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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시는 사랑하는 아내와 남겨질 사람에게 바치고 싶다"

[인터뷰] 모진 병마를 이겨내고 있는 이건화 시인의 '나의 삶 나의 사랑'

등록|2022.06.01 17:53 수정|2022.06.01 17:57

모진 병마를 이겨내고 있는 시인 이건화 선생. ⓒ 최미향


류마티스관절염, 허리협착증, 안면신경마비, 혈액투석, 신장이식, 전립선암 2기가 시인을 덮쳤다. 41년의 교직 생활을 끝으로 제2의 삶을 시인으로 살아가는 전)차동초등학교 이건화 교장. 그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봄바람은 품으로 기어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때아닌 추위가 심술을 부렸다.

바람을 뚫고 시인의 서재에 들어섰다. 묵묵히 정도를 걷는 시인의 방에는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고, '추억의 옛집'이란 시화가 책장 앞에 비스듬히 세워져 필자를 반겼다. 시인의 아내도 기자를 반겼다. 5월 스승의 날에 맞춰 화려한 꽃다발이 거실 중간에 놓여있었고. 시인의 아내는 "스승의 날이라 제자들이 보내온 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 시인님 반갑습니다. 소중한 시집은 잘 읽고 있습니다. 한때는 교직에 몸담으며 사셨습니다. 올해 81세이시면 태어날 당시 격동의 세월을 사셨을 텐데 어릴 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광풍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1942년,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징병제가 시행되어 무고한 사람들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부녀자와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던 비통의 해였다.

나는 그해 2월 6일 여동생만 6명인 맏이로 태안군 안면읍 중장리 못자리골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은 아들 하나를 더 두고 싶은 마음에 막냇동생 이름을 '딸 그만'으로 지을 정도로 아들 하나를 아쉬워했다.

우리집은 농촌에서 살아도 배움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의 가정이었다.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잘 돼야 동생들도 잘 된다는 생각으로 나를 안면도 중장 산골 안중국민학교와 서산중학교, 홍성고등학교, 공주교육대로 유학을 보내셨다. 심지어 아버지 형제가 3형제였는데 막내 숙부님도 대학교에 다닐 정도로 부모님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시인 이건화 선생의 서재에서. ⓒ 최미향

 
- 학창시절에 특별히 추억할 만한 것이 있다면요.

당시 안면도 노선버스는 후생사업 일환으로 버스 대신 트럭 지붕에 포장을 친 형태가 노선버스를 대신했다. 1956년 서산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매주 토요일 버스를 타고 안면도 백사장에서 집까지 4km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다녔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고장이 잦아 자갈밭 도로를 자주 걸어 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내릴 때면 백사장과 신온을 오가는 나룻배 노(盧)사공님의 불호령이 무서워 꼼짝도 못 하고 덜덜거리며 그리운 부모님 품으로 달려갔던 일이다.

또 기억나는 건 황톳길이었던 서산중학교 앞 도로에 매일 등하교하면서 돌멩이 2개씩을 들어다 깔았던 일이었다. 3학년 때에는 앞산에서 소나무를 캐어 운동장 가에 심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외동아들이다 보니 멀리 보내기가 불안했던 부모님은 나를 홍성고등학교로 보냈다.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한창 학업에 매달리던 고교 2학년 때였다.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 3학년 간부 학생들 주도로 전교생이 강당에 모였고 그것이 교장 선생님과 몇 분의 선생님들을 퇴출시키는 데모였던 걸 잠시 후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계시는 숙부님의 영향으로 공주교육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됐다. 입학 당시는 2년제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4년제 공주교육대학교로 변경됨에 따라 야간 2년을 더 다녀 학위를 받았다. 다시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으면서 학업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다.   - 집안에 외동아들로서 상당히 고민도 컸을 것 같습니다. 청년이 되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었을까요?
외아들로 조부모님, 부모님, 6명의 여동생을 생각하니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특히 조부님께서는 잔칫집에 다녀오시면 나를 주기 위해 주머니에 담뱃재가 묻어 있는 줄도 모르고 떡을 넣어와 내게 줄 정도였다. 하지만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셨다. 더러는 벽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벌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어느날 돌아가셨고, 아버지께서도 54세에 돌아가시면서 홀로되신 어머님을 모셔야 했다. 또 아직 출가하지 않은 여동생들의 혼사 문제도 내겐 버거움의 대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그만 염전에서 나던 소금값이 너무 헐값이라 팔리지 않는 것도 내겐 고민의 대상이었다. 이리저리 장남으로서의 고민이 많았던 때가 바로 청년 시절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도서관에서. ⓒ 이건화


- 예전에는 교사가 되는 게 그래도 좀 수월했습니다. 그 시절 얘기를 들려주세요.
당시는 선생님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죽했으면 고등학교 졸업생 중 교사양성소 과정을 거쳐 교사로 임용된 사례도 있을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태안 통합이다 보니 내 모교인 안면도 안중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1년을 근무하고 군에 입대했다. 사실 군 복무를 빨리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야 어머니와 동생들을 챙길 수 있었는데 운이 없었든지 제대 무렵,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으로 거의 3년간 복무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때맞춰 돌아가더라. 학교에 복직하면서 또래 선생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 나이 서른에 결혼식을 올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부부가 교사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도 깊었던 것 같다.

