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밖 청소년의 시원섭섭한 여정
[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5. 사건의 여파: 예상치 않은 파문의 역사-3
이번 기사에서 다룰 사연의 주인공은 학교 밖 청소년들입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어느 시점에서 학교를 중단하고 공교육 제도 밖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기사의 내용은 제가 2021년에 외부연구진으로 참여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학교 밖 청소년 지역사회 지원방안 연구 Ⅳ: 질적 종단자료 심층분석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이 기사와 관련된 더 깊은 이해를 원하시는 분은 이 보고서를 찾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저는 이 종단연구 프로젝트에서 2018년부터 2020년 사이에 수집한 자료 중 일부를 사용하여 분석하고 글을 썼습니다. 2020년 당시 연구 참여자들은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이었으며, 제가 주로 그 여정을 들여다 본 학교 밖 청소년(실제로는 청년)은 9명이었습니다.
자,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 볼까요? 아래 그림을 보시면 대략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만,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해설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는 분 중 학교중단을 경험한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공교육 제도로 진입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 끝까지' 다니는 걸로 알았지, 학교제도 밖에 다른 대안이 있다든가, 어쨌든 학교를 중단할 생각은 잘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5만명 정도의 청소년이 학업을 중단하였으며, 2019년 학업중단율이 전체 청소년의 1%에 이르렀고, 갈수록 증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학교 밖 청소년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떠올리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도대체 학교를 왜 그만두는 거야?" 청소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학교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는 사례의 수만큼 많지만(즉 100명이라면 100가지 사연), 제가 수행한 연구와 이전에 유사한 주제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밝혀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학교를 다니는 의미를 못 찾아서, 둘째, 학교라는 제도가 싫어서, 셋째, 학교에서 좋지 못한 일들을 겪어서 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학교생활이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싫어서, 그리고 학교폭력이나 친구 또는 교사, 학교 체계와 사이에 겪은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니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로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며, 비슷한 경험을 하는 청소년들이 모두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격발장치'라고 부를만한 사건들이 실제로 필요하거나 발생됩니다. 어떤 청소년들은 우연히 학교 밖에 다른 길 또는 더 나은 대안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다른 청소년들은 갑자기 발생한 어떤 사건(학교폭력을 미온적으로 수습하려는 교사의 태도 등)에 의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의지'로 본다면, 후자의 경우는 '떠밀려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부 청소년은 학교에 가기 싫어 버티다가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일이 점차 잦아지면서 어느 시점에서는 학교를 안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하위맥락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입니다. 학교를 같이 다니는 친구나 교사와 관계가 좋고 그것이 학교를 다니는 즐거움 중 하나라면 위에서 언급한 '사유'들이 쌓이더라도 계속 다닐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어떤 관계도 그 청소년을 끌어당기지 못하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만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청소년들 중 친구 때문에 그만둔 경우는 있어도 친구들과 관계 때문에 망설인 경우는 없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대부분의 학교 밖 청소년들이 학교 중단 이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그만둔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더라도 바로 그것을 실행하기는 어려운데, 계획마저 없다면 다음 여정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막지는 않더라도 뭔가 준비한 뒤에 떠나도록 도움을 줄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이제 바로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퇴를 결정하고 학교 제도 밖으로 나오게 되는 순간입니다. 삶의 전환점이자 분기점이고 새로운 오르막의 출발점입니다. "학교를 그만둔 이후에 청소년들은 뭘 하면서 지낼까요?" 그것이 학교 밖 청소년들에 대해 가지는 일반 사회구성원들의 두 번째 질문일 것입니다.
