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가해자가 내 옆에'... 잠들지 못하는 저항자들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47] 12.12 군사 쿠데타 주역들
▲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12.12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 박윤관 상병에 대한 33기 추도식이 2012년 12월 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29번 묘역 깅오랑 중령 묘소에서 열리고 있다. ⓒ 권우성
12.12 군사반란은 무혈 쿠데타에 가까웠던 5.16 군사정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등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군권을 장악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3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 신군부 세력은 정병주, 장태완 등을 모두 강제로 불명예 예편시켰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는 징역 10년 형을 선고했다. 이와 달리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은 승승장구하며 권력의 요직을 차지했다. 이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함으로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했다.
쿠데타 일정은 마무리됐지만 5.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유혈진압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 22일 육군대장으로 예편했고, 같은 해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5년 뒤에는 노태우가 직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6년 1월, 전두환과 노태우는 12.12 사건 반란 혐의와 5.18 사건 내란 혐의로 구속기소 됐고,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대화합을 이유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하면서 구속 2년여 만에 석방됐다.
이후 노태우는 2021년 10월 26일, 전두환은 한 달 후인 11월 23일 각각 9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두 사람 모두 국립묘지 안장과 관련한 논란이 일었지만, 국가보훈처는 내란죄 등의 실형을 이유로 국립묘지 안장을 불허했다.
현충원에 안장된 12.12 군사 쿠데타 주역들
▲ 유학성은 군 형법상 반란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최종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숨지는 바람에 국립묘지에 묻혔다. ⓒ 우희철
두 사람과 달리 대전현충원에는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이 여럿 안장돼 있다. 유학성, 진종채, 소준열, 이차군, 정동호, 우국일, 김택수, 김기택, 정도영, 안현태, 송응섭, 김윤호 등이다. 모두 장군묘역에 누워있다.
이 중 유학성(육군 대장)은 12.12쿠데타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 군형법상 반란중요임무 종사 등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복역 중 병세가 악화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돼 있던 상태에서 숨졌고,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국립묘지에 묻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 안현태는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1997년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애초에 안장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복역 중 사면됐고 잔형 집행을 면제 받은 후 복권이 이뤄져 대전현충원 안장이 강행됐다. 안씨의 현충원 안장은 두고두고 논란을 빚고 있다.
1973년 윤필용 사건(쿠데타 모의 혐의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과 장성·장교 등 13명을 처벌한 사건)을 수사해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적발했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1981년 해운항만청장으로 재직 시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 3년을 섣고 받아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안현태 경호실장의 국립묘지 안장 소식에 강창성 전 보완사령관 유족들은 "국립묘지 안장 거부 이유를 알고 싶다"며 국가보훈처에 안장 대상 심의위원회 회의록 열람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저항한 자와 가해자가 같은 공간에
▲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이등병으로 강제 전역당했던 정승화 전 참모총장의 묘 ⓒ 우희철
아이러니한 것은 쿠데타에 저항하다 고초를 받았던 인물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가해자들과 같은 공간에 누워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승화 전 참모총장이다.
정 전 참모총장은 신군부 측에 의해 체포돼 이등병으로 강제 전역당한 후 군사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추후 육군대장으로 복권이 됐다.
1995년 전두환의 군사반란 관련 재판 당시 증인으로 채택돼 증언했던 그는 두 사람이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라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는 2002년 6월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예비역 대장 자격으로 안장됐다.
신군부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강제 예편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도 2010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사령부 전차부대까지 동원해 쿠데타를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반란군에 체포돼 모진 고초를 받는다는 소식에 그의 부친은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1980년 4월에 숨졌고, 2년 뒤인 1982년 서울대 자연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그의 아들은 4월에 변사체로 발견되는 등 가족들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그는 공교롭게도 신군부의 핵심 인물인 안현태가 자신의 묘지 앞쪽에 묻혀 사후에도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은 1989년 변사체로 발견됐으며 자신을 지키려다 총탄에 맞아 숨진 김오랑 소령이 묻힌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교과서인 국립현충원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모습에서 나오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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