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없는 빵 만들어 구례 산골을 '핫플'로 만든 여자들
[지리산활동백과 2022] 산정마을 '느긋한 쌀빵·점빵' 운영자들을 만나다
▲ 구례군 봉서리 산정마을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느긋한 쌀빵'과 운영자 김슬기, 강은경, 차승아 (왼쪽부터)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여름날의 해거름녘은 사랑스럽다. 후끈 달아오른 땅이 식어가고, 산마루에 고여 있던 바람은 등성이를 미끄러져 지상으로 불어온다.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 대문 밖으로 나가 슬슬 걸으면 딱 좋을 시간. 때맞춰 동네 어귀에 작고 수수한 장이 선다면 누구라도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한번은 주말에 가게 앞마당에서 '두루다살림장'을 열었어요. 지역 농부들이 키운 과일과 채소 위주로 팔았는데 가까운 마을 부녀회 어머니들이 나와서 보고는 그러시더라고요. 여기 이렇게 '점빵'이 생겨서 저녁에 불 밝혀놓고 뭘 한다는 게 너무 좋고 고맙다고." (은경)
동네 어귀에 '불' 하나 밝히기까지
"몇 년 전에 윤주옥(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대표) 언니가 그런 제안을 했었어요. 구례로 귀농·귀촌한 여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요. 그걸 계기로 쌀빵을 만들까 수공예품을 팔까 다양한 얘기들이 나오던 중에, 함양에서 쌀빵집을 하다 그만두는 분이 우리에게 레시피와 노하우를 전수해준다고 하셔서 주옥 언니랑 저희 셋에 지금은 그만둔 한 사람, 이렇게 여자 다섯이서 <느긋한 쌀빵>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승아)
"그 전에 구례군청에서 하는 '청년점포'에 응모했다가 미끄러진 적도 있어요. 매화, 진달래 같은 꽃을 넣어서 만든 수제양갱으로 도전했는데 오일장에는 안 어울린다고 떨어뜨리더라고요. 전 부치고 국수 삶고 이런 걸 해야 했는데, 우리가 너무 고급스러웠던 거지(웃음)." (은경)
광주대 산학협력단에서 모집하는 사회적기업 창업팀에 선정돼 마침내 산정마을 어귀에 작은 '불' 하나를 밝힌 그들은 이제 빵만 잘 만들면 되겠다 싶었다. 그때만 해도 정작 그 부분이 가장 힘겨운 고비가 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고. 그들은 구례에서 함양까지 몇 차례 오가며 익힌 레시피와 매뉴얼을 믿었고, 그대로만 하면 별일 없을 거라 '순진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쌀빵을 택한 건 그게 밀가루로 만든 빵에 비해 아토피에도 좋고 더 건강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주변에 보면 별로 없잖아요. 만들기가 까다롭다는 얘기죠. 밀가루와 달리 쌀은 제빵에 알맞게 나온 가루가 없어요. '가루미'라고 제빵용으로 개량된 게 있긴 한데 그것도 써보니까 떡처럼 될 때가 많더라고요. 어떤 쌀을 쓰든지 제분과 물 섞는 비율 등을 엄청 신경 써야 하는데 그게 또 쌀마다 일정한 게 아니라서 힘들어요." (승아)
"쌀빵이 이렇게까지 까다로운 줄은 몰랐죠"
▲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등록된 '느긋한쌀빵' 가게 사진 ⓒ 느긋한쌀빵
▲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등록된 '느긋한쌀빵' 가게 사진 ⓒ 느긋한쌀빵
빵집 열고 처음 한 달은 균일한 품질의 쌀가루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았다. 문제는 그 공급자가 돌연 폐업을 선고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한동안은 다섯 명이 달라붙어 다양한 쌀을 대상으로 최적의 빵을 생산해내기 위해 '테스트'한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결국은 쌀가루 공급 업체를 세 번이나 바꾼 끝에 정부미 취급하는 곳과 손을 잡았는데, 하필이면 그 시기에 나라가 정부미 제공을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내리면서 이번에는 재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쌀이 없어서 빵을 못 만드는 상황이 되다 보니까 진짜 '멘붕'이었죠. 그때는 잠시 가게 문을 닫기도 했어요. 우리는 그 안에서 울먹이며 계속 테스트하고.(웃음)" (슬기)
"오죽하면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에 전화까지 했겠어요? 덕분에 곡성에서 여러 품종의 쌀을 생산하는 분을 알게 돼 한동안 그분 통해 가루미를 받아 쓰다가 지금은 유기농 일반미로 바꾼 상태예요. 우리 사정을 잘 아는 분이라 시세보다 싸게 주시니까 고맙죠." (승아)
지금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셋 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초반에 엄청난 질풍노도를 통과한 덕분에 얻은 것들이 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닥쳐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강한 맷집을 키웠다고 할까. 더욱이 돈 주고도 못 배울 쌀빵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몸으로 익힌 것은 가장 큰 성과라 할 만하다.
