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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의 물질 찾아 혼 불어넣는 것, 이게 도예지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1] 최창석 바우가마 대표

등록|2022.05.11 11:11 수정|2022.05.11 13:26
"도예는 수억 년 산화돼 부서진 광물질을 태초 형태로 되돌리는 작업이죠. 그 환원 물질에 새 생명(예술의 혼)을 불어넣고요. 딱딱한 알맹이에 불과한 씨앗에 새싹을 틔우는 농부처럼요. 치밀한 계획, 그런 건 없습니다. 영감을 따르는 거죠. 수십억 년 시원을 찾아가는 데 자잘한 기술이나 꾀로 되겠어요?"

여주 가남에서 '바우가마'를 운영하는 최창석 도예가(61·남). 그가 지난 8일 기자에게 털어놓은 34년 도예인 삶에 대한 총평이다. 그는 오는 13일부터 사흘간 안금리 작업장에서 '시를 굽다' 행사를 개최한다. 김동환 시를 새긴 작품을 전시하고 시를 낭송하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10월에 또 한 번 열 예정.

자신의 도자 미학을 짚어 달랬더니 작가는 영국 현대 도예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나드 리치 이야기를 꺼낸다.

"그가 미국의 한 도자학교에서 이런 말을 했대요. 세상 사람들은 도자 하면 흔히 중국 일본 조선 도자를 손에 꼽지요. 그런데 공부가 깊어지면 조선도자가 최고임을 알게 됩니다. 거기까지 가면 도예 공부를 끝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 34년 도예인 삶을 풀어놓는 최창석 바우가마 대표. ⓒ 최방식


13~15일 가마터 '시를 굽다' 작품전 열어

어떤 차이일까 궁금해하자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 일본 도자는 합리주의, 조선도자는 자연주의를 구현하죠. 조선도자는 심심한 가운데 은은한 매력을 가졌거든요. 그릇을 질식시키지 않는 비우는 도자. 매병이나 옹기를 풀밭에 세워놓으면 잘 어울리듯, 현란이나 지루함을 거부하는 자연 미학이죠."

도자 해설이 놀랍다. 수십억 년 산화된 물질을 가열해 산소를 빼내고 본래 물질로 되돌리는 환원. 불완전연소(산소 부족)에 따라 탄소가 표면침투(침탄작용)해 물질 속 산소와 결합(이산화탄소)해 날아감에 따라 물질을 시원의 상태로 돌아가는 도자. 그 과정에서 색 또한 깊고 고와진단다.

오랜 경력과 거침없는 언변에도 해설이나 평가를 삼가는 그의 태도. 스타워즈 삽입곡 '목성'을 떠올렸다. '행성'(구스타프 홀스트의 1914년 작)에 수록된 7개 관현악 중 가장 장중하며 서정적인 표제 음악. '환희의 전령' 부제를 단 음악. 탁배기 한 잔, 그 불콰함을 담은 듯했다.

최 작가는 요즘 회령자기에 빠져있다. 천지 화산재 점토로 도자문화가 발전했던 지역. 그에겐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의 본은 경주.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가문. 갑오년(1894년) 혁명이 좌절되고 조부는 야반도주 함흥으로 이주했다. 한데 작은 할아버지가 일왕 암살 활동 혐의로 일본 유학(메이지대) 중 붙들려 취조받다 사망했고, 할아버지는 독립군 지원 혐의로 일경에 치도곤을 당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부친 나이 아홉 살 때.

아버지는 17살에 징용을 피해 금강산으로 숨어들어 승려 행세를 하며 신계사 목수를 했다. 48년 월남해 월정사 방하남 스님(탄허 스님 상좌)과 절 건축 일을 했다. 그러다 여주로 와 군청 한옥목수를 맡았지만 보수가 형편없었다. 여튼, 신륵사 등 여주 문화재에 부친 손이 안 간 데가 없을 정도라고.
 

