자 기사는 최창학을 그 다섯 중에서 첫 번째로 거론했다.
이는 1949년 당시의 최창학이 예전 같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재계 원로로 활동할 만큼의 재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반에는 훨씬 더 쇠락해졌던 것이다.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그의 사업장 중 하나가 매각된 사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1938년에는 자신 소유의 광산을 니혼광업주식회사에 650만원에 팔아 일명 천만장자로 성장했다"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1938년 무렵의 그는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로 불렸다.
그만한 재산이 있었기에 일제 침략전쟁을 위해 헌납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의 기부는 여느 친일파와 차원을 달리했다. 금전을 많이 기부한 것은 물론이고 전쟁 무기도 기꺼이 헌납했다.
일례로, 1933년에는 기관총 1정을 헌납하고, 이듬해에는 기관총 2정 값을 현금으로 기부하고, 1935년에는 국방 경비용 화물차 3대를 헌납하고, 1937년에는 애국비행기 1대를 헌납했다. 소방서·파출소·경찰서 신축비도 과감히 내놓았다. 위 사전에 따르면, 1938년에 그는 "오늘날 약간의 돈을 모은 것도 국가의 원조였으니, 국가를 위하는 운동에 이 돈을 쓰는 것은 대단치 않은 일"이라며 '겸양'을 표했다.
▲ 최창학이 기관총 2정을 기증했다는 신문 기사. ⓒ 전갑생
그런 반민족행위 덕분에 도의원에도 임명되고 표창도 많이 받았다. 전쟁 지원 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 등에서 감투도 받았다. 그가 일제에 바친 것들, 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것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다.
1938년부터 천만장자로 불렸던 그가 1949년에는 '과거의 광산왕'으로 불렸다. 이때는 여전히 광산업계 지도자였다. 그러다가 1955년에는 '왕년의 광산왕'으로 불렸다. 해방을 전후한 시점에 고리대금업에 좀 더 치중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업종에서 여전한 재력을 과시했다면 굳이 '과거의 광산왕'이니 '왕년의 광산왕'이니 같은 표현이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1945년 해방 뒤부터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8·15를 계기로 그의 재력에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쇠락
그가 쇠락의 길에 접어든 것은 친일파였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1949년에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입건되기는 했지만, 여타 친일파들처럼 그 역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가 기울게 된 것은 고리대금업을 한창 하던 해방 직후에 인플레이션이 심해진 것과도 무관치 않지만, 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금(金)이라는 글자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최창학은 동학혁명 3년 전인 1891년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서희의 강동 6주 및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구성군이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광구 100여 곳을 보유한 금광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906년부터 대동학교와 향산학교에서 수학하다 1912년 사립 진명학교를 졸업했다", "10여 년간 탐광 활동을 한 뒤 1923년 평안북도 의주군의 삼성금광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등의 문장으로 설명한다. 만 21세 이후부터 10여 년간 금을 찾아다니다가 32세부터 금광 경영자가 됐던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일제강점기 평안북도에서는 다소 극적으로 소문나 있었던 듯하다. 구성군 근처인 운산군에서 출생한 언론인 리영희(1929~2010)의 말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단일 매장량으로는 세계 최대라는 운산금광이 있는 데서 태어난 리영희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집인 <대화>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에 세 사람의 거부가 있었어요"라며 "친일파의 거두였던 한상룡과 박흥식 그리고 최창학이야"라고 한 뒤 최창학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괄호 속 내용은 원문 그대로다.
이 사람은 일자무식에다 장돌뱅이(당나귀에 잡동사니를 싣고 평안북도의 장터를 돌아다니던 사람)인데,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금광맥을 발견하는 횡재를 했다고, 그 후부터 돈을 모아 조선의 광산왕이 됐던 사람이야.
일자무식이었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었지만, 이런 설화는 최창학이 금광왕이 되는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빛내주는 측면도 있다. 탐광 활동을 하다가 금맥을 만나 주요 재벌이 된 그가 기울게 된 것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별장을 찾아온 손님과 관련이 있다. 그 손님의 성에도 금(金)이 들어 있었다. 그날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귀국해 죽첨장(경교장으로 개칭)에 찾아온 백범 김구(金九)가 바로 그 손님이다.
소문난 친일파인 최창학이 독립운동 지도자에게 별장을 내준 것은 지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1970년 광복절에 발행된 <조선일보> 5면 전면 기사는 "광산왕인 최창학이 독립투사이던 김석황씨의 권유로 김구씨에게 내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2003년에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가 펴낸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은 "(임시정부환국 환영)준비위원장인 김석황과 최창학의 인간관계가 작용하여 결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라고 알려준다.
김석황(1894~1950)은 김구보다는 18년 뒤이고 최창학보다는 3년 뒤인 해에 김구의 고장인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2·8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등에 관여하고 자금 모집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때문에 징역 10년을 살았다. 김구와 인연이 있는 김석황의 권유를 받고 최창학이 집을 내주게 됐던 것이다.
▲ 건립 당시 죽첨장(경교장)금광으로 큰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이 초호화판 별장으로 1938년 지은 죽첨장의 건립 당시 모습이다. ⓒ 이영천(경교장 전시물 촬영)
하지만 이것은 쇠락의 시작이 됐다. 별장을 내준 지 3년 반 뒤인 1949년 6월 26일, 그의 별장에서 한국 현대사를 강타할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미국의 외면을 받으며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탈한 일, 김구가 미국의 적인 북한을 상대로 남북협상을 전개한 일에 더해, 김구가 그의 별장에서 서거한 일 등등은 그에게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서거 1개월이 조금 지난 그해 8월 1일, 그는 광업계 원로들을 이끌고 이승만을 만나러 갔다. 이 점은 위에서 언급했다. 초청을 받는 형식으로 간 그는 금광 개발에 대한 건의 사항을 내놓았다. 기존에 있었던 용건 때문에 간 게 아니라 새롭게 건의를 하고자 찾아갔던 것이다. 김구를 잃은 시점에 이승만을 얻으려는 의중이 있었다고 해석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시도를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그 뒤에 일어났다. 1955년에 세상이 떠들썩한 세무조사를 받고 그는 구속됐다. '맹장염 때문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라고 호소했는데도 구속은 집행됐다. 그의 쇠락을 명징하게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 최창학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려주는 1959년 10월 13일 자 조선일보 부고 기사. ⓒ 조선일보
그는 해방 전후에도 고리대금업을 했다. 그의 돈을 쓰는 기업인이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 때문에 세무조사를 받고 구속까지 됐다. 그만한 재벌에 대한 사법 수사가 정권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구에게 경교장을 내준 일로 괘씸죄가 적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938년부터 천만장자로 불리고 1949년까지도 광업계 원로로 불렸던 최창학이 1955년 무렵에 '왕년의 금광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유명한 친일파였던 그가 독립운동가에게 집을 내준 뒤로 그런 쇠락이 현저해졌다. 금(金)을 발견해 재벌이 된 그는 김(金)구를 만난 뒤부터 그런 쇠락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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