"일주일에 한 번 새 쌀가루가 오는데 첫 포대 열 때는 지금도 긴장해요. 같은 품종이라 해도 보관 상태나 제분 정도에 따라 상태가 달라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거든요." (슬기)
"그래서 우리의 희망 사항이 제분기랑 저온창고 갖는 거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관리하면서 안정되게 만들고 싶은 거죠." (은경)
점빵은 '지역생협'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
2020년 6월 개업한 '느긋한 쌀빵'은 사실상 그해 여름 내내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한 달 만에 쌀가루 문제가 생긴 데다 대규모 수해까지 구례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다시 문을 연 건 늦가을 무렵으로, 그때부터는 생협 물품을 파는 '점빵' 영업도 같이 해나갔다. 빵집 하나 운영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데 굳이 다른 업종을 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점빵은 쌀빵집 시작할 때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우리들의 공간이 생기면 지역농산물도 같이 판매해서 소비자는 건강한 먹거리를 얻고 생산자는 정당한 대가를 받는 정직한 유통구조를 만들어보자고 이미 얘기가 돼 있었죠." (은경)
▲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등록된 '느긋한쌀빵' 가게 사진 ⓒ 느긋한쌀빵
구례에는 대규모 생협 매장을 포함해 각종 문화·체험 시설을 복합적으로 갖춘 '아이쿱자연드림파크'가 있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마트 같은 곳이기에, 읍 외곽에 있는 작은 점빵으로는 애당초 게임이 안 되는 상대다. 아닌 게 아니라 초반에는 '의도가 좋다'며 점빵을 응원차 방문하던 사람들이 얼마 안 가 효율성과 편의성을 이유로 다시 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고.
"생물은 남으면 폐기를 해야 하니까 처음엔 사전 주문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주문 안 하고 오는 손님들한테는 팔 물건이 없는 거예요. 또 생물은 보통 조기 마감되는 경우가 많고 주문 후에 결품 통보가 오기도 하더라고요. 소비자로서는 분명 아쉬운 부분이죠." (승아)
현재는 주문을 받긴 하되 생물도 일반 물품처럼 그때그때 '적당한' 양을 들이는 방식으로 변화를 주었다. 다행히 이 일을 담당하는 강 대표의 '촉'이 뛰어나 폐기되는 건 많지 않다. 또 올해 들어서는 공동구매 같은 이벤트를 활성화하는 한편 작년에 코로나19로 주춤했던 '두루다살림장'도 다시 시작해 격주로 여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점빵에 대한 관심과 신뢰도를 높이려 애쓰는 중이다.
"산취, 두릅 같은 봄나물로 시작해서 구례 문척 수박, 진주텃밭 토마토 같은 것을 공동구매했는데 참여한 분들의 만족도가 높더라고요. 그런 걸 하면 자연스럽게 여기 와서 장을 보게 만드는 효과도 있어요. 또 두루다살림장은 아직은 참여하는 생산자가 그리 많지 않지만, 지금은 작게라도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은경)
"사실 그런 이벤트를 하면 신경 쓸 건 많은데 수익으로 돌아오는 건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사장님한테 잔소리를 하죠. 하면 할수록 손해라고(웃음). 하지만 사장님의 경영철학을 존중하고 또 우리가 지역생협을 목표로 하니까 감수하고 하는 거예요." (슬기)
조건이 불안정해도 행복할 순 있다
목표가 뚜렷하고 그에 따라 벌이는 일들이 있다 보니 공간의 협소함이 아쉬울 때가 있다. 공동구매라도 하는 날이면 들여놓은 물품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여서 가끔은 '확장 이전'이니 빵집과 점빵의 '분리'니 하는 얘기가 나오곤 한다. 두루다살림장 또한 서시천 같이 너른 데로 나가서 하면 더 낫지 않겠냐고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 일리 있는 말인데 지금은 확장보다는 점빵도 장터도 안정되게 자리를 잡는 게 우선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이 점빵이 참 좋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걸어와서 필요한 걸 사 가고, 또 돈이 없어도 편하게 외상으로 달아놓을 수 있는 이런 데가 지금은 시골에도 별로 없잖아요." (은경)
여전히 '안정성'을 고민하는 단계라지만 '느긋한 쌀빵/점빵'이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지난 일이 년 사이 봉서리로 귀촌하는 비혼 여자들이 부쩍 늘었다는 게 그 증거 아닐까. 게다가 얼마 전에는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책방이 들어섰고, 같은 멤버인 윤주옥씨가 일하는 국시모 사무실도 그 옆 건물로 옮겨왔다.
