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충원에 단 2곳뿐인 민간 묘지... 어떤 사연일까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57] 연안 이씨 시조 이무와 사우당 이시담의 묘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사설묘지가 있을까?"
대전현충원은 국립묘지다. 국립묘지에는 사설 묘를 둘 수 없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그런 원칙과는 관계없이 국립묘지가 조성되기 전 이 땅에 먼저 묻힌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이장했지만 묘역 조성에 크게 문제되지 않아 이장하지 않은 묘지가 2기가 있다. 연안 이씨(延安 李氏) 시조 이무(李茂)의 묘와 사우당(四友堂) 이시담(李時聃)의 묘다. 많은 이들이 사설 묘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이유는 사설 묘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고, 나무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 이무의 묘는 신선봉 아래, 두리봉과 장사병7묘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현충원에 조성된 묘역뿐 아니라 보훈둘레길과도 떨어져 있어서 종손들도 찾기 어려워한다. 둘레길 4코스에서 두리봉과 신성봉 사이 계곡이 나오는데, 이 계곡 위로 이무 장군 묘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100여m 올라가면 되지만 평소에는 진입금지 구역이다.
이무 장군은 당나라 고종 때 중랑장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연안후에 봉해졌고, 그 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후손들은 시조가 하사받은 연안 땅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원래 이무의 묘소는 이곳이 아니다. 1821년에 연안 이씨 종원 이문우(李文愚)가 시조묘를 찾기 위해 여러 수소문을 한 결과 황해도 연안부 서편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隱逸洞)에서 시조묘를 찾고, 혼유석과 상석 밑에서 '연안백이무(延安伯李茂)'라고 쓰여 있는 지석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후 분단으로 인해 시조 묘를 찾아갈 수 없게 되자 1954년에 판사공파 사우당공계의 종산이 있는 당시 충남 대덕군 유성읍 갑동리에 제단 성격의 단소를 봉분을 갖춘 형태로 만들었다.
현재 묘지석은 연세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연안이씨 문중은 매년 10월 3일 유성구 갑동에 있는 연원사에서 시제를 지내고 현충원내 장군의 묘소에 들러 참배를 하고 있다.
이시담(李時聃, 1584~1665)의 묘는 장군 1묘역 278번 묘 옆 대나무 사이로 접어들면 나오는 보훈둘레길 3코스인 노랑길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다. 과거에는 탁 트였던 이시담의 묘도 앞에 현충원이 조성되면서 나무가 심어지고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3구간 출발점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어 대나무 숲을 지나면 오래된 비석 하나가 나온다. 그 비석 뒤로 묘가 있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귀(貴)의 아들이자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다.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형을 도와 원종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다. 후에 충주목사,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대전국립묘지(현 대전현충원) 예정부지였던 갑동은 150여 세대, 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연안 이씨 집성촌이었다. 대다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포도를 재배하거나, 닭이나 칠면조 등 가금류를 키우기도 했다. 토지가 수용되면서 58세대는 인근에 조성된 새마을 동네로 이주했고, 28세대는 덕명동으로 이주했다. 나머지 60여 세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동네에는 연안 이씨 묘소가 많았는데 모든 묘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주하더라도 시조 묘만은 존치코자 했던 연안 이씨 문중의 간곡한 진정으로 다른 묘는 모두 이장하는 조건으로 이시담의 묘를 포함해 2기의 묘는 그대로 존치할 수 있었다.
