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바람막이가 되리라"

[인터뷰] 서산 출신 시흥시 함현상생종합복지관 김수현 관장

등록|2022.06.15 10:08 수정|2022.06.15 15:11

서산출신 시흥시 함현상생종합복지관 김수현 관장. ⓒ 최미향


"나는 출퇴근길에 인천대교를 건넌다. 매일 오가는 길이지만 나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매일 다르며 출퇴근길이 설레고 즐겁다. 어느 날 안개가 자욱한 날은 건물과 아파트가 반만 보이며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며 화창한 날에는 하늘이 그림을 그려놓은 듯 미술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매일 출퇴근하며 내가 천직이라 생각하며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와 입 밖에서 오물거렸다. 일한다. 공부한다. 외동딸에게 제대로 따뜻한 밥도 못해 주고 놀아주지도 못해 미안했다. 그런데 그때 엄마의 부재를 현재 딸과 함께 살며 갚을 수 있어 감사하다."


서산 출신 경기도 시흥시 함현상생종합사회복지관 김수현 관장의 '성장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 13일, 그를 만나 이야기 나눴다.

- 늦깎이 나이에 학위를 마치고 사회복지사가 됐다. 첫 출근했을 때의 마음가짐은 어땠나?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사회복지사가 되어 서산시사회복지협의회의 사무국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첫 출근하는 날 그때의 벅찬 마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무실 앞 커다란 느티나무 네 그루를 보며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바람막이가 되리라 다짐하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현장에서의 사회복지는 참 흥미로웠다. 그리고 참 실망스러웠다. 난 흥미로움보다 실망스러움으로 이직을 선택했다. 새로운 아동생활시설은 나를 사회복지인으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으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당진시건강가정지원센터 사업성과보고회. ⓒ 최미향


- 성남보육원에 근무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면 들려달라.
"아이들과의 생활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지며 입가에 웃음이 고인다. 그리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느날 밤 새벽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기 파출소입니다.' 아동학대로 신고가 들어왔다고 파출소로 나오라고 했다. 연락을 받고 가보니 보육원 아동이 쓰레기봉투를 입고 때국물이 줄줄 흐르며 눈물범벅이 되어 앉아 있었다.

'OO아 어떻게 된 거야' 물으니 아이는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경찰분이 말씀하시길 학교 운동장에서 늦은 밤에 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이 쓰레기봉투를 입고 구령을 외치며 운동장을 뛰는 모습을 보고 신고를 했단다. 그날은 무척 더운 8월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감독 선생님에게 어떻게 아이를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물으니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와 샤워를 시키고 감자탕 한 그릇을 사 먹이고 난 후 보육원으로 귀원하였다. 부모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이들 잘못이 아닌데 편견과 차별 속에서 상처가 가득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누가 감히 알겠는가?

지금도 아동생활시설에서의 수없이 많은 사연과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속내로 남아있다. 지식이 부족하니 아이들의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고 대변해 주지 못해 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신보건분야의 인권 강사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법학과에 편입하여 4학년에 잠시 내려놨다. 아이들은 나를 성장시킨 멘토이기도 하다.

정서발달장애아동, 느린학습자(경계선 아동)를 '학교의 학급 평균을 내리는 대상'으로 만드는 학부모님들이 순수한 동심을 갈라놓았다. 그 반면에 편견 속에서도 아이들을 인정해 주고 잠재된 능력을 알아봐 주는 우리 후원자님들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 밝게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한 지역사회구성원으로 자기 몫을 잘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대견하다.

두 번째 이직을 했다. 당진시건강가정지원센터장으로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중점적으로 하면서 보육원 아이들을 더 많이 생각했다. 건강한 부모님과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했더라면, 사랑이 많은 부모님이 계셨으면 어땠을까."

- 이직을 하고 다시 학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나는 26세에 보건 공무원으로 재직을 하고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사업하는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3개월 만에 약혼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눈에 서로가 콩깍지가 씌었었다. 결혼 후 바로 허니문 베이비가 생기고 남편을 도와 함께 사업을 하기 위해 직장을 퇴사했다.

사업장에서 남편과 있으니 의견 충돌로 인한 말싸움이 많았다. 출산하고 아이까지 돌보는 것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즈음 나는 생각했다.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그래야 다시 사회인으로 취업을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EBS 교재를 구입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31살 수능 당일, 해가 떠오르기 전에 수능을 보기 위해 서산여고로 향했다. 고3들과 함께 수능을 보게 되었다. 교실을 찾아내 자리를 찾으니 맨 앞자리였다. 가슴이 터질 정도로 요동을 쳐댔다. 긴장된 마음으로 차분하게 수능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책을 읽고 신문을 열심히 탐독한 것이 언어영역에 도움이 됐다. EBS 교재로 공부한 것이 적중했다. 나는 그렇게 대학의 문턱을 넘어 입학을 했다.

사람은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친정아버지의 가르침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우리 아이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나도 대학원(사회복지 전공)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열심히 했던 결과였다. 대학 공부를 하면서 남편과의 갈등은 더 깊어갔다. 물론 학비 지원을 못 받았다. "네가 선택한 공부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 한마디뿐, 그래도 반대 안 하는 것만도 고마웠다. 친정에서 도와주고 방학에는 둘째 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타 지역으로 갔다.

