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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시 '다부원에서', 내 소설의 창작 배경이 되다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56화 저승 가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 (4)

등록|2022.06.03 20:41 수정|2022.06.03 20:41

▲ 만년의 지훈 조동탁 선생. 1973년 일지사에서 펴낸 <조지훈 전집>에서 촬영. ⓒ 일지사


고교시절 조지훈의 〈승무〉를 배우면서 경이로움에 빠졌다.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시선(詩仙)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시를 토해낼 수 있으랴.

대학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 때 지훈 선생이 먼저 막걸리 한 바가지를 들이켠 다음 신입생 모두에게 돌렸다. 나는 그 막걸리를 호기 있게 마셨는데, 눈을 떠보니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선생은 강의 시간 중 때때로 당신 시집을 펼치시고는 굵은 저음으로 낭독했다.
 
……………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 다부원(多富院)에서
  

▲ 스승의 생가를 찾아가다. 경북 영양 조지훈 생가 마루에서 친구 민병기(오른쪽) 교수와 함께. ⓒ 박도


내 작품의 배경이 되다

그때 받은 감동과 영감이 반세기 동안 줄곧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나의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창작 배경이 됐다. 나는 이즈음 선생의 시 가운데 〈병에게〉를 좋아한다. 병을 향한 속삭임에는 달관한 삶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 병에게

나는 또 선생의 산문 〈지조론〉을 좋아한다.
 
지조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신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조지훈 전집>을 서가 맨 앞에다 꽂아두고 이따금 선생의 음성을 듣는다. 저승에 가서 행여 선생님을 뵐 수 있다면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6.25전쟁 사진과 졸작 <전쟁과 사랑>을 보여 드리면서 당시 종군하셨던 뒷이야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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