차동초등학교 제18대 교장을 끝으로 2006년 2월 28일 퇴임하면서 황조근정훈장(黃條勤政勳章)을 받고, 41년의 교직 생활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건화 시인이 출간한 시집 두 권. ⓒ 최미향


- 벌써 두 권의 시집이 탄생했습니다.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셨나요?
퇴직 후 특별히 할 일이 마땅치 않아 2009년부터 평생학습센터에 개설된 시(詩)공부를 하게 됐다. 막막하던 시 공부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하던 차 들꽃시동아리 창간호 '바람이어라'가 출간됐다. 그 후 지금까지 꾸준히 교육을 받아 오면서 올해 '들꽃시문학회'로 바뀌어 제12호를 발간할 예정이다.

그밖에도 다양한 매체에서 시 봄소식', '새천년 비자나무 같은 어머님', '우수 날 수목원', '그때 그 여름', '서산 지명유래비' 교체에 대한 글을 싣는 등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그리고 2015년 4월 화백문학에 등단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문인협회 서산지부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지난 14일부터 서산 중앙호수공원에서 시화전이 열렸다. 이밖에도 방선암시우회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시집 '보낼 곳 없는 편지'와 '격렬비열도'가 나왔습니다. 건강이 많이 안좋아 보이시는데...
투병 생활을 하면서 내 삶의 궁기를 베껴 적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때는 육신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좋았다. 하나둘 싸여가던 중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리움을 묶어 한 권의 시집으로 엮었고, '보낼 곳 없는 편지'의 시집은 어머니 영전에 부끄럽게 바쳤다.

우리 어머니는 자식 7남매만을 보며 홀로 41년을 살아오신 분이시다.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항상 내 곁을 지켜주실 것만 같았던 어머니. 하지만 한가위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어느날, 아흔셋을 일기로 아버지 계신 천국으로 떠나셨다.

유대인 속담에 '신을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드셨다'고 했다. 그 어머니가 떠나던 날, 많은 조문객이 문상을 오셨다. 그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어머니를 그리는 글들이 시집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시집은 우리 나이로 80이 되던 2021년,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격렬비열도'가 탄생했다. 안면마비 31년, 혈액투석 4년, 신장이식 후 16년의 세월을 보낸 고맙고 미안한 아내에게 가장으로서 바치고 싶은 고백이었다. 더 열심히 투병 생활하면서 반백 년 함께 한 아내와 더불어 남은 세월 이 세상 끝까지 보람된 삶을 꾸려나가자는 약속의 글이었다.

- 힘든 시간을 건너고 계시군요. 만성신부전증으로 4년간 혈액투석을 하다 큰따님으로부터 신장을 이식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건강을 생각하면 좋지 않은 자랑거리가 참 많다(웃음). 젊었을 때는 류마티스관절염으로 봄가을 무릎에서 물을 뺐다. 허리 협착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1991년 2월에는 안면신경마비가 찾아와 지금까지도 완치가 되지 않고 있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신장에 이상이 생겨 4년간 혈액투석을 하다가 2006년 4월 큰딸의 신장을 이식받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2016년 12월에는 삼성서울병원에서 새 생명 10주기 기념패를 받기도 했다. 지난 4월 26일이 새 삶을 산 지 만 16년이었다. 앞으로 잘 관리해야 큰딸에게 덜 미안할 것 같다.

병마는 참 끈질기게도 나를 옥죄인다. 이것도 모자라 전립선암 2기로 작년 12월 21일 수술을 했다. 하나 소변이 제어가 안 된다. 지금도 기저귀를 차는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부디 내 이야기를 반면교사 삼아 건강 챙기시길 기원한다.
 

해미읍성축제때 난타 공연을 하며. ⓒ 이건화


- 늘 건강 잘 챙기세요. 연세가 드시면서 보람 있는 일이 있다면요?
퇴직 후 '스산 야생화 보전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부춘산 옥녀봉 올라가는 입구에 야생화 동산을 만들어 매년 잘 가꾸어 시민들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서부평생학습관, 해미읍성 등에서 전시회를 열 때마다 장소 문제가 늘 화두가 됐다. 그러다가 2013~2014년 동안 내가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음암면 유계리 정순왕후 생가(한다리)에서 희귀하고 예쁜 꽃들과 분재, 석부작 등을 전시하게 됐다. 이를 보기 위해 많은 관람객과 사진작가들이 내왕했다. 덤으로 정순왕후 생가와 계암고택(옛날 한옥)을 볼 수 있는 색다른 볼거리가 생겨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셨다.

또 하나는 난타 공연이다. 서산시사회복지관에서 2009년 하반기부터 주 1회 난타를 배웠다. 이를 계기로 노인의 날 행사, 복지관 수료식 등에 공연했고, 해미읍성 축제에 식전행사로 여러 해 동안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KBS 아침마당 대전방송 생중계와 함께 해미읍성축제에 참가하여 어린 학생들과 어울려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때가 어쩌면 제2의 전성기였을지도 모르겠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살아온 세월이 보통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운 좋게도 좋은 분들을 만나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병마로 시달리는 나를 위해 30년 넘도록 옆에서 묵묵히 지켜준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미안감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건강해야 한다. 첫 번째도 건강이고, 두 번째도 건강이다. 그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야 올바른 사회생활이 된다. 앞으로도 나는 항시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남은 세월 아내와 함께 삶의 풍파를 잘 건너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끝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한 글을 소개하려 한다. 소경 이기헌 선생님께서는 교육계 대선배님으로 현재 90세 중반이다. 몸이 불편하면서도 우리들의 귀감이 되는 분께서 지난 4월 7일 우편으로 한시 한 편을 보내주셨다.

아랫글은 나와 내 처가 받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송구스러운 글이다. 특히 내가 전립선암 2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몇 차례 안부 전화를 주시더니, 민망스럽게도 병간호를 하는 아내를 위해 힘내라고 글을 보내주셨다. 정말 고맙다.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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