위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학교 중단 직후 한동안 '무위', 즉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기간을 거친다는 공통점을 짚어두고 가야겠습니다. 이들 청소년들은 제 방으로 들어가서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기도 합니다. 그 기간은 짧으면 한 달에서 길면 일 년까지 매우 범위가 넓지만, 대체로 한 달 정도는 이어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지경이겠지만,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전환점을 앞둔 청소년들에게 이 기간은 필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별것 없습니다.' 이들은 일을 하거나 다른 형태의 교육을 받거나 상당 기간 딱히 하는 일이 없이 지냅니다.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에서는 만 15세 이상을 근로 가능한 연령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중학교 1, 2학년 시기에 자퇴한 청소년은 일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중3 정도가 되면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 나이부터 만 18세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단기 알바' 정도입니다.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은 되어야 그나마 급여도 제대로 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규직의 괜찮은 일자리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 중단 이후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현실의 복잡성을 일일이 해설하기는 어려우므로 고등학교 1학년 초기에 학교를 중단한 경우를 전형적인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청소년에게는 청년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될 때까지 3년 정도의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에 남아 있는 자신의 또래들에게 공교육 제도가 채우는 것들을 대신하여 그는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자신의 시간들을 채워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청소년들과 우리 자신에게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중등교육이든 고등교육이든 제도교육 체계를 떠난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마흔 살을 기준으로 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하며, 나머지 소수의 일부는 소득 없이 가족이나 다른 사람을 돌보며 살고, 다른 일부는 다른 사람이나 제도에 의존하면서 살게 됩니다. 두 번째 유형은 꼭 필요한 생활방식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그 가치를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고, 세 번째 유형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질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여하간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내려지는 결정이 학교 밖 청소년이 지나쳐가는 여정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위에 제시된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많은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어쨌든 정규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일은 반드시 대학으로 대표되는 고등교육을 마쳐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일들은 꼭 대학을 나올 필요는 없지만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더 나은 수준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기능학원이나 직업학교를 선택할 수도 있고, 그것이 답답한 고등학교 교실보다는 낫고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할 수는 있지만, 해당 직업군에서 2류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일부 청소년들은 고등학교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당분간 학업의 길을 따라가기로 한 일부 청소년들은 한동안 독학이나 홈스쿨링의 형태로 혼자서 공부를 해보기도 하고, 그것이 잘 안 되면 학원을 다니기도 하며, 기능학원이나 직업학교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기능학원이나 직업학교를 선택하고 그것이 썩 괜찮은 대안이라고 생각되면 그 과정을 마치고 직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업을 선택한 청소년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 때문에 검정고시를 필수적으로 치르게 됩니다. 검정고시는 시험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고, 합격률도 높은 편이며, 최근 미달사태를 겪는 대학들이 많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입 경쟁률도 낮아졌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눈만 낮춘다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자, 결국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면, 학교를 계속 다닌 것과 학교 밖에서 공부를 한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느 쪽이 '좋은'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을 높이는지는 엄밀하게 조사하거나 연구한 자료를 찾기 어려우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 더 주도적 학습이 가능한 상황인지, 더 나은 학업환경을 제공할지, 성적을 높여주는지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공부' 영역을 빼놓고 나면 두 대안의 차이점이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학교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친한 친구들의 수는 제한되지만, 재학기간 중 청소년들에게는 관계의 다양성이 보장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가능성은 늘 열려 있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는 당연히 그 가능성이 제한됩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연락하고 지내기는 하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이 일단 줄어들고, 다른 친구를 사귈 가능성은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학교 밖 청소년의 다수가 다른 학생과의 나쁜 관계 때문에 그만 두거나 적어도 친구가 학교중단을 막는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친구라는 변수가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학교 밖 청소년들이 참여한 많은 연구에서 학교중단 이후 가장 후회하는 점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이 '친구관계'입니다.
또한 학교는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된 교사라는 엄청나게 중요한 자원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기주도적 학습, 선택과 집중 전략, 그리고 '인터넷 강의'라는 대안으로 이에 맞섭니다. 또 다른 학교 밖 청소년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아쉬워합니다. 학교가 가진 다른 자원과 경험들, 그리고 그들이 언급하지 않은 맥락으로서 동문 체계와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진술에서부터 시작되는 내러티브의 단절 등도 차이점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나은 대안일까요? 케바케, 즉 사례마다 다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정답도 '어느 쪽이 더 낫다'는 답변보다는 '선택한 대안이 최선이 되도록 노력한다'가 맞을 것입니다.
