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임신한 남자, '묘한' 쾌감이 든 까닭
[OTT 리뷰] 넷플릭스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
▲ 넷플릭스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 스틸컷 ⓒ 넷플릭스
임신과 출산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모성애 유무도 여성에게만 국한된 거란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다. 모성애는 때론 부성애 보다 신성시되어왔다. 만약 성별의 구분 없이 임신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려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은 임신과 출산이 남성에게 가능한 가상 세상이 무대다. 한 회당 25분 내외라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8부작 시리즈로 사카이 에리의 만화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을 원작으로 한다. 임신과 출산이 성별 구분 없이 가능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궁금증이 다층적으로 전개된다.
사이토 타쿠미의 안정되고 진정성 있는 연기와 일과 성공이 우선인 일본 커리어 우먼을 연기한 우에노 주리, 언제나 그랬듯 믿고 보는 능청스러운 연기 달인 릴리 프랭크가 등장해 황당하지만, 진지한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하는 데 힘쓴다.
남성의 임신과 출산이 가져온 변화
▲ 넷플릭스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 스틸컷 ⓒ 넷플릭스
잘나가는 작가처럼 보이나 당장 일에 치여 사는 35세 세코 아키(우에노 주리)는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키우고 싶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집안에서는 결혼 안 할 거냐는 잔소리만 한다. 그래서일까. 출산해 줄 수 있는 남성이 있다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그런데 상상 속의 그 말이 씨가 되어버렸다.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몇 번 관계를 가진 히야마 켄타로(사이토 타쿠미)가 임신했다며 찾아왔다. 대뜸 너의 아이라고 말하는데 묘한 쾌감이 든다. 필요할 때 가끔 만나는 파트너였는데 내 아이라니 책임을 져야 하나 혼란스럽다. 둘은 극심한 워커홀릭이었다. 부담스러운 사랑과 결혼보다 원하는 시간에 만나 원하는 걸 주고받는 게 편했다. 하지만 아이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어중간한 사이가 돼버렸다.
고심 끝에 임신중절을 택하겠다는 켄타로는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사인을 요구한다. 사실 임신중절도 출산과 똑같다. 수술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리스크는 모두 임산부의 몫이며 다시 회복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아키는 고민한다. 그의 몸에 있는 생명이지만 나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커진다. 결혼을 해야 할까, 진지하게 만나봐야 할까 생각이 많아졌다.
한편, 켄타로는 출산에 회의적이었다. 뉴스에 종종 보도되는 시스젠더(생물학적 성과 성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임신은 징그럽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육아 파파가 회식 자리에서 일찍 빠지는 것을 보며 부정적인 시선을 취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자고 일어나니 덜컥 임신이 되어버린 거다. 강 건너 불구경하던 일이 내 이야기가 되자 입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37살인 켄타로는 광고기획자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게 좋았고 승진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임신 초기 증상이 나타나면서 업무에 지장이 생긴다. 시도 때도 없이 속은 메스껍고 두통은 심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유가 흘러나와 셔츠를 적시기도 한다. 늘 깔끔하고 완벽한 외모로 인기를 독차지했었지만 만사 귀찮고 무기력해 덥수룩한 수염에 흐트러진 모습으로 출근한다.
이런 일이 지속되자 상사에게 찍혀 중요 프로젝트에서도 제외된다. 호르몬 변화로 급격한 일상의 변화가 시작되지만 속앓이만 할 뿐 도움 청할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당당하게 휴가를 쓰지도 못한다. 그때야 비로소 임신의 어려움을 역지사지로 생각하게 된다. 갑자기 여성 동료들이 슈퍼우먼처럼 느껴진다.
임신과 출산의 역지사지 경험
▲ 넷플릭스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 스틸컷 ⓒ 넷플릭스
임신은 몸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요동치는 심리 변화를 견뎌야 한다. 드라마는 남성 임산부가 보편적이지 않아 차별과 멸시가 판치는 세상이 배경이다. 때문에 아빠가 엄마 대신 임신했다고 자녀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거나, 색안경을 끼고 수군대는 분위기다. 판타지 세상에서도 이를 이겨내고 생명의 소중함, 가족의 다른 형태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직접 겪어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임부복처럼 편한 남성 옷이 필요하고, 수유 패드, 요실금 패드, 임산부 표식 등도 절실함다. 남성 임산부도 우울증을 겪는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감을 나눌 남성 임산부 카페를 만들어 큰 호응까지 얻는다. 소수자가 되어보니 바꿔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켄타로는 스스로 홍보 모델이 되어 임신과 출세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고군분투한다.
드라마는 임신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들춘다. 고정된 성역할을 전복하자 다양한 문제점이 속출한다. 과연 '보편적인 역할', 'OO답다'라는 말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자라면 당연히', '남자답지 못하게' 등과 같은 사회적 함의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차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임신, 출산을 여성의 역할로만 한정하지 않으며 클리셰를 비껴간다. 켄타로가 아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릴 때 "내 아이가 맞아?"라는 뉘앙스로 묻는 상황이 묘한 쾌감을 불러온다. 경력단절된 쪽이 남성이고 여성은 꿈에 그리던 해외지사 제안에 응하는 장면도 의미 있다.
생활비를 보내겠다는 아키에게 켄타로는 "너의 승진에 발목 잡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 임신했을 경우 여성 쪽이 경력단절되는 경우가 흔하다. 결국 두 사람은 '나답게 사는 모습'을 통해 슬기롭게 헤쳐 나가려 한다. 누구답게 행동하려는 것 보다 나다운 모습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 넷플릭스 [히야마 켄타로의 임신] 스틸컷 ⓒ 넷플릭스
고정된 성역할,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설정 등에 구애받지 않고 나 자신의 삶을 살려고 한다. 각자의 인생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성숙한 마음가짐으로 변화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기자 이를 최대한 슬기롭게 헤쳐나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결혼 없이 힘을 합쳐 아이를 키워보자는 아키의 제안에 켄타로는 응한다. 아이를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사회적 기관, 가족의 배려가 있다면 출산율 걱정에 목매는 국가 시름도 나아지리라 믿는다. 개인의 작은 변화가 모여 사회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건강한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담은 시즌 1이 끝났지만 원작처럼 시즌 2의 육아 전쟁이 기대되는 드라마다. 더불어 상처받은 가족이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비슷한 소재의 할리우드 영화 <쥬니어>와 비교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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