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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작에서 증명되는 이야기꾼 하마구치 류스케의 진면목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우연과 상상>

등록|2022.04.30 12:38 수정|2022.04.30 12:38

▲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 그린나래미디어㈜


어느 순간부터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은 정체 상태라는 일본영화의 차세대 거장 재목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비전문배우들이 연기한, 각기 다른 직업과 일상을 살지만 서로 친구사이인 30대 후반 네 여성이 각자 말하지 못한 채 속에 감춰뒀던 불안과 욕망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가식을 벗고 비록 쓰라리더라도 진실과 자신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는 317분(!)이라는 무지막지한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이름을 전 세계 예술영화계에 각인시켰다. 2015년에 선보인 영화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낭트3대륙영화제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국내에서도 작은 화제를 일으켰던 기억이다.

감독은 2018년에 다음 장편 <아사코>를 내놓는다. 영화 외적으론 남녀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들의 불륜 스캔들로 국내외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예술영화를 찍는 전형적인 영화제용 감독이라 여겨졌던 그에게 '아트버스터' 급 파괴력을 장착시켰다. 하지만 '도플갱어' 같은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아사코>는 말끔한 만듦새와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드, 재난 이후 살아남은 이들의 상실과 상처에 대한 묘사 등이 어우러지는데도 약간의 찜찜한 감정을 남겼다. 물론 감독의 커리어로 봐서는 메인스트림에 올라서는 성공작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이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코로나19 등의 돌발 상황으로 인해 거의 동시에 서로 상이한 형태의 두 작품을 작업하게 되었다. 그중 1편은 3시간짜리 대작 장편, 또 다른 1편은 40분 전후 단편 3편이 모인 옴니버스 영화로 기획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2편이 각기 어떤 작품인지를 알고 있다. 전자가 칸과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3시간에 달하는 장편 대작 <드라이브 마이 카>, 후자가 베를린에서 수상한 <우연과 상상>이란 것을. 어떻게 이런 작업방식이 가능한 걸까. 수많은 감독들이 세계3대 영화제에 일평생 한번이라도 서 보고자 천일의 밤과 낮을 뼈를 깎는 창작의 고통에 번민하건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듯 중력을 무시하듯 진입장벽을 뛰어넘는 감독의 위업은 정녕 타고난 재능에 기인한 것일까?

앞서 언급한 바대로 우리에겐 2010년대 중반 이후 <해피아워>와 <아사코>로 알려지기 시작한 셈이지만 감독의 경력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2006년부터 단편 독립영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온 감독은 2008년 첫 장편 극영화 <열정>을 선보인 이후 장편 대작 사이에 꾸준히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 작업을 병행해 왔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국내에선 소수의 관심 외에는 비교적 덜 조명돼온 이런 부류의 작업들은 감독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때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상당수의 감독들이 장편 극영화 작업 중간에 단편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을 병행하곤 한다. 장편을 찍을 때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한 일종의 쉬어가는 정거장으로, 혹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걸 막고자 하는 목적이다. 영화산업 내에서 싫든 좋든 상업투자나 공공 지원 어느 것이든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어야 하는 감독들의 자기 수련과정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인 셈이다. 그래서 대개 이런 부류의 작업은 비교적 부담이 덜한 실험이나 평소 시도하지 못해본 시도를 가볍게 도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그 짧은 작업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감독이 품은 작품세계의 원형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단편과 다큐멘터리 작업은 장편이 주, 그 외가 부라는 일반적 경향에 비해 좀 더 본격적이다. 그의 단편에서 만났던 얼굴은 장편에서 더 비중 있는 배역으로 종종 다시 만날 수 있고, 동일본 대지진 등 사회적 재난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건 그의 대작들에서 일각을 차지하고야 만다. 장편과 단편을 차례로 거듭하며 감을 단련하고 다양한 모색을 두려워 않는 명민하고 성실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단편 옴니버스인 <우연과 상상>은 감독 작품세계의 본령을 파악하는데 우회할 수 없는 정면승부의 장이 될 테다.