학업의 길을 가지 않은 청소년들은 직업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길이 그리 빨리 넓어지거나 평탄해지지는 않습니다. 학교 중단 이후 청소년기 초기를 벗어날 때까지 다수의 학교 밖 청소년들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되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며 경험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조금씩 더 나은 일,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나갑니다. 이 과정은 추천, 소개, 검색, 알선이라는 다양한 경로로 더 풍성해지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있게도 만듭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며, 썩 괜찮은 일을 찾게 되고, 그 중에서도 일부는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할만하며, 조건도 좋은 '내게 맞는 직업'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물론 학업의 길로 들어선 이들도 정규교육 과정을 거치는 중이나 마친 후에 이 경로로 합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대체로 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 여정의 전말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아직 20대 중반의 청년 초기에 머물러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지점에서 학교중단의 영향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그 의미를 공유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립'이 혼자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갖고, 그것을 통해 부모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며, 가족으로부터도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자립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부모와 계속 같이 살고 싶고, 굳이 독립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런 삶의 방식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주로 묻는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학교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주류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거 봐, 학교를 떠나면 고생이야'라고 위로하는 척 말할 수 있는 답변을 기대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선행연구들에서는 상당수 청소년들이 학교 중단을 후회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회하는 요소들은 위에서도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구를 통해 다시 되짚어 본 학교 밖 청소년들의 심정은 '조금 후회된다. 그러나 잘 한 결정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인 것으로 보입니다. 학교 밖은 듣던 대로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와야 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학교는 계속 머물러 있을만한 공간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를 계속 다녔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더 나아졌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선택으로 그곳을 벗어나고 어떻게 되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나가는 편이 이들에게는 더 나은 선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밖 청소년들이 회고하는 학교 중단의 기억은 '시원섭섭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청소년'임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들의 여정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실제적인 지원은 필요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미 이들을 돕기 위한 지원체계는 구축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입니다. 시군구 지방자치단체 단위마다 하나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시설규모와 직원 수, 재정 규모 등이 아직 크지는 않지만, 충분히 다양한 서비스와 프로그램들을 펼쳐 놓고 학교 밖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 센터를 알고 있는 청소년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고, 학교와 교사들의 관심도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학교와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학교 밖'의 대안을 소개하는 것이 선뜻 내켜지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학교를 못 견뎌하고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청소년들에게는 미리 소개하고 학교 밖으로 나가기 전에 알아봐서 가능한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행연구들에서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지역사회에서 차별을 받거나 낙인에 가까운 시선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소개되었으나 이 연구에서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과 학교 밖 청소년을 구별하는 제도와 지원체계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며, 학교 밖 청소년을 문제 청소년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도 바뀔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청소년이 학교에 있든 학교 밖에 있든 그들의 미래와 노력을 응원해 줘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학교가 청소년을 떠나게 만드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가 공부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우리 시대와 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한 다양성과 가능성의 시공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많은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제도가 바뀌어도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학부모와 일반 사회구성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상태가 이미 편하기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심지어 방해하기까지 하는 '항상성'이라는 장애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기사의 내용은 제가 2021년에 외부연구진으로 참여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학교 밖 청소년 지역사회 지원방안 연구 Ⅳ: 질적 종단자료 심층분석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이 기사와 관련된 더 깊은 이해를 원하시는 분은 이 보고서를 찾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저는 이 종단연구 프로젝트에서 2018년부터 2020년 사이에 수집한 자료 중 일부를 사용하여 분석하고 글을 썼습니다. 2020년 당시 연구 참여자들은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이었으며, 제가 주로 그 여정을 들여다 본 학교 밖 청소년(실제로는 청년)은 9명이었습니다.
▲ 학교밖 청소년의 자립 맥락과 패턴 ⓒ 권지성
이 기사를 읽는 분 중 학교중단을 경험한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일단 공교육 제도로 진입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 끝까지' 다니는 걸로 알았지, 학교제도 밖에 다른 대안이 있다든가, 어쨌든 학교를 중단할 생각은 잘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2016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5만명 정도의 청소년이 학업을 중단하였으며, 2019년 학업중단율이 전체 청소년의 1%에 이르렀고, 갈수록 증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아주 드문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학교 밖 청소년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떠올리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도대체 학교를 왜 그만두는 거야?" 청소년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학교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는 사례의 수만큼 많지만(즉 100명이라면 100가지 사연), 제가 수행한 연구와 이전에 유사한 주제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밝혀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학교를 다니는 의미를 못 찾아서, 둘째, 학교라는 제도가 싫어서, 셋째, 학교에서 좋지 못한 일들을 겪어서 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학교생활이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싫어서, 그리고 학교폭력이나 친구 또는 교사, 학교 체계와 사이에 겪은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니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로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며, 비슷한 경험을 하는 청소년들이 모두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격발장치'라고 부를만한 사건들이 실제로 필요하거나 발생됩니다. 어떤 청소년들은 우연히 학교 밖에 다른 길 또는 더 나은 대안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다른 청소년들은 갑자기 발생한 어떤 사건(학교폭력을 미온적으로 수습하려는 교사의 태도 등)에 의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전자의 경우를 '의지'로 본다면, 후자의 경우는 '떠밀려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일부 청소년은 학교에 가기 싫어 버티다가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일이 점차 잦아지면서 어느 시점에서는 학교를 안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하위맥락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입니다. 학교를 같이 다니는 친구나 교사와 관계가 좋고 그것이 학교를 다니는 즐거움 중 하나라면 위에서 언급한 '사유'들이 쌓이더라도 계속 다닐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어떤 관계도 그 청소년을 끌어당기지 못하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만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청소년들 중 친구 때문에 그만둔 경우는 있어도 친구들과 관계 때문에 망설인 경우는 없었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대부분의 학교 밖 청소년들이 학교 중단 이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않고 그만둔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더라도 바로 그것을 실행하기는 어려운데, 계획마저 없다면 다음 여정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것을 막지는 않더라도 뭔가 준비한 뒤에 떠나도록 도움을 줄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이제 바로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퇴를 결정하고 학교 제도 밖으로 나오게 되는 순간입니다. 삶의 전환점이자 분기점이고 새로운 오르막의 출발점입니다. "학교를 그만둔 이후에 청소년들은 뭘 하면서 지낼까요?" 그것이 학교 밖 청소년들에 대해 가지는 일반 사회구성원들의 두 번째 질문일 것입니다.
