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만에 찾은 할아버지의 6.25 참전증... "자랑스럽습니다"
분투 끝에 3개월 만의 결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은 나의 할아버지, 김형배 이야기
1박 2일 여행으로 노곤해진 몸을 이끈 채 집에 돌아와보니 한 통의 소포가 와 있었다. '서울남부보훈지청'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가유공자 증서 : 故 김형배 (1930.2.1)'
바로 할아버지의 6.25 참전유공자 증서였다. 할아버지가 입대한 해가 1952년이니 정확히 70년 만에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은 것이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지 3개월 만의 결실이기도 하다.
그동안 할아버지의 6.25 참전유공자 등록을 위해 국방부·국가보훈처·병무청·상도4동 주민센터 등 여러 기관의 문을 두드리며 뛰어다녔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기록의 부재와 불일치 등으로 좌절할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아직 생존해계신 할머니의 증언 등을 토대로 끈질기게 매달린 결과, 오늘의 결실을 맛보게 됐다. 마침 또 6월 25일을 앞두고 소식을 접하게 되어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
사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비롯해 아버지나 친척들 모두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준 바가 없어, 내겐 할아버지가 남보다 더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다만 6.25 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참전유공자 신청을 했으나 이를 증명할 기록이 없어 반려되는 바람에 끝내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말만 듣고서 '기록이 없어서 안 되나 보다' 하고, 다시 시도해 볼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있었다.
현재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나는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주제로 석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논문을 쓰며 해당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만나 인터뷰할 일이 많았다.
나에게서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듣고 기뻐하는 후손들에게 나는 "우리 할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참전하셨는데도 기록이 없어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선생님의 할아버님은 일찌감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셨고 자료도 많이 남아있으니, 이제부터라도 관심 갖고 선양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당부한 바 있다.
그들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리 할아버지도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남은 흔적들... "성함이 일치하지 않네요"
쉽지는 않았다. 1차적으로 아직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께 할아버지의 6.25 참전 사실에 대해 여쭤봤으나, 전쟁 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을 뿐더러 관련 기록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막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무청의 문을 두드렸다. 병무청에서는 할아버지의 군번을 알아야 참전사실 조회가 가능하니 인근 주민센터에 가서 군번이 기록된 '구원장(개인별 주민등록표)'이라는 걸 발급 받으라고 안내해줬다.
그래서 인근 주민센터를 찾아 구원장 발급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구원장이 조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담당 직원은 어떻게 해서든지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아주기 위해 1시간 넘게 전화기와 컴퓨터를 붙들고 고군분투했으나, 없는 기록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운 대로 우선 '제적등본'을 발급받았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제적등본을 통해 증조할아버지의 성함이 '김범(金範)'이란 것과 할아버지의 생년월일(주민등록번호상)이 '1930년 2월 1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제적등본을 가지고 이번엔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다. 민원을 이첩 받은 육군본부 담당자는 "전쟁 당시에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었기 때문에, 군번을 모르면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이어지는 담당자의 답변에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할아버님과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인물이 있는데, 증조할아버님의 성함이 일치하지 않아서 동일인물이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할머님께 증조할아버님의 성함과 할아버님의 입대 당시 거주지 등을 다시 확인해보세요."
마침 얼마 뒤에 증조할아버지의 제사가 있었다. 제사를 위해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그 결과 증조할아버지의 다른 이름(異名)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확인한 제적등본상의 증조할아버지 성함은 분명 김범이었는데, 할머니는 '김흥수'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또 할아버지가 입대할 당시의 거주지가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라는 것도 확인했다.
날이 밝자마자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다시 육본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얘기를 들은 직원은 잠시의 침묵 뒤 말했다.
"아, 이 분이 맞네요. 김흥수의 자(子), 김형배. 입대 당시 거주지도 맞습니다. 할아버님께서 6.25 전쟁에 참전하신 걸로 확인됩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맞다는 담당 직원의 답변에,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의 감정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드디어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병무청으로부터 할아버지의 '병적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 병적증명서와 함께 6.25 참전유공자 등록신청서를 제출한 지 꼭 한 달만에 대통령 명의의 국가유공자 증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공문이 집으로 날아온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자유수호를 위해 헌신하신 고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귀하께서 국가(참전)유공자로 신청하신 故 김형배 님에 대해 관련 규정 및 제출서류 등을 검토한 결과,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제3조(참전유공자) 적용대상자로 결정하였음을 안내드립니다."
