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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청'이 뭐라고... 50대에 처음 입어봤습니다

안 해 본 일을 함께 도모할 친구들이 있다는 것, 든든합니다

등록|2022.06.06 11:36 수정|2022.06.06 11:36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언젠가부터 치마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아담한 키(순전히 내 기준)를 가진 내가 롱스커트를 잘못 입었다간 이불을 두르고 허우적대는 모습인지라 젊은 날엔 되도록이면 삼갔던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젠 치마가 무릎에 살짝 걸치기만 해도 불편하다. 무릎이 보이면 왠지 가리다 만 맨몸이 드러난 듯 낯부끄럽다.

이런 내게 큰(?) 도전 과제가 생겼다. 미루고 미루던 친구들과의 1박 2일 여행이 마침내 실현될 시점이 도래하면서부터였다. 50대 언저리 4인방 친구들과 드디어 숙박 여행 일정을 잡은 것이다. 언젠가 바다 건너 여행을 가자며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여행 비용을 모았는데 코로나가 길어지니 돈이 쌓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족 여행을 함께 간 적은 있었지만, 남편과 자식들 없이 우리들끼리만 하룻밤을 묵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마와 아내라는 명함을 떼고 오로지 우리 네 여자들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춘 여행이라니! 소풍을 앞둔 학창 시절처럼 설렜다. 온갖 가족, 지인을 챙기느라 통장도 마음도 휑해지는 5월의 끝자락에 여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우리들만의 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올해 5월은 특별했다.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 그런데

이 특별한 여행에 밋밋한 콘셉트라면 심심했을까. 한 달 전부터 여행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친구가 여행 2주일을 앞두고 이런 제안으로 우리를 긴장시켰다.

"놀러 갈 때 드레스코드 맞추면 어때? 콘셉트는 '노출'로!"

한 친구가 던진 돌멩이에 나머지 새가슴 중년 소녀들의 마음 호수는 거대하게 출렁였다.

"아이고, 노출은 부담이..."

한 살 어린 후배가 먼저 발을 뺐다.

"나도."

남은 친구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무릎만 나와도 덜 입은 느낌인데 '노출'이라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단어였다.

그런데 희한하게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지는 게 말인가 보다. 나보다 더 '샌님' 같던 친구가 건넨 과감한(?) 제안을 그냥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끼린데 왜 안돼?' 반문으로 시작해 이 나이에도 욕먹지 않을 정도의 노출에 대해 구상해 보게 되었다. 영화에서 본 여배우처럼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뭐란 말인가.
 

▲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찢청 정도의 노출은 감행해 볼 만하다 싶었다. ⓒ 오마이뉴스


이런 내게 지인이 '찢청(찢어진 청바지)'을 권해 주었다. 오, 찢청의 세계가 있었구나! 50이 다 되도록 찢어진 청바지를 입어본 적이 없다. 찢청은 내게 '도대체 왜 일부러 돈을 주고 찢어진 바지를 사는지 모를 이상한 옷'이었다. 찢어진 곳을 수선해 입을 줄만 알았던 내게 일부러 찢어 입는 옷이 받아들여질 리가.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찢청 정도의 노출은 감행해 볼 만하다 싶었다. 그래도 여행 때 말고 찢청을 또 입을 날이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일회성 제품에 돈을 지불하기엔 아까운 생각에 중고 거래 쇼핑몰을 뒤적였다. 여행 후 더 이상 안 입을 거라 생각하니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먹었다. 여행 후에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사기로.

친구들도 나름 고민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친구들이 단톡방에 공유한 쇼핑 정보에 웃음이 절로 났다. 노출 의상을 제안했던 친구가 주문한 어깨 트임 티를 받았는데 입어보니 포승줄에 포박당한 것 같더라는 말에 단톡방은 자지러졌다.

여행 당일, 친구들이 도대체 어떤 옷을 입고 등장할지 잔뜩 기대하며 만났는데... 이게 뭐람. 친구들의 의상이 너무, 지나치게 '정상'이었다. 어깨 트임이 살짝 들어간 면티를 입고 그것도 내어놓기는 부끄러워 재킷을 걸치고 찢청을 입은 내 의상이 그중 가장 과감한 노출이었다면 말 다한 거다.

'포승줄에 포박당한' 의상을 구입한 친구는 차마 입지는 못하고 가방 속에 챙겨 왔다. 다른 친구도 목이 조금 넓게 파였으나, 전혀 노출스럽지 않은 블라우스를 가방에 준비해 왔다. 뒤트임이 조금 있는 윗옷을 입은 후배가 그나마 약간의 노출이라면 노출이었을까. 그것도 후배가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이내 겉옷에 가려지고 말았지만. 그렇게 친구들의 노출 의상은 가방 속에 담겨왔다 숙소에서 잠시 구경하고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만 있다면

불현듯 고3, 여고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도 한 번 '땡땡이'를 쳐 보자며 하루는 친구와 둘이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야자(야간 자율학습) 시간 전에 가방을 모두 챙겨두고 쉬는 시간에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학교 현관문 앞에서 접선한 후 빠져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탈' 계획이었다.

그렇게라도 고3 수험 기간에 숨통 트일 추억 하나 만들어 보자 했었는데... 나 먼저 몰래 빠져나와 학교 건물 앞 계단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5분, 10분...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계단에 앉아 책을 꺼내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참 후에 친구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뛰어나왔다. 선생님께 잡힐까 무서워 나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기다릴 나를 생각하니 공부도 못하고. 딱 죽겠었다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던 그 친구. 덕분에 우리들의 고3 땡땡이 추억은 날아갔지만, 졸업 후 오래오래 우린 그날을 기억에서 소환하여 웃곤 했다.

고3 때처럼 우리들의 노출 드레스 코드 여행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할 수는 없겠다. 언제나 내 안에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여행을 기다리던 날들 속에서 우리들이 나누었던 이야기와 쇼핑 목록은 즐거운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다. 노출 의상보다 더 과감하고 찐한 여자들의 우정이 무엇인지 1박 2일 동안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빈약한 중년의 몸이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50 평생 안 해 본 일을 함께 도모할 친구들이 있어 마음 든든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적인 장소에서 '찢청'을 입을 수 있을 만큼 조금은 융통성이 생긴 건 덤이다.

모임 후배가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고 함께 사진을 찍는 게 버킷리스트란다. 누군가의 버킷리스트를 함께 해 보는 것도 중년의 삶이 주는 또 다른 행복일 테다. 그런데 후배 말대로 우리가 한복을 입었다간 자식 결혼식 복장이 될 수도 있으니, 개화기 복장이 어떻겠냐고 물어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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