위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학교 중단 직후 한동안 '무위', 즉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기간을 거친다는 공통점을 짚어두고 가야겠습니다. 이들 청소년들은 제 방으로 들어가서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기도 합니다. 그 기간은 짧으면 한 달에서 길면 일 년까지 매우 범위가 넓지만, 대체로 한 달 정도는 이어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지경이겠지만,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전환점을 앞둔 청소년들에게 이 기간은 필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별것 없습니다.' 이들은 일을 하거나 다른 형태의 교육을 받거나 상당 기간 딱히 하는 일이 없이 지냅니다.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에서는 만 15세 이상을 근로 가능한 연령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중학교 1, 2학년 시기에 자퇴한 청소년은 일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중3 정도가 되면 일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이 나이부터 만 18세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단기 알바' 정도입니다.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은 되어야 그나마 급여도 제대로 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규직의 괜찮은 일자리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 중단 이후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현실의 복잡성을 일일이 해설하기는 어려우므로 고등학교 1학년 초기에 학교를 중단한 경우를 전형적인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청소년에게는 청년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될 때까지 3년 정도의 기간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에 남아 있는 자신의 또래들에게 공교육 제도가 채우는 것들을 대신하여 그는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자신의 시간들을 채워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청소년들과 우리 자신에게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중등교육이든 고등교육이든 제도교육 체계를 떠난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마흔 살을 기준으로 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하며, 나머지 소수의 일부는 소득 없이 가족이나 다른 사람을 돌보며 살고, 다른 일부는 다른 사람이나 제도에 의존하면서 살게 됩니다. 두 번째 유형은 꼭 필요한 생활방식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그 가치를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고, 세 번째 유형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질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여하간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내려지는 결정이 학교 밖 청소년이 지나쳐가는 여정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위에 제시된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많은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어쨌든 정규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일은 반드시 대학으로 대표되는 고등교육을 마쳐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일들은 꼭 대학을 나올 필요는 없지만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더 나은 수준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기능학원이나 직업학교를 선택할 수도 있고, 그것이 답답한 고등학교 교실보다는 낫고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할 수는 있지만, 해당 직업군에서 2류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일부 청소년들은 고등학교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당분간 학업의 길을 따라가기로 한 일부 청소년들은 한동안 독학이나 홈스쿨링의 형태로 혼자서 공부를 해보기도 하고, 그것이 잘 안 되면 학원을 다니기도 하며, 기능학원이나 직업학교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기능학원이나 직업학교를 선택하고 그것이 썩 괜찮은 대안이라고 생각되면 그 과정을 마치고 직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업을 선택한 청소년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 때문에 검정고시를 필수적으로 치르게 됩니다. 검정고시는 시험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고, 합격률도 높은 편이며, 최근 미달사태를 겪는 대학들이 많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입 경쟁률도 낮아졌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눈만 낮춘다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자, 결국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면, 학교를 계속 다닌 것과 학교 밖에서 공부를 한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느 쪽이 '좋은'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을 높이는지는 엄밀하게 조사하거나 연구한 자료를 찾기 어려우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 더 주도적 학습이 가능한 상황인지, 더 나은 학업환경을 제공할지, 성적을 높여주는지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공부' 영역을 빼놓고 나면 두 대안의 차이점이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학교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친한 친구들의 수는 제한되지만, 재학기간 중 청소년들에게는 관계의 다양성이 보장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가능성은 늘 열려 있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는 당연히 그 가능성이 제한됩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연락하고 지내기는 하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이 일단 줄어들고, 다른 친구를 사귈 가능성은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학교 밖 청소년의 다수가 다른 학생과의 나쁜 관계 때문에 그만 두거나 적어도 친구가 학교중단을 막는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친구라는 변수가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학교 밖 청소년들이 참여한 많은 연구에서 학교중단 이후 가장 후회하는 점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이 '친구관계'입니다.