기쁘지만 한편으로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관심을 갖고 노력했으면 좀 더 일찍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아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지금까지 이리도 무심했을까.
사실 나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유해발굴병 출신으로 군 생활하는 동안 6.25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임무를 수행한 바 있다(관련 기사: "북한서 전사한 오빠를 찾아주세요"... 가슴 먹먹한 전화). 그런데 정작 우리 할아버지의 명예 찾기에는 뒷전이었던 셈이다.
역사를 공부한답시고 남의 조상 선양에는 앞장서면서 당신의 명예 찾기에는 뒷전인 손자놈을 보면서 지하의 할아버지께서도 많이 서운해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늦게라도 할아버지의 한(恨)을 풀어드렸으니 이제는 못난 손자를 용서해주시리라 믿는다.
"할아버지,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할머니의 증언과 군에 존안 중인 기록을 토대로 나의 할아버지 김형배(金亨培)의 군 시절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는 전쟁 발발 전 입대해서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았다(군 기록상으로는 1952년 4월 9일 입대한 것으로 나옴). 6.25 전쟁 발발 후 강원도 최전방으로 배치됐다. 군 생활 동안 1훈련소-2보충대-미 45사단-3보충대-505수송육로운용단 등을 거쳐 1956년 6월 11일 전역했다. 군번은 8818546. 최종 계급은 일등중사(現 하사)였고, 주특기는 운전병이었다.
여기까지가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긴 했으나 할아버지의 군 생활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갈증이 남아있다. 혹시 이 기사를 보고 할아버지의 군 생활을 증언해주실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연락 부탁드린다.
일부러 할아버지의 6.25 참전유공자 선정 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혹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6.25 전쟁에 참전했음에도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포기하지 말고 기사에서 소개한 방법 그대로 한 번 시도해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 한 마디 올리고 싶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한 번도 만나뵙지 못했던 할아버지. 정말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손자인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국가유공자 증서 : 故 김형배 (1930.2.1)'
▲ 할아버지의 '국가유공자 증서' ⓒ 김경준
그동안 할아버지의 6.25 참전유공자 등록을 위해 국방부·국가보훈처·병무청·상도4동 주민센터 등 여러 기관의 문을 두드리며 뛰어다녔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기록의 부재와 불일치 등으로 좌절할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아직 생존해계신 할머니의 증언 등을 토대로 끈질기게 매달린 결과, 오늘의 결실을 맛보게 됐다. 마침 또 6월 25일을 앞두고 소식을 접하게 되어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 삶의 궤적을 추적하다
사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비롯해 아버지나 친척들 모두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준 바가 없어, 내겐 할아버지가 남보다 더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다만 6.25 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참전유공자 신청을 했으나 이를 증명할 기록이 없어 반려되는 바람에 끝내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말만 듣고서 '기록이 없어서 안 되나 보다' 하고, 다시 시도해 볼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있었다.
현재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나는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주제로 석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논문을 쓰며 해당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만나 인터뷰할 일이 많았다.
나에게서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듣고 기뻐하는 후손들에게 나는 "우리 할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 참전하셨는데도 기록이 없어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선생님의 할아버님은 일찌감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셨고 자료도 많이 남아있으니, 이제부터라도 관심 갖고 선양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당부한 바 있다.
그들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리 할아버지도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남은 흔적들... "성함이 일치하지 않네요"
▲ 나의 할아버지, 김형배의 유일한 사진.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 사진 한 장이 전부다. ⓒ 김경준
쉽지는 않았다. 1차적으로 아직 생존해 계시는 할머니께 할아버지의 6.25 참전 사실에 대해 여쭤봤으나, 전쟁 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러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을 뿐더러 관련 기록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막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무청의 문을 두드렸다. 병무청에서는 할아버지의 군번을 알아야 참전사실 조회가 가능하니 인근 주민센터에 가서 군번이 기록된 '구원장(개인별 주민등록표)'이라는 걸 발급 받으라고 안내해줬다.