잘 짜인 이야기의 힘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영화
 

▲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 그린나래미디어㈜


<우연과 상상>은 아주 정직한 제목작법을 취한다. 비슷한 길이의 짧지 않은 단편들, 한국 영화제 기준으로는 단편으로 분류되기 애매한 사이즈다. 사실상 중편 분량으로 구분될법한 3편 작품이 등장인물이나 줄거리의 중복 없이 차례로 진행된다. 서로 통하는 건 오직 제목에서 파생되는 전개뿐이다. 감독의 상상 속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은 각 에피소드별로 우연한 계기를 통해 주인공들 각자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을 경유한다. '필ㆍ즉ㆍ연', 즉 필연이 우연을 매개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문득 벌어지는 우발적인 상황들이 어떻게 각자의 인생에 결코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는지 관찰하는 작업은 흥미 그 자체다.

그런데 그 파문이란 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 방식과는 거리가 좀 있다. 흔히 사건을 그럴싸하게 키우기 위해 억지로 극단적 상태로 몰고 가는 그림이 아니라 정말 지금 당장 순식간에 벌어질 법한 우연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삶에서 종종 체험하게 되는 그런 일들을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셈이다. 그렇게 일상적인 것들에서 자연스럽게 발단을 시작하면서도 정말 실제 현실에서 그렇게 진행되듯 이야기는 자유자재로 장애물을 회피하며 뻗어나간다. 영화를 봐야 체감이 가능할 정도다.

첫 번째 이야기,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모델 메이코는 촬영을 도운 친구와 함께 귀가하던 차 안에서 동행하던 절친이 최근 경험한 마법 같은 만남 상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신기해하며 경청하던 메이코가 친구와 헤어진 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순간부터 에피소드는 갑자기 미스터리 심리극 분위기로 돌변한다. sns에 넘쳐나는 출처 미상의 세상에 이런 일이! 류의 사연을 떠올리게 하지만 품격이 다른 정밀도로 관객의 예측을 불허하지만 결국 성장물이 되는 기이한 첫 에피소드의 진행은 도입으로 손색이 없다. 메이코의 친구로 등장하는 한국계 배우 현리는 감독의 단편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스승이기도 한 일본 영화의 또 다른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의 근작 <스파이의 아내>에도 얼굴을 비췄었기에 반가움을 더한다.

두 번째 이야기, "문은 열어 둔 채로"

가정주부로 늦깎이 대학생 나오는 아쿠타카와 상 수상작가인 세가와 교수 앞에서 그의 소설 일부를 낭독한다. 문학의 존재감, 관계의 종속성, 성적 긴장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에피소드 제목과 이야기 전개를 연관시켜보면 확 느낌이 온다. 한국의 대학에서도 종종 일어나곤 하는 학생과 교수 사이 평가 문제에 남녀간 이성적 접촉을 둘러싼 긴장, 음모와 배신의 스펙터클이 스릴러처럼 다가오고 지독히 우연적으로 귀결되지만 장르 형식에 종속되지 않고 자아 찾기 과정과 성장의 고통을 짙게 구현해내는 달콤 쌉쌀한 에피소드다. 보시면 알 수 있다.

세 번째 이야기, "다시 한 번"

고교 동창회 참석을 위해 20년 만에 고향 센다이를 찾았던 나츠코는 동창회 자리에선 막상 시들했지만 정말 유일하게 만나고 싶었던 동창과 재회하면서 과거 그녀들의 추억을 회상한다. 그런데 서로의 상황을 맞춰보니 충격적 상황에 직면한다. 이후 이야기는 일련의 상황설정 역할극에 가까워진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중년이 된 두 주인공이 지독한 헤프닝 같은 우연에 힘입어 20년간 쌓였던 응어리와 회한을 해소하고 우애를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점층법으로 등장인물들의 나이 대와 숙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점점 증가하는데 마지막 편이 그 절정인 셈이다. 그만큼 이야기의 깊이도, 공감능력도 정점에 달한다.