또한 학교는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된 교사라는 엄청나게 중요한 자원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기주도적 학습, 선택과 집중 전략, 그리고 '인터넷 강의'라는 대안으로 이에 맞섭니다. 또 다른 학교 밖 청소년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아쉬워합니다. 학교가 가진 다른 자원과 경험들, 그리고 그들이 언급하지 않은 맥락으로서 동문 체계와 어느 학교 출신이라는 진술에서부터 시작되는 내러티브의 단절 등도 차이점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나은 대안일까요? 케바케, 즉 사례마다 다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정답도 '어느 쪽이 더 낫다'는 답변보다는 '선택한 대안이 최선이 되도록 노력한다'가 맞을 것입니다.
학업의 길을 가지 않은 청소년들은 직업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길이 그리 빨리 넓어지거나 평탄해지지는 않습니다. 학교 중단 이후 청소년기 초기를 벗어날 때까지 다수의 학교 밖 청소년들은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게 되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며 경험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조금씩 더 나은 일,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나갑니다. 이 과정은 추천, 소개, 검색, 알선이라는 다양한 경로로 더 풍성해지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있게도 만듭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일부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며, 썩 괜찮은 일을 찾게 되고, 그 중에서도 일부는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좋아할만하며, 조건도 좋은 '내게 맞는 직업'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물론 학업의 길로 들어선 이들도 정규교육 과정을 거치는 중이나 마친 후에 이 경로로 합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대체로 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 여정의 전말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아직 20대 중반의 청년 초기에 머물러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지점에서 학교중단의 영향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그 의미를 공유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자립'이 혼자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갖고, 그것을 통해 부모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며, 가족으로부터도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자립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부모와 계속 같이 살고 싶고, 굳이 독립을 원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런 삶의 방식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주로 묻는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학교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주류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거 봐, 학교를 떠나면 고생이야'라고 위로하는 척 말할 수 있는 답변을 기대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선행연구들에서는 상당수 청소년들이 학교 중단을 후회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회하는 요소들은 위에서도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구를 통해 다시 되짚어 본 학교 밖 청소년들의 심정은 '조금 후회된다. 그러나 잘 한 결정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인 것으로 보입니다. 학교 밖은 듣던 대로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와야 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학교는 계속 머물러 있을만한 공간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를 계속 다녔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더 나아졌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선택으로 그곳을 벗어나고 어떻게 되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나가는 편이 이들에게는 더 나은 선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밖 청소년들이 회고하는 학교 중단의 기억은 '시원섭섭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청소년'임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들의 여정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실제적인 지원은 필요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미 이들을 돕기 위한 지원체계는 구축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입니다. 시군구 지방자치단체 단위마다 하나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시설규모와 직원 수, 재정 규모 등이 아직 크지는 않지만, 충분히 다양한 서비스와 프로그램들을 펼쳐 놓고 학교 밖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이 센터를 알고 있는 청소년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고, 학교와 교사들의 관심도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학교와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학교 밖'의 대안을 소개하는 것이 선뜻 내켜지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학교를 못 견뎌하고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청소년들에게는 미리 소개하고 학교 밖으로 나가기 전에 알아봐서 가능한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행연구들에서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지역사회에서 차별을 받거나 낙인에 가까운 시선을 경험한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소개되었으나 이 연구에서는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과 학교 밖 청소년을 구별하는 제도와 지원체계는 개선되어야 할 것이며, 학교 밖 청소년을 문제 청소년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도 바뀔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청소년이 학교에 있든 학교 밖에 있든 그들의 미래와 노력을 응원해 줘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학교가 청소년을 떠나게 만드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가 공부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우리 시대와 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한 다양성과 가능성의 시공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많은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제도가 바뀌어도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학부모와 일반 사회구성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상태가 이미 편하기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심지어 방해하기까지 하는 '항상성'이라는 장애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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