이를 두고 "봉서리가 우리 덕분에 드디어 '핫플'이 된 거 아니냐"며 세 여자는 목소리를 키운다. 누가 선점하기 전에 빨리 방앗간 내고 두부 만드는 마을기업도 세우고 기왕이면 '느긋한 주점'까지 개업하자고, 서로 신나게 농담도 주고받는다. 이처럼 웃음기 가득한 말들이 여유로우면서도 단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굽이굽이 좁고 험한 길을 함께 달려오는 사이 그들 안에 쌓인 내공이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리라.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주로 했고 구례 와서도 계속 주5일 근무를 했었어요. 그와 비교하면 지금 하는 일은, 물론 힘든 점도 많지만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슬기)
"아직은 조건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때로는 가게 안이 살얼음판 같을 때도 있고 늘 평화롭진 않아요. 하지만 여기는 우리가 함께 만든 공간이니까 적어도 눈치 볼 필요는 없잖아요. 슬기 말처럼 각자가 주체가 돼서 일할 수 있고요. 또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일하고 있고 갈등이 생겨도 대화로 소통해서 풀 수 있는 관계라는 거, 그게 무엇보다 만족스럽죠." (승아)
끝내 우리가 느긋해질 수 없다 해도
▲ '느긋한 쌀빵'의 아늑한 공간에서 만난 운영자 강은경, 김슬기, 차승아 (왼쪽부터) ⓒ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새벽 6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산정마을 어귀에 불이 켜지며 주변이 환해진다. 비가 오든 해가 나든 바람이 불든, 봉서리가 핫플이 되든 말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날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이렇게 누군가 서둘러 출근해 빵을 반죽하고 발효시키고 오븐에 굽는 사이, 아침이 밝아오고 거리가 깨어나는 시간이 되면 또 다른 이가 점빵 문을 열고 사람 맞을 채비를 한다. 잘 부풀어 올라 색도 향도 고운 빵이 진열되는 시간은 오전 11시. 이때부터 슬슬 손님이 오고 빵이 팔리고 물건이 나간다.
"읍에서도 오고 이 동네 할머니들도 두부나 콩나물 같은 거 사러 자주 오세요. 산정마을 주민에게는 10퍼센트 할인해드리니까 계산할 때마다 아주 당당하게 '나 여기 주민이야' 하시죠(웃음). 단골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여기서 파는 건 뭐든지 믿음이 간다고 말씀해주는 분들도 생기고 있고." (승아)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받은 느낌이 들죠. 정직한 유통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구나 싶고. 그럴 때 제일 보람되고 행복해요." (은경)
이 공간을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한, 네 여자는 새벽마다 가게 불을 밝히고 뽀얀 가루를 날리면서 반죽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손해 보는 장사라는 공동구매도 더 열심히 추진할 테고, 지역 생산자와 소비자가 그야말로 '두루 다' 잘 살 수 있는 길을 내면서 그 위로 사람들을 손짓해 불러모을 것이다.
행복이 꼭 '느긋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건 아님을, 그들은 이렇게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이 특별한 행복의 얼굴을 구례 지역의 더 많은 이들이 마주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그들의 몸도 마음도 조금쯤은 느슨해지는 날이 어서 오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글 | 자야
사진 | 임현택
기획/진행 | 누리
Author 자야
새벽 요가, 산책길의 노래, 지치지 않을 정도의 텃밭일,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 용기 있고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을 좋아하는 함양 주민입니다.
덧붙이는 글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리산권 지역에 필요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과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 지원단체로, 아름다운재단과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리산권 지역에서 직접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 모임, 공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 이 인터뷰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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