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방역의 시대... 윤석열 정부 향한 영국 정치학자의 충고
류변의 급진적 책 읽기 13회 <정치를 옹호함 / 버나드 크릭>
▲ 국민의힘 권성동 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주어진 통치 단위에서 전체 공동체의 복지와 생존에 기여하는 각각의 중요성에 비례해 권력의 몫을 부여함으로써 서로 상이한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활동."
<정치를 옹호함>의 저자 버나드 크릭이 내린 정치에 대한 정의다. 그가 강조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정하는 행위로서의 정치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없다.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 대응이라는 협박, 극단적인 진영 대립, 내로남불, 갈라치기가 있을 뿐. 신뢰받는 정치인도 없다. 정치인들이 모인 국회에 대한 신뢰도는 정부기관들 중 꼴찌다.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크릭도 많은 사람이 정치란 혼란스럽고, 모순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속임수나 음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릭은 정치적 활동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희소하고 소중한 어떤 것"으로 규정하고 옹호한다.
정치란 "공통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영토 단위 내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전통을 가진 다양한 집단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기에 "정치를 포기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다원주의와 다양성에 기반을 둔 문명사회 질서를 부여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복잡 다양한 상황에 대한 응답이고 개인정 정체성에 대한 확신과 보존이므로 모든 것을 단일한 이론으로 환원하고 획일화하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타자를 배제하고 정치적 자유를 훼손하는 민족주의로부터 옹호되어야 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로부터도 옹호되어야 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로부터도 옹호되어야 한다. 이 주장은 좀 의외일 수 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 독재는 나쁜 정치이고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릭은 민주주의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라 단지 정치의 한 형태일 뿐이라며 민주주의를 상대화한다.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나치와 공산주의를 예로 들어 민주주의와 정치는 별개이고 "다수의 지배"로 이해되는 민주주의가 다원성과 다양성을 파괴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다만 그는 이 책에서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로 전락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검색해보니 그의 다른 책 <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에서 근대민주주의와 포퓰리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로 시민공화주의를 제시했다고 한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입장에서 논평하기 곤란하지만 공공선과 시민적 덕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로 민주주의의 실패를 해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같아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전도한 결과,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이나 공적 가치보다는 사적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주인-대리인의 딜레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교정하기 위해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 등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자칫 독재자나 무책임한 정치인들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 적대적인 정치나 포퓰리즘을 강화할 우려도 있다. 대안은 공론조사, 시민의회 등 작은 공중(mini-public)에 기반을 둔 토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제도화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기술·과학·행정으로 환원될 수 없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중구보건소에서 화이자 백신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4차 예방접종을 하고 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코로나19 재유행과 관련해 "과학적인 코로나 방역 기조 하에 방역 당국을 중심으로 책임감있게 원팀으로 협업할 것"을 지시했다. ⓒ 대통령실 제공
정치는 기술로부터도 옹호되어야 한다. 인간 문명이 맞닥뜨린 모든 문제들은 기술적인 문제이고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정치가 과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믿음, 전문적인 행정이 정치보다 효율적이고 월등하다는 믿음으로부터 정치를 옹호한다는 것이다.
전 정부의 방역정책을 비과학적인 정치방역이었다며 비판한 현 정부는 '과학방역'을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방역의 실체가 있느냐 여부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방역은 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하되 공동체의 건강·안전과 개인의 자유라는 상충하는 가치를 어떻게 조화롭게 조정할 것인가'라는 결정의 문제이므로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를 해야 할 정부가 '정치'라는 용어를 이렇게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것에 크릭이라면 분명 쓴소리를 했을 것이다.
크릭은 국가가 행정에 의해 유지된다는 관점, 관료의 공평무사함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주장에 대해, 어떤 정부에서건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행정이 아니라 정부 그 자체이고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은 정치적 활동 그 자체이며 정치야말로 질서 속에서 다양성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며 비판한다.
크릭에 의하면 '기술주의'는 자원의 정치적 배분이라는 문제와 자원의 기술적 적용이라는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적용은 기술적인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생산에 투입될 자원과 그 결과물의 배분에 대한 권위 있는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야 적용될 수 있고 이런 결정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가 기재부의 나라냐"라는 비판은 타당하다. 그러나 결국 결정은 정치가 하는 것이기에 만약 기재부의 입장이 관철되었고, 그 입장이 공동체의 복지와 생존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정치가 져야 한다.
결론에 이르러 크릭은 다시금 폭력보다 달래어 조정하는 것, 획일성보다 다양성이 낫고 그것의 가능 여부는 정치의 위대한 두 적의 존재 -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적인 문제에서 본질적인 확실성에 대한 열광적인 탐색 - 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자유를 소수에게서 다수롸 확대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확실성의 추구는 신중함, 조정, 타협, 다양성, 융통성, 활력 같은 정치적 덕목을 훼손한다.
그는 활기넘치는 냉철함, 복잡한 단순성, 난잡한 고상함, 거친 정중함, 장구한 신속성, 대화로 귀결되는 갈등 등등 정치에 보낼 수 있는 찬사에는 한이 없다며, 정치를 찬미한다.
정치학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로서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란 무엇인가 고민해 볼 수 있는 귀한 책이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옮긴이는 일반 독자보다 현실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잃고 위안과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고 했다. 왜 정치를 하는가? 찬양받는 정치를 하고 있는가? 이 책을 읽고 근원적인 고민을 해 보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 버나드 크릭의 <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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