단편들답게 큰 줄기는 위에서 언급한 한두 줄이 전부다. 물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몇 번의 반전이 쥐었다 폈다 하긴 하지만 편의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을 취할 생각은 여전히 없어 보인다. 극단적 표현이나 충격적 돌발 상황을 배제하고도 오직 우연한 상황에서 작은 실마리들이 도미노 무너지듯 연쇄적으로 일어나는데 가까운 전개다. 그 가운데 주인공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파도와 언어의 횡단과정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스릴러 못지않은 몰입을 세 단편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한 감독이 훌륭한 배우를 캐내고 가공하는 입증사례
 

▲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 그린나래미디어㈜


주인공들 중 절반은 감독의 전작들에서부터 호흡을 맞춰 왔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오디션을 통해 선택된 배우들이다. 감독의 작품들에서 이미 봤던 배우들이 재등장하는 건 그저 반가울 뿐이다. 특히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열정> (2008)의 세 배우(시부카와 키요히코,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가 각각 두 번째 에피소드와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연을 담당했기에 더욱 그렇다. 대화의 미묘한 간극과 밀도를 유지해야 하기에 감독과 배우의 현장에서 호흡은 특히 이 영화에서 싱크로 율이 맞아야 하는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을 투입한 셈이다. 확실히 이미 감독과 시선을 맞춘 이들의 연기가 가장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위화감 없이 다가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다 처음 만나지만 다른 영화들에서 종종 봐왔던 이들의 경우, 그들이 보여주지 않았거나 시도해보지 못했던 다른 얼굴을 발견하는 기쁨이 가미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후루카와 코토네의 경우 독특한 얼굴이란 생각은 이전부터 해왔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확실히 뇌리에 각인되어버린다. 훌륭한 감독은 배우의 잠재력을 인간의 사용하지 않는 뇌 영역 활용하듯 끄집어낼 수 있다는데 딱 그런 형국이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가 그해 영화제 최고 이벤트로 봉준호 × 하마구치 류스케 대담과 클래스를 배치했었는데 한일 거장감독과의 만남이란 점도 이채롭지만, 두 감독 다 배우를 더 빛나게 만드는 감독이란 점에서도 동시대에 건전한 경쟁관계가 형성되는 느낌이다. 그런 조밀한 캐스팅과 사전작업에 힘입어 그야말로 물 흐르듯 이야기가 이어진다. 극중에서 배우들은 실제 영화 속 인물이 된 것처럼 그 흐름에 녹아들며 몸을 내맡기고 있다. 마치 능숙한 수중발레를 보듯.

극중 인물들은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그에 수반된 여러 극단적 기분을 극복하려 애쓴다. 그리고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위험한 거래를 시도하기도 한다. 살아오면서 평생 말하지 못했던 마음속 응어리를 풀기 위해 각각 며칠, 몇 년, 수십 년의 시간을 거쳐야 했던 이들의 사연은 정교한 연출에 힘입어 관객에게도 나는 저 상황에서 어땠었나 하는 반추와 성찰을 가져올 테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특히) 약간의 판타지 설정은 큰 무리수 없이 영화 속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설득력을 부여한다. 꼭 엄청난 예산을 들이거나 눈을 자극하는 특수효과가 필요한 게 아니다. 영화의 역사에서 한 축을 차지하는 판타지 / 공상과학 장르의 걸작들은 '이야기'의 흡인력으로 승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감독의 세계관과 스타일을 엿보는 창문 같은 영화
 

▲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을 굳이 언급하자면, 수면 아래에서 격렬한 해류가 몰아치는 것을 목격하는 그런 심정이다. 극중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파고는 보는 이를 마치 중력이 없어졌다 생겼다 하는 것처럼 들었다 놨다 해버린다. 누구나 갖고 있을법한 희미해져가던 추억, 과거의 회한들이 영화 속 인물들의 사연에 투영되어 비춰지는 전면거울을 보는 느낌도 든다. 은근한 감정의 고양과 뒤따르는 후회와 상기되는 기억들이 밀물과 썰물 교차하듯 뒤를 잇는다.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과거의 감각이 되어가는, '영화적 체험'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영화를 보는 순간과 극장 문을 나선 뒤 한참 후까지 서로 다른 두 가지 효용이 종횡으로 일격을 가한다. 견딜 수 없지만 즐겁기 그지없는 영화적 체험의 순간. 하마구치 류스케에 대한 질투와 기대로 몸부림치게 될 천일의 밤이 도래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거장의 즉위과정을 목격한 이들이라면 <우연과 상상>을 겪으면서 거장의 탄생과정을 확인할 의의는 차고 넘쳐 보인다. 그리고 '이야기'의 힘을 목격하고픈 이들, 넘쳐나는 일회성 위로와 치유 장르에 식상한 이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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