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중정부장 등 실세들 한강성당의 신자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 35] 함세웅은 이번 사건의 의미를 찾고 다시 성찰의 계기로 삼는다

등록|2022.05.11 15:36 수정|2022.05.11 15:36

▲ 1979년 12월 8일 감옥에서 석방된 함세웅 신부 ⓒ 함세웅


함세웅과 사제단이 다시 시국현장에 나서게 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운동권 내부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배경에 관한 시각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운동권 내부에서는 미국이 과연 이 나라 민주주의의 지원자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승인이 없었다면 광주민중항쟁 진압을 위한 군인동원은 불가능했다. 운동권에서는 전두환 일파가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미국이 최소한 묵인은 했으리라고 판단했다.

거기에다 1980년 8월 8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지 않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운동권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응징과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1980년 12월 9일 가톨릭농민회원 정순철이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지른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 사건이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비디오실 내부 20평 정도만 불타는 등 피해가 적었고, 또 전두환 정권이 미국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을 꺼려 보도를 통제했기 때문이다.(주석 9)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1980년대 초 5공정권과 민주화세력의 대척점에 선, 그래서 재판과정에서 격렬한 인식차이를 보였다. 함세웅은 몇 차례 법정에 증인으로 섰다.

"검사가 반박하기로는, 어떻게 방화한 사람들을 옹호하느냐는 거예요. 검사는 방화에 초점을 맞추고, 저희들은 넓은 의미에서 저항권, 정당방위권, 독일의 본 회퍼 목사의 주장(광기 어린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주장), 이런 내용들을 예로 들면서 의견을 폈는데요, 검사가 무리하게 질문할 때 저도 좀 무리하게 대답한 것도 있어요. '그런 것은 사제에게 질문하는 게 아니예요'라는 식으로." (주석 10)

학생과 노동자들을 비롯 각계로부터 저항을 받게 된 전두환 정권은 부산미문화원 사건을 빌미로 비판세력을 더욱 짓밟고자 하였다. 천주교가 그 첫 대상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천주교를 손불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천주교가 종교를 앞세워 좌경 불순분자들을 은닉하고 그들의 불순활동을 방조한다는 것이었다. 어용 언론들은 교회도 치외법권 지대가 아니라며 연일 공세에 가담했다. 사태는 이제 천주교와 정권의 전면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천주교 측은 처음에는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교회와 사제는 교회법에 따라 범죄 혐의자라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언제나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주로 방어에 치중했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 사실이 알려지고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보도가 계속되면서 각 교구 사제단들의 성명도 차츰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석 11)

천주교의 이같은 흐름과는 달리 권력기관은 물론 제도언론과 보수단체ㆍ종교단체 등의 비방ㆍ모함ㆍ협박과 왜곡보도가 적지 않았다. 함세웅은 이번 사건의 의미를 찾고 다시 성찰의 계기로 삼는다.

1981년 가톨릭이 양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를 내면적으로 정화하는 작업이 1982년 부산 미문화원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 힘든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준비가 조금 덜 된 분들을 떨어져나가고, 정말 알찬 분들만 남아 진리와 정의를 위해 더욱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교회 자체가 정화되고 굳세어진다는 걸 깨달았어요.

또한 학생들의 정말 조그마한 뜻의 표현이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광주학살의 만행과 전두환 정권의 실체 등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는 측면, 나아가 미국의 부도덕한 개입과 침묵….

저도 개인적으로 미국에 대한 생각을 수정해야겠구나 확신했던 것이 광주 체험을 통해서였거든요. 그런 점에서 학생들의 역할은 대단히 컸던 것 같아요. (주석 12)

그는 바깥 일에 열성인만큼 성당 일에도 충실하였다. 한강성당에 병설로 유치원이 생기면서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품이라 꼼꼼히 챙겼다. 한강성당에는 5공정권의 실력자들이 신자로 있었다. 안기부장, 청와대수석, 검찰공안부장 등이다. 이들과의 관계 설정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보성직자와 대척점의 스트롱맨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고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분명하다. 사람들을 만나면 조곤조곤 대화하고 보듬고 도닥이는 성품이지만, 연단에 서면 불의를 규탄하는 포효를 한다. 신념에 찬 확신이다.

허삼수 씨는 나중에 이사 왔어요. 유학성 씨는 그전부터 살다가 방배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렇지만 한강성당에 원래 교적이 있으니까 저를 찾아오기도 하고, 뒤에서 여러 가지로 도와줬어요. 저를 밤에 찾아와서 "신부님, 제가 군사령관으로 있을 때는 성당을 많이 지었어요." 하면서 봉헌헌금도 많이 냈고요.

또 이런 적도 있어요.

"신부님, 제가 하지 말래서 안 할 분도 아니고… 그래도 제가 안기부장으로 있을 때 신부님이 또 구속되면 어떡합니까. 신부님 하시는 거 다 하시되 저한테 사전에 통보만 하십시오."

그래서 하루 전이나 한시간 전에 우리 이런 성명서 낸다고 전화해준 적도 있어요. 당시는 안기부장이 우리 성당에 나오고 그러니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저한테 좀 잘해줬어요. (주석 13)


주석
9> 유시춘 외, 앞의 책, 305~ 306쪽, 경향신문사, 2005.
10> <함세웅 신부의 시대증언>, 293쪽.
11> 유시춘 외, 앞의 책, 307쪽.
12> <함세웅 신부의 시대증언>, 296쪽.
13> 앞의 책, 29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