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9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 37] 육신은 간신히 풀려나왔지만 영육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 작가회의
독재자는 죽었지만 그는 풀려나지 못했다.
정국은 국민의 바람대로 '서울의 봄'이 아닌 박정희의 충복들에 의해,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12ㆍ12 하극상에 이어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일이 벌어진 데는 곡절이 있었다. 언론인 출신 정치인 남재희의 증언이다.
창당과정에서 시인 김지하 씨의 석방일자가 앞당겨진 것은 생각지도 못한 부산물이었다. 시도 조직책 회의가 한두 차례 있고 부산시책이 정상천 씨에서 정회채 씨로 확정되고 나서 청와대 부근 안가에서 전대통령과 시도조직책 상견례가 있었다.
창당의 어려움을 털어놓는 가운데 서울시책 남재희 씨가 불쑥 "각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고 말문을 떼었고 전대통령은 "뭐냐"고 물었다. 남씨는 이에 "김지하 시인을 좀 풀어주십시오"라고 털어놓자 전대통령은 "무슨 얘기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남씨는 "김씨는 소설가 박경리 여사의 무남독녀의 사위입니다. 며칠 전 어떤 신문에 박여사의 수필이 실렸는데 무척 한이 맺혀 있는 글이었습니다. 김씨를 석방해 줬으면 합니다"고 설명했다.
전대통령이 "박씨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얘기에 관심을 표시하자 남씨는 자신감을 갖고 "<토지>작가입니다. 토지라고 유명한 소설입니다"고 부연했다.
그러자 전대통령은 "우리집 애들도 얼마 전에 보니 토지를 열심히 읽더군. 남의원이 그렇게 얘기하니 석방해야지. 아참 내가 박여사를 만나봐야겠다"고 석방에 흔쾌히 동의했다.
남씨에 따르면 이때 배석했던 보조관이 "김씨 석방은 문제가 있습니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전대통령은 "무슨 문제야 석방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주석 2)
풀려난 김지하는 원주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마루 밑 댓돌과 벽에 쓰인 숫자와 글씨들을 보자 몸과 마음에 소롯해졌던 일만이 기억에 환하다.
육년 만에 디뎌보는 대청 아래 댓돌에는
아버지가 울며 새기셨다는 내 재구속 날짜
'1975년 3월 13일'
육 년 만에 올라서는 대청 위 흰 벽에는
선생님이 주역에서 끌어 쓰신 글씨 한 폭
'하늘과 산은 몸을 감춘다'
산아
숱한 네 깊은 골짜기
네 바위도듬 등성이며 봉우리들
한결같이 흰 눈 덮여
눈부신 치악산아. (주석 3)
육신은 간신히 풀려나왔지만 영육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광주에서 자행된 학살과 유신체제보다 더 혹독한 5공의 정치현실이 마음을 찢었다.
원주의 겨울은 아주 추웠다. 원주의 주교관은 언덕 위에 있는데, 청기와로 된 한옥이었다. 김지하는 이 한옥으로 12월 12일에 들어갔다. 이 집에서 김지하는 그의 부모, 부인, 1974년 4월 18일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머문다.
그가 다시 고향에 돌아온 이후,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온돌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창문 앞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혹사당한 자신의 조각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하고 펀펀한 한국인 특유의 얼굴과 이마, 골똘히 생각하는 눈과 입, 그리고 반항적인 턱을 가졌다. 그의 집 벽에는 '화중천지(花中天地)'란 글이 걸려 있었다.
김지하는 이 글이 자신의 현재의 심정을 말해 준다고 설명했다. 오랜 옥중생활 동안 그는 명상과 좌선을 배웠다. 1972년 원주에서 지 주교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청년저항운동을 이끌었던 김지하는 더 이상 1981년의 김지하가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나의 시의 표제어는 불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은 물로 바뀌었다. 조용한 물." (주석 4)
한 인간에게 5년 9개월은 긴 세월이다. 여기에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던 기간을 합치면 도합 7년 여 기간이다. 출옥한 날부터 그는 잠을 자지 못했다.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정보부 원주 분실에 정보를 전하는 안테나들이 있고 다방, 술집, 성당과 사회개발위원회 사무실에도 각기 자기 나름의 독특한 정보창구가 있어서, 몇 시 몇 분에 김아무개가 박아무개와 어디서 만나 무얼 했다는 정보가 싸그리 전달되었으니, 가는 곳이 곧 또 하나의 문세광의 방이요 앉은 곳이 바로 새로운 서대문감옥이었다.
그렇다면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 이외에 석방의 뜻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더욱이 광주사태 이후의 세상은 흉흉하고 살벌했다. 도처에 타다 남은 불씨들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원한은 깊이깊이 내면화되어 있었다. 마치 시케이로스의 〈외침〉. 그 무한한 증폭. (주석 5)
1981년 12월 2일 1975년에 수상이 결정된 '로터스 상' 특별상을 보관중이던 원주교구 가톨릭센터에서 뒤늦게 수상하였다. 이 자리에서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위원회'가 주는 '크라이스키 인권상'도 동시에 수상했다. 연말에는 '세계시민대회'가 주는 '위대한 시민상'을 받았다. 상복이 터지는 해였다. 9월에는 둘째아들 세희가 태어났다.
'로터스 상' 수상 연설문에서 이 시기 그의 심경의 일단이 읽힌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별 볼일 없는 사람, 이 세상에서 쫓겨나 구만리장천을 의지할 데 없이 떠도는 초라한 광대의 넋이요, 살아 있는 중음신(中陰身)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략) 한의 축적이 없는 곳에서는 한의 극복도 없습니다. 결단은 용기입니다. 참된 용기는 밤을 받아들이는 용기, 진흙수렁을 받아들이는 용기, 고통과 절망과 퇴폐마저도 받아들이는 용기, 흙이 똥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오곡이 풍성하게 결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용기를 민중은 이미 용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로터스'는 우리말로 연꽃입니다. 저 한 사람, 그리고 여러분, 전체 우리 민중과 제3세계 전체 민중, 전 인류와 전 중생의 생명의 연꽃은 진흙수렁 속에서만 피어날 것입니다. (중략)
오늘날 후천개벽의 시대에는 음과 양이 조화하는 시대, 즉 음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대동을 이루는 것, 즉 '여성적인 것'이 그 지배를 넓혀가는 역사이며 새로운 형태의 모권(母權)이 중심으로 되어가는 문화의 때요, 해원과 상생의 때입니다. (주석 6)
주석
2> 남재희, <양파와 연꽃>, 304쪽, 민음사, 1992.
3> <회고록(3)>, 37~38쪽.
4> 푸미오 다부치, 앞의 책, 86쪽.
5> <회고록(3)>, 40쪽.
6> 김지하, <밥>, 9~17쪽, 분토출판사, 1984, (발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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