그래서 인근 주민센터를 찾아 구원장 발급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구원장이 조회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담당 직원은 어떻게 해서든지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아주기 위해 1시간 넘게 전화기와 컴퓨터를 붙들고 고군분투했으나, 없는 기록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운 대로 우선 '제적등본'을 발급받았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제적등본을 통해 증조할아버지의 성함이 '김범(金範)'이란 것과 할아버지의 생년월일(주민등록번호상)이 '1930년 2월 1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제적등본을 가지고 이번엔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다. 민원을 이첩 받은 육군본부 담당자는 "전쟁 당시에는 주민등록번호가 없었기 때문에, 군번을 모르면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이어지는 담당자의 답변에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할아버님과 비슷한 행적을 보이는 인물이 있는데, 증조할아버님의 성함이 일치하지 않아서 동일인물이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할머님께 증조할아버님의 성함과 할아버님의 입대 당시 거주지 등을 다시 확인해보세요."
마침 얼마 뒤에 증조할아버지의 제사가 있었다. 제사를 위해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그 결과 증조할아버지의 다른 이름(異名)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확인한 제적등본상의 증조할아버지 성함은 분명 김범이었는데, 할머니는 '김흥수'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또 할아버지가 입대할 당시의 거주지가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라는 것도 확인했다.
날이 밝자마자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다시 육본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얘기를 들은 직원은 잠시의 침묵 뒤 말했다.
"아, 이 분이 맞네요. 김흥수의 자(子), 김형배. 입대 당시 거주지도 맞습니다. 할아버님께서 6.25 전쟁에 참전하신 걸로 확인됩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맞다는 담당 직원의 답변에,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의 감정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드디어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병무청으로부터 할아버지의 '병적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 병적증명서와 함께 6.25 참전유공자 등록신청서를 제출한 지 꼭 한 달만에 대통령 명의의 국가유공자 증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공문이 집으로 날아온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자유수호를 위해 헌신하신 고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귀하께서 국가(참전)유공자로 신청하신 故 김형배 님에 대해 관련 규정 및 제출서류 등을 검토한 결과,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제3조(참전유공자) 적용대상자로 결정하였음을 안내드립니다."
▲ 6.25 참전유공자 증서 속 할아버지의 이름을 만져보는 할머니의 모습 ⓒ 김경준
기쁘지만 한편으로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다. 관심을 갖고 노력했으면 좀 더 일찍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아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지금까지 이리도 무심했을까.
사실 나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유해발굴병 출신으로 군 생활하는 동안 6.25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임무를 수행한 바 있다(관련 기사: "북한서 전사한 오빠를 찾아주세요"... 가슴 먹먹한 전화). 그런데 정작 우리 할아버지의 명예 찾기에는 뒷전이었던 셈이다.
역사를 공부한답시고 남의 조상 선양에는 앞장서면서 당신의 명예 찾기에는 뒷전인 손자놈을 보면서 지하의 할아버지께서도 많이 서운해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늦게라도 할아버지의 한(恨)을 풀어드렸으니 이제는 못난 손자를 용서해주시리라 믿는다.
"할아버지,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앞에 할아버지의 6.25 참전유공자 증서를 놓고 술 한 잔 올렸다. 할아버지가 나고 자랐으며 지금 잠들어계신 곳이기도 한 전남 강진땅의 전통주, '병영소주'다. 할아버지가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는 그날이 오면 올리기 위해 진즉 준비해두었던 술이다. ⓒ 김경준
할머니의 증언과 군에 존안 중인 기록을 토대로 나의 할아버지 김형배(金亨培)의 군 시절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는 전쟁 발발 전 입대해서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았다(군 기록상으로는 1952년 4월 9일 입대한 것으로 나옴). 6.25 전쟁 발발 후 강원도 최전방으로 배치됐다. 군 생활 동안 1훈련소-2보충대-미 45사단-3보충대-505수송육로운용단 등을 거쳐 1956년 6월 11일 전역했다. 군번은 8818546. 최종 계급은 일등중사(現 하사)였고, 주특기는 운전병이었다.
여기까지가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긴 했으나 할아버지의 군 생활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갈증이 남아있다. 혹시 이 기사를 보고 할아버지의 군 생활을 증언해주실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연락 부탁드린다.
▲ 할아버지의 국가유공자 증서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 ⓒ 김경준
일부러 할아버지의 6.25 참전유공자 선정 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혹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뜻에서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6.25 전쟁에 참전했음에도 참전유공자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포기하지 말고 기사에서 소개한 방법 그대로 한 번 시도해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 한 마디 올리고 싶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한 번도 만나뵙지 못했던 할아버지. 정말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손자인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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