▲ 여주 가남에 있는 최창석씨의 바우가마 담장 풍광. ⓒ 최방식


탁배기 한잔 그 불콰함 담은 '회령자기'

대학에선 사회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독재는 그를 학문에 매진하게 두지 않았다. 정권 나팔수 방송 시청료 거부운동, 조선일보 안보기 캠페인 등. 언론고시를 준비했지만 포기하고 여주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했다.

여주민예총 창립을 주도했다. 풍물에 노래 실력을 활용, 지역 문화운동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활동비와 생계비를 마련해야 했던 최씨. 선배 가마에서 알바를 시작한 게 도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바우가마 뜻을 물으니 어릴 적 아버지가 그를 불렀던 '바우'라고 했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그랬다. 이름은 이미지의 의미를 정박한다고. 바우는 그의 이름이고, 가마 이름이며, 아버지의 염원이고, 자신의 평생 일터가 된 것이다.

최씨는 지역 문화예술계에서 바른말 잘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다.

"제 눈에는 모순 보이거든요. 행정이나 도자재단 관계자들은 모르거나 뭉개는 거고요. 말하면 불편해하죠. 난 이해관계가 없으니 할 말 하는 거고. 지적해도 바뀌지 않지만요."

봄꽃 이팝이 흐드러질 때다. 작업실 가득한 백자를 보며 그 하얀 꽃을 연상했다. 미움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며 입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그의 성정. 꽃무리를 수북한 쌀밥(이밥)으로 봤던 이들은 또 얼마나 허기졌을까. 풍년이라도 예측(氣象木)하고팠겠지.
 

▲ 최창석 도예인 작품 전시실. ⓒ 최방식


학생운동 여주문화운동 뒤 숙명, 도예의 길

여주도자에 그는 할 말이 많다. 강천면에 30~40개의 가마터가 있고, 안금리 한 골프장엔 8백년도 더 된 게 있다. 광주(사옹원 분원 있던)나 이천에 없는 고령토가 나는 도예 본고장. 1884년 분원 폐쇄 뒤 사기장 6명이 들어와 분원 생산량보다 많은 도자를 만들어낸 여주. 도자재단이 이천에 들어서고 여주가 밀리기 시작했다.

"국내 도예 가마는 2천 개 정도. 그 중 50%가 여주·이천·광주에 있죠. 여주에만 6백여 개 넘게 있었어요. 하지만 행정 난맥상으로 이천 등으로 빠져나갔죠. 이천에 들어선 도자재단은 이천 중심으로 지원하는 것 같아요. 여주시는 도예과를 없애고, 여주지역 대학은 취업 안 된다며 도예학과를 폐쇄했고요."

도자기를 빚는 그의 모습은 어떨까.

"도예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실험이지요. 사전에 아무런 계획도 안합니다. 물레 앞을 돌며 착상을 하죠.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물레를 돌리고요. 마음 가느대로 하는 겁니다."

일부러 계획하지 않는 도예. 문득 떠오른 생각, 그 순간의 영감과 창의력을 좇는 예술. 그 무한 에너지를 자연으로부터 받아 완성해가는 열정. 흥과 멋을 완성하는 신명이겠지. 편협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실천인가.

가족으론 서양화를 공부했고 서울에서 문화센터 강사를 하는 아내와 아들·딸을 뒀다. 이웃 도예인 집 한 모임에서 처음 본 여인. 몇 차례 만나 불꽃이 튀었고. 월악산에 놀러가 혼인 승낙을 받았다고 했다.
 

▲ 바우가마 도예 전시실 밖. ⓒ 최방식


큰 애(아들)는 살가운 친구. "밤새 술을 따르며 노장자와 동학 이야기를 하죠.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며. 한 스님이 동자를 데려와 집안을 들여다보는 꿈을 꾸고 얻은 아이여서 그런지..." 딸은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직장에 다니는데, 페미니즘에 관심이 크다고 했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저널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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