셋째 언니 집에 얹혀살며 핸드폰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아르바이트, 기사식당 설거지 등 다양한 곳에서 열심히 학비를 벌었다. 학자금 대출도 받으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래야 '남편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다'라는 다짐으로. 나의 인생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죽음 및 장묘문화의 인식'에 관한 연구주제로 45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수현 관장. ⓒ 최미향

- 39살에 다시 취업에 성공했고 박사학위에 도전했다. 일과 학업의 병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텐데.
"물론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지만 사회복지현장에 있다 보니 나의 부족한 복지공부를 채우기 위해 박사학위를 이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부터 밤, 주말까지 일하고 공부하며 <죽음 및 장묘문화의 인식>에 관한 연구주제로 45세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대학에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다.

아이들과의 하루하루는 전쟁이었다. 아이들은 매일 새롭게 창조하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해결해보라는 숙제를 남기기도 했다. 정말 대단하고 재능이 많은 아이들이다. '공부를 가르치자'며 선생님들과 함께 또 한 번 도전을 했다.

목표는 대학이었다. 주위의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긍정의 변화를 보이며 자존감을 높여갔다. '그래, 매일 창조하는 아이들이 해냈어. 그래, 잘했어'라며 스스로 만족했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딱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은 이런 쉬운 방법을 왜 몰랐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나는 무척 바쁜 일상에서 자전거 페달을 하루라도 돌리지 않으면 넘어지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며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그 힘듦을 극복하기 위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기 위해,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아이들의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다시 대학원에 입학하여 심리치료학을 공부하였다."
 
- 사회복지현장을 경험하고자 다시 이력서를 제출했다. 과정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고 믿었다. 다양한 사회복지현장에서 복지를 배우고 싶어 세 번째 이직을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다시 나의 주거지로 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사회복지 현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차 서류심사 합격하고 면접일 통보 받고 기대감을 가지고 면접 보러 간 기관에서 '한 명이라 재공고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래, 나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사회복지사를 채용하지 않는 이 기관이 손해지'라고 오만함으로 자신을 스스로 위로했다. 하지만 허탈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나를 알아주는 곳을 찾아 이력서를 작성하며 여러 사회복지 기관에 접수하였다. 몇 군데에서 '1차 서류심사 합격했으니 면접시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시험을 보러 가서야 나는 너무 놀랐다. 나 같은 사회복지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합격 통보는 없었다.

며칠이 지나 포기할 때쯤 시흥시의 한 기관에서 1차 서류심사 합격했으니 면접 보러 오라는 통보를 해왔다. 이번에는 꼭 합격하리라는 굳은 마음으로 면접시험에 임했다. 법인 인사위원회의 1차 면접시험 2명이 합격, 2차 이사회 면접시험을 보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어찌 그리고 길고 만감이 교차하던지...

불안했다. 합격통보가 올까 간절했다. 함께 면접시험에 오신 분이 대단해 보였다. 나보다 경험도 많은 듯하고 월등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합격! 뛸 듯이 기뻤다. 나는 해냈다."
  

겨울나기 김장나눔. ⓒ 최미향


- 힘든 시간을 거치고 시흥시함현상생종합사회복지관 관장으로 취임했다.
"2020년 11월 5일이다. 시흥시함현상생종합사회복지관에 관장으로 취임하였다. 사회복지의 최고라고 생각한 종합사회복지관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회복지를 실천한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동안 다양한 경험과 복지 지식을 바탕에 두고 직원들과 회의를 거치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사업 '커뮤니티케어'였다. 또 방역지침에 따라 비상운영체계로 전환하여 지역의 어르신과 독거노인들에게는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로 하루 안부를 확인하며 소외된 사회계층 및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대상자들에게 복지서비스를 전달하였다.

2021년 해가 바뀌면서 복지관은 더 활기차고 직원들은 자신감이 커졌다. 여러 기관에 공모사업을 하며 장기간의 코로나19에도 대면 사업과 비대면 사업을 하며 사회복지사로서 성취감을 맛보는 열정을 보여줬다.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발달장애인 활동서비스센터를 개소하는 등 경기도 어르신 즐김터, 신중년커리어프로젝트, 느린학습아동 지원사업, 마음결심리발달센터, 시흥시무한돌봄센터, 노인맞춤돌봄서비스, 경기도서민금융복지센터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의 사업 확장으로 큰 성과를 가져왔다.

2021년 지역사회서비스 품질평가 전국 상위 A등급 중 상위 10%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뤄 우수기관 현판, 인센티브지원, 보건복지부 장관상도 받았다. 시흥시의 위상을 높이고 지역주민들에게 복지사업을 인정받아 시흥시 시장상을 수상하였다. 1년 6개월 만의 성과이다.

또한, 사회공헌활동으로 한마음혈액원과 협조하며 전 직원 단체헌혈 동참, 시흥시 1% 복지재단에 전 직원 급여의 1% 후원을 실천하고 있다. 2022년도 직원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또 한 번의 쾌거를 이루기 위해 지역주민들과 더불어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
 

2021년 연간사업평가회에서 단체 기념촬영. ⓒ 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대전지방법원·대전가정법원 서산지원 가사 민사 조정위원, 공주시의료원 이사, 송암동산 이사, 한국노년교육학회 이사, 시흥시사회복지협의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네 번째의 이직이 찾아온다면 나는 나의 거주지인 서산시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