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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박종철·이한열, 왜 민주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나

[주장] 민주유공자법 제정 미루는 국회, 잘못된 현실 방치하지 말아야

등록|2022.07.19 11:03 수정|2022.07.19 11:03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지난 2007년 아들 박종철의 20주기를 맞아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들른 박정기 아버지. ⓒ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박정기씨는 아들 박종철의 죽음을 목도한 뒤, 아들을 대신해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죽을 때까지 헌신한 분이다. 그래서 박정기씨는 단순히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니라,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전두환 군사정권에 분노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모든 이들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박정기씨도 돌아가실 때까지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개월 전인 2018년 5월, 열사의 형 박종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민주유공자법 마무리 못해 미안타. 너희들 고생하게 만들었다."

박정기씨는 1998년 처음 국회에 발의됐던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끝내 관철시키지 못한 한을 남긴 채 2018년 7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는 아들 박종부에게도 한으로 남았다. 그는 박정기 아버지의 말씀을 반드시 풀어야 할 유언으로 받아들였고, 지난 6월 10일 6.10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이 열린 성공회대성당 입구에서 열린 '민주유공자법 제정 요구 삭발식'에 열사의 형제로는 유일하게 동생의 영정을 품에 안고 참석했다.

헌법정신과 민주유공자법
 

'민주윺공자법 제정'을 요구하는 삭발식 장면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오른쪽에서 두 번째)도 지난 6월 10일 6.10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이 열린 성공회대성당 입구에서 동생 박종철 열사의 영정 사진을 들고 삭발을 했다. ⓒ 김학규


대한민국 현행 10호 헌법의 전문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현행 헌법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들을 기리고 감사를 표하는 '독립유공자법'(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민주유공자들을 기리고 감사를 표하는 '민주유공자법'이 마땅히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라는 문제제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4.19유공자와 5.18유공자를 기리는 법률('국가유공자법'과 '5.18유공자법')이 이미 있다는 점을 들어 '4.19민주이념을 계승'했다는 헌법정신은 이미 법률로 구체화했다는 주장을 펼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4.19유공자와 5.18유공자만을 민주유공자로 인정하는 법률에 만족하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민주유공자법에 포함돼야 할 민주유공자는 4.19유공자와 5.18유공자만이 아니라, 당연히 1964, 1965년의 6.3항쟁을 비롯해 1970년대의 반유신투쟁, 1980년대의 6월 민주항쟁을 비롯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참여해 희생하고 헌신한 모든 이들을 그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는 독립유공자법의 적용 대상을 3.1운동 참여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자로 제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이승만 정부 시절, '독립유공자법' 없는 독립유공자 훈포장

이승만 정부 시절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은 '독립유공자법'이 없는 가운데 단지 '건국공로훈장령'에 근거해 이뤄졌다. 첫 시행은 1949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에서 행해졌다. 그런데 결과는 참혹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이시영 당시 부통령만이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1등 훈장)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 전체로 그 기간을 넓혀도 참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기간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전부 16명에 불과했다. 그 대상도 이승만과 이시영을 제외하고는 전부 외국인이었다. 독립운동 기간 내내 대표적인 '외교론자'로 알려져 있던 이승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승만이 감사를 표한 한국의 독립을 도운 14명의 외국인 중에는 1942년 이승만이 설립한 한미협회에 참여한 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헌신하다 순국한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은 물론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박은식과 김구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 그 누구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객관적인 기준을 정한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건국공로훈장의 수여는 '공과 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한 권력자에 의해 이렇게 좌지우지됐던 것이다.

4.19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장면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면 정부가 1960년 10월 1일 '신정부수립 경축식'에서 독립유공자 11명을 선정해 기념품 증정을 하겠다고 나오자, 대상자로 선정된 김창숙(유림계 독립운동가)과 유석현(의열단) 등이 '대상자 선정의 자의성'을 문제 삼으면서 경축식 참석 자체를 거부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나마 법률에 근거해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일을 시작한 것은 '국가유공자등원호법(1962년 시행)'과 '상훈법(1964년 시행)'이 제정된 이후였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 민주유공자법 없는 민주유공자 훈포장

문재인 정부는 2020년 6월 10일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씨,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씨,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씨 등 19명에게 처음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모란장 등 훈포장을 수여했다. 문재인 정부는 2021년에도 박래전 열사를 비롯한 29명을 민주유공자로 인정해 훈포장을 수여했다.

문재인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도 이를 계승해 2022년 6월 10일 6.10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에서 박종만 열사, 김귀정 열사 등 19명을 민주유공자로 인정해 훈포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유공자법 없는 민주유공자에 대한 훈포장은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 시절의 독립유공자법 없는 독립유공자 훈포장과 마찬가지로 '자의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누가 민주유공자인지 객관적인 기준을 정해 그 대상을 분명히 하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은 계속 미루면서 매년 정부에서 임의로 특정인을 민주유공자로 선정해 훈포장하는 방식이 지속된다면, 독립유공자 표창을 거부했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장 내년부터 훈포장 수여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기준 자체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민주유공자법 제정, 계속 미뤄지는 이유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앞 농성장국회 앞에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장이 설치되어 있고, 매일 일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 추모연대

 
기자는 10여 년을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던 관계로 그동안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옛 남영동 대공분실 탐방' 안내를 맡아 왔다.

그 과정에서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국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자주 받았다. 이에 대해 "국가가 박종철 열사를 민주유공자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에게 무슨 지원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면 참석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박종철 열사가 아직도 민주유공자가 아니라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과 다친 사람'으로만 그 적용 대상을 제한해 발의한 민주유공자법(안)의 처리가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 데에는 민주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 덕에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수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중성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러한 이중성은 법 제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국회의원의 경우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 덕에 국회의원에 오른 사람들조차 자신이 뛰어나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동료들의 희생과 헌신을 애써 외면하면서 오직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살다가 국회의원이 된 이들은 심지어 민주화운동에 나서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젊은 시절 자신의 '현명한 선택'만을 자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태일 열사의 모친인 이소선씨,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씨,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씨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지만, 막상 전태일 열사,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는 여전히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대한민국 국회는 언제까지 이런 현실을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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