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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오빠의 기적 같은 생환에 아버지가 눈을 떴다

여수 소가사마을 정옥자 어르신의 살아온 이야기

등록|2022.07.28 11:51 수정|2022.07.28 11:59

정옥자 어르신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중인 정옥자 어르신 ⓒ 정병진


죽은 줄 알았던 두 오빠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어르신이 있다. 여수 소라면 소가사마을 정옥자(82)씨이다. 정씨에 따르면 두 오빠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때 죽음의 골짜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기자는 현재 마을 어르신 몇 분의 구술 생애사 채록 작업을 하는 중이다. 대부분 고령인 마을 어르신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남겨 마을 역사와 공동체 문화 복원에 조금이나마 기여해 보자는 취지다. 어르신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슴 아픈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 22일에는 정옥자씨를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정씨는 여천동 옛 마을인 화산마을의 농가에서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위로 두 오빠가 있었지만 지금은 두 분 모두 병을 얻어 돌아가신 지 오래다.

학살지에서 도망친 작은 오빠

정옥자씨는 여순사건 당시 인근에 살던 A씨 집에 경찰들이 자주 찾아왔다고 하였다. A씨 오빠들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북한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이에 경찰들은 A씨 집에 여러 차례 찾아와 그들을 찾아내라며 닦달하였고 그 집 대밭에 불까지 질렀다고 증언하였다.

이어 자신의 작은 오빠(정천석, 1931년생)도 여순사건 때 "경찰에게 잡혀 갔다"고 하였다. "정확히 어디서 잡혀 갔는지는 모르겠고, 함께 일하던 동네 사람들이 와서 알려줬으니 아마 들에서 일하다가 잡혀 간 모양"이라고 하였다.

당시 작은 오빠는 열여섯 살 남짓이었고 정옥자씨는 여덟, 아홉 살 무렵이다. 정씨는 작은 오빠가 끌려간 곳을 여수 충무동 부근이었던 걸로 기억하였다. 작은 오빠가 끌려가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은 "밥을 갖다 주라"며 큰딸 옥자를 보냈다.

화산마을에서 충무동까지는 족히 12km가 넘는다. 지금이야 그나마 길이 잘 닦인 상태이지만 그 시절만 해도 구불구불해서 12km가 훨씬 넘는 먼 거리였을 거다. 소녀 옥자는 그 먼 길을 홀로 오빠 갖다 줄 밥을 이고 이틀이나 오갔다고 하였다. 정씨의 말이다.

"그 놈들이 (여수 시내에) 불을 질러 버렸잖아. (사람들을) 초등학교 한가득 모아놨더라고. 우리 오빠는 옷도 다 벗어 불고 한밤중에 작은 아버지 집으로 왔더래. 도망친 거야. 그래서 작은 아버지가 알려줘서 오빠 입을 옷을 갖고 갔어."
   정씨 증언에 따르면 정황상 그의 작은 오빠는 여수서초등학교에 붙잡혀 있었다. 여순 당시 진압군은 여수서초등학교에 시민들을 한 가득 모이게 하였다. 거기 모인 성인 남자들 중에서 봉기군 부역 혐의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해 숱한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

그의 오빠는 그 죽음의 현장에서 도망쳐 살아 돌아온 거였다. 그 뒤 작은 오빠는 낮이면 혹시 경찰이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한동안 조심하였다. 그러다가 군 복무도 하고 결혼해 자식도 낳아 키우며 별 탈 없이 살았다고 한다.

토벌대의 무차별 구타
 

부역 혐의자 색출1948년 10월 26일에 여수서국민학교에서 부역 혐의자를 색출하는 장면. 사진 오른쪽 대열의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로 11월 1일에 처형되었다. 이 사진은 당시 호남신문사 사진 기자였던 이경모 씨가 촬영하였다. ⓒ 이경모


이어 정씨는 여순사건 당시 겪은 끔찍한 기억을 하나 들려주었다. 토벌 경찰들은 음력 구월(1948년 10월), 벼를 다 베어 놓은 동네 논바닥에 성인 남자들을 다 모이게 하였다. 경찰들은 그 남자들에게 "동네에서 빨갱이 된 놈을 봤으면 말하라"며 등과 엉덩이를 마구 때렸다.

동네 남자치고 안 맞은 사람이 없었다. 아낙네들과 아이들은 무서워 그 장면을 안 보고자 숨거나 먼발치에서 울면서 지켜보았다. 많은 사내가 심한 매질로 혼자 걸어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나마 정씨의 부친은 덜 맞았는지 걸어 돌아왔단다.

정씨의 큰 오빠(정천만, 1929년생)는 한국전쟁 때 군대에 자원입대하였다. 그는 첫 휴가를 받아 집에 오던 중 북한군에게 붙잡혔다. 부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가 죽었다며 집에 전보를 하였다. 집에서는 천만씨가 휴가 받은 날을 기일로 삼아 삼 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 정씨 부친은 장자를 잃은 충격으로 눈이 봉해져 평소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오빠 이름으로 편지가 왔다. 정씨 부친은 "어떤 놈들이 남 속상하게 하려고 편지를 한다"며 편지를 쫙쫙 찢어 버렸다. 하지만 작은 오빠는 "아버지, 글씨가 형님 글씨 같소"라 말하였다. 하지만 정씨 부친은 "(큰 아들) 죽은 지 삼 년이 지났는데 어떤 놈들이 남의 속을 뒤집으려는 수작이냐"며 믿지 않았다.

며칠 뒤 정씨 부친은 지팡이를 더듬어 가며 근처 주막에 가서 술을 먹고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익숙한 큰 아들 목소리였다. 하지만 부친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한 거다. 그러자 상대는 또 그를 부르면서 "내가 정천만이요"라고 말하였다.

이에 깜짝 놀란 정씨 부친은 마치 심봉사 눈 뜨듯 눈을 떴다. 눈이 짧고 눈꺼풀이 딱 붙어 있던 그는 눈을 뜨자 피가 났다. 주막에 있던 사람들은 그 피를 닦아줬다. 이즈음 정옥자는 미영밭(목화밭)에서 미영대를 뽑던 중이었고 작은 오빠는 거름을 지게에 져서 나르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간 작은오빠가 하도 안 와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친구들이 와서 "너희 집에 지금 큰 잔치 났다"고 하였다. 무슨 일인가 해서 한달음에 달려가 보았더니 아버지는 좋다며 춤추고 다녔고, 마당에는 주변 동네 사람들까지 몰려와 술을 나누며 요란하였다.

잠시 후 군복 입은 어떤 사람이 다가와 옥자씨를 꼭 잡으며 "오빠다"고 하였다. 그때 군인 세 명이 큰 오빠와 함께 왔고 건빵 박스를 여러 개 가져왔다. 잔치가 끝난 뒤 큰 오빠는 다시 군대에 복귀해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큰 오빠에 따르면 그는 북한군에게 잡혀 북한에 포로로 끌려갔다. 남북한 포로 교환을 할 무렵, 남한군 포로와 북한군 포로 인명수대로 맞교환을 하였다. 그때 큰 오빠가 보니 북한군 포로가 몇 명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줄의 뒤쪽에 서 있다가 중간에 끼여 들어갔더니 딱 큰 오빠까지 끊어 포로 귀환이 됐단다. 천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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