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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지만 사랑하기는 쉽지 않은 섬, 제주

김연미 지음 '알다시피 제주여행'을 읽고

등록|2022.05.30 08:57 수정|2022.05.30 09:42
다 아는 얘기지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좋아한다는 건 대상이 지닌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는 감정이고, 사랑한다는 건 그 대상의 모든 것을 조건 없이 품는 마음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가 잘났든 못났든 밉든 곱든 끝까지 믿어주고 지지하고 안아주게 된다. 외모가 훌륭해서 혹은 그가 나에게 뭔가를 해줘서 좋아하는 차원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 차이는 '여행'이라는 행위에도 존재한다. 어떤 여행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의 여행은 행선지부터 달라지는 건 물론이고 발걸음과 시선과 호흡까지 사뭇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로 꼽히는 제주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은 대부분 제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겠지만, 어쩌면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제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과 시간을 빛나게 해줄 아름다운 자연과 매력적인 장소를 찾아다닌다. 몽환적인 해변, 웅장한 화산, 신비로운 숲길, 낭만적인 오름, 스타일리시한 카페를 검색하고 찾아가서 멋진 사진들을 찍으며 SNS를 통해 그 행복한 시간들을 공유한다.

한편,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이 섬이 견뎌온 참담한 비극과 고통의 세월이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제주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만큼 이 섬이 지닌 아픔과 상처를 외면할 수 없고, 불편함을 넘어 슬픔과 분노까지 감내할 용기가 생긴다.

그래서 제주를 사랑하게 되면 이 섬의 어디를 가든 눈부신 풍경 너머 땅속에 묻히고 파도에 쓸려가고 바다에 가라앉은 고난의 역사 속으로 시선이 길게 늘어난다. 천천히 걷고 지그시 밟으며 너무나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과 너무나 아프게 살아온 삶들을 현재형으로 느낀다.

육지에서 한 시간 남짓 비행기만 타면 쉽게 온다고는 해도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단 며칠도 어렵게 비워서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여행일 테다. 멋진 자연 속에서 맛있는 밥 먹고 맘 편히 웃고 쉬다 가는 대신, 굳이 지나간 역사를 들추며 비탄과 분노와 슬픔을 선사해주는 '다크 투어'를 선택한다면 진심으로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 제주를 사랑한다면 꼭 읽어봐야 할 여행 안내서 ⓒ 최성연

 
그런 사람들이 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쓴 책이 바로 김연미 작가의 <알다시피 제주여행>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도민으로 정착한 지 일 년이 채 못 된 나도 이제 조금은 이 섬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만일 이 책을 기계적으로 소개한다면 4.3 항쟁을 중심으로 구성한 제주도 다크 투어(Dark Tour) 안내서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매력이 이렇게 무미건조한 말로 요약될 수는 없다.

실제로 여행 안내를 받고 싶은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아주 수월하게 잘 읽히면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굉장히 알차고 감동적인 여행이 될 수 있는 탁월한 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제주도 사는 친한 언니가 공항에서부터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는 느낌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서 제주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토박이 작가의 편안한 설명이 바로 내 옆자리에서 들리는 듯하다. 책 속의 문체는 분명 문학적이며 시적인데도 정겨운 구어체로 들리니 참 묘한 일이다.

더욱 묘한 것은 책이 안내하는 데로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글을 읽었다기보다는 하나의 시공간을 감각적으로 경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공간은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장소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이 입체화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애매함 없이 명료한 서술이지만 그 서술은 결코 어떤 틀도 만들지 않고 특정한 방향으로 가지 않기에 제주의 바람처럼 시원하고 바다처럼 막힘이 없다. 이 바람 속에 떠다니는 꽃잎, 혹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고깃배처럼 책 속의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제주 예술가들의 시와 그림이다.

다크투어라는 특성상 독자의 상상 속에 펼쳐진 역사의 장면은 말할 나위 없이 끔찍하고 참혹하지만, 그 슬픔과 분노가 나를 짓눌러 쓰러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굳건히 세워주는 힘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이 섬의 맑고 깊은 생명력을 평생 호흡해온 작가가 그 호흡으로 쓴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제주에 와서 한껏 밝고 한껏 신나고 한껏 편안해도 모자랄 판에 다크 투어를 왜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답하기가 어렵다. 사랑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릴 근사한 사진 대신 조금 쓰라린 마음의 사진을 한 장 찍어서 간직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그 우울했던 사진이 내 삶의 어떤 순간 나를 위로하는 가장 따뜻한 친구가 되어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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