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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지키려 성을 쌓은 시절의 이야기

[서평] 장세련 지음, '마성에 새긴 약속'

등록|2022.05.16 15:56 수정|2022.05.16 15:56

▲ 표지 ⓒ 단비어린이



여행의 값어치를 높일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여행하기 전에 장소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찾아 읽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가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도 낡은 돌무더기 폐허다.

미리 공부해서 아는 재미가 있다면, 반대로 무심코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장소도 있다. <마성에 새긴 약속>은 울산의 남목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동화다.

나는 유년기에 남목을 수차례 지나다녔으나 버스 정류장의 어느 지점으로만 기억할 뿐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남목에 얽힌 작품이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누구나 자기 집 앞마당에 깃든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쉽사리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기분으로 읽었다.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는 군마나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마를 기르기 위해 산을 통째로 막아 목장으로 삼았다. 이런 목장을 마성이라고 불렀다. 울산의 남목도 100여 개가 넘는 마성 중 하나였다. 산을 통째로 막아 목장을 만든 이유는 말을 노리는 호랑이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라고 적혀있었다.

호랑이라는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불과 삼백 년 전에는 사람이 말을 지키기 위해 차출되어 돌로 성을 쌓았다. 그리고 구식 무기로 호랑이와 싸웠다. 말이 사람보다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다.

지금은 삼 년만 지나도 스마트폰이 구형으로 전락하는 세상이다. 당연히 군대에서도 말을 타지 않고, 말을 키우라 명령하는 임금도 없다. 나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책을 읽어나갔다.

작가는 마성 안에 있는 '전후장'이라는 사람의 비석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렸다. 전후장은 영조 시대의 말단 목장 관리인이었다. 당시에는 호랑이의 습격으로 말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으면 임금이 벼슬을 내렸다. 전후장은 호랑이 사냥으로 이름을 떨친 사내다.

비석에 전후장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전후장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여섯 마리나 잡았다고 한다. 그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에까지 오른다. 종2품은 조선시대 18품계 중 제4등급으로 상당히 높은 품계에 해당한다.
 

▲ 남목 마성터 ⓒ 국가문화유산포털


<마성에 새긴 약속>의 주인공 전유상은 실존 인물인 '전후상'을 바탕으로 만든 상상의 캐릭터다. 가공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전유상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릴 적 어머니를 잃는다. 이후 아버지와 둘이 경상북도 청도에서 살아간다. 전유상의 아버지는 돈이 없어 군역을 면제받지 못하고, 멀리 울산까지 마성을 쌓으러 차출되어 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축성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한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분노한 전유상은 자신을 돌봐주던 칠복 아재를 설득해 함께 울산으로 떠난다. 도착해서 보니 마성을 쌓다가 죽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다. 문경, 청도, 밀양, 영천, 경주의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돌성을 만들다 죽었다.

아비 잃은 소년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감목관의 배려로 전유상은 목장 일을 거들게 된다. 그리고 이 비범한 소년은 엄청난 완력과 투지로 열두 살에 첫 번째 호랑이를 잡는다. 이후에도 위기에 빠진 주변인을 구하는 등 영웅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나는 목장의 삶을 묘사한 작가의 필력에 푹 빠졌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말똥 냄새가 공기 중에 풍기고, 망아지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을 나서면 조랑말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남목의 풍경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대입시켰다. 전혀 모르는 장소를 다루는 작품에 비해 훨씬 몰입이 잘 되었다.

책을 읽은 주말, 나는 집 근처의 경포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분명 여기에도 <마성에 새긴 약속>처럼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았다. 과연 찾아보니 박신과 홍장이라는 두 연인의 절절한 러브스토리가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도 집중해서 읽었다.

역사 동화의 미덕은 독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딜 가든 눈에 보이는 풍경 이상의 이야기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사람이 머물렀던 곳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잠자고 있다.

아무 의미 없는 맨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마성에 새긴 약속>을 읽으며 거듭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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