댐이 만들어지면서 마을 전체가 수몰되는 경우처럼, 국가정책과 국책 사업으로 고향에서 쫓겨나고 고향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많은데, 국립묘지 조성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국립묘지에는 사설 묘를 둘 수 없는 것이 원칙이라 하지만, 대전현충원 내에 위치한 2기의 사설 묘를 통해 그곳도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도로공사로 오래된 고목들이 잘려나가는 게 아니라 아름드리나무를 살리기 위해 우회시키는 길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도 함께 든다. 또, 분단으로 인해 황해도 연안의 시조 묘를 갈 수 없어 제단 성격의 단소를 설치한 사실을 통해 분단의 아픔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대전현충원은 국립묘지다. 국립묘지에는 사설 묘를 둘 수 없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그런 원칙과는 관계없이 국립묘지가 조성되기 전 이 땅에 먼저 묻힌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이장했지만 묘역 조성에 크게 문제되지 않아 이장하지 않은 묘지가 2기가 있다. 연안 이씨(延安 李氏) 시조 이무(李茂)의 묘와 사우당(四友堂) 이시담(李時聃)의 묘다. 많은 이들이 사설 묘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이유는 사설 묘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고, 나무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 자주색 테두리로 둘러싸인 부분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대전 유성구 갑동 산 1’에 해당하는 국유지다. 그곳에서 왼쪽 노란색 표시 지점이 연안 이씨 시조 묘이고, 가운데 붉은색 표시 지점이 사우당 이시담의 묘다. 카카오맵 갈무리. ⓒ
연안 이씨의 시조 이무의 묘는 신선봉 아래, 두리봉과 장사병7묘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현충원에 조성된 묘역뿐 아니라 보훈둘레길과도 떨어져 있어서 종손들도 찾기 어려워한다. 둘레길 4코스에서 두리봉과 신성봉 사이 계곡이 나오는데, 이 계곡 위로 이무 장군 묘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100여m 올라가면 되지만 평소에는 진입금지 구역이다.
원래 이무의 묘소는 이곳이 아니다. 1821년에 연안 이씨 종원 이문우(李文愚)가 시조묘를 찾기 위해 여러 수소문을 한 결과 황해도 연안부 서편 비봉산 옥녀봉 아래 은일동(隱逸洞)에서 시조묘를 찾고, 혼유석과 상석 밑에서 '연안백이무(延安伯李茂)'라고 쓰여 있는 지석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후 분단으로 인해 시조 묘를 찾아갈 수 없게 되자 1954년에 판사공파 사우당공계의 종산이 있는 당시 충남 대덕군 유성읍 갑동리에 제단 성격의 단소를 봉분을 갖춘 형태로 만들었다.
▲ 연안 이씨(延安 李氏) 시조 이무(李茂)의 묘. 실제 묘라기보다는 제단 성격의 단소(壇所)를 봉분을 갖춘 형태로 만들었다. ⓒ 임재근
현재 묘지석은 연세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연안이씨 문중은 매년 10월 3일 유성구 갑동에 있는 연원사에서 시제를 지내고 현충원내 장군의 묘소에 들러 참배를 하고 있다.
이시담(李時聃, 1584~1665)의 묘는 장군 1묘역 278번 묘 옆 대나무 사이로 접어들면 나오는 보훈둘레길 3코스인 노랑길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다. 과거에는 탁 트였던 이시담의 묘도 앞에 현충원이 조성되면서 나무가 심어지고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3구간 출발점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어 대나무 숲을 지나면 오래된 비석 하나가 나온다. 그 비석 뒤로 묘가 있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귀(貴)의 아들이자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다.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형을 도와 원종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다. 후에 충주목사,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 장군 1묘역 278번 묘 옆 대나무 사이로 접어들면 보훈둘레길 노랑길이 나온다. 그곳에 들어가면 바로 사우당 이시담의 묘를 발견할 수 있다. ⓒ 임재근
대전국립묘지(현 대전현충원) 예정부지였던 갑동은 150여 세대, 5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연안 이씨 집성촌이었다. 대다수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포도를 재배하거나, 닭이나 칠면조 등 가금류를 키우기도 했다. 토지가 수용되면서 58세대는 인근에 조성된 새마을 동네로 이주했고, 28세대는 덕명동으로 이주했다. 나머지 60여 세대는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동네에는 연안 이씨 묘소가 많았는데 모든 묘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주하더라도 시조 묘만은 존치코자 했던 연안 이씨 문중의 간곡한 진정으로 다른 묘는 모두 이장하는 조건으로 이시담의 묘를 포함해 2기의 묘는 그대로 존치할 수 있었다.
댐이 만들어지면서 마을 전체가 수몰되는 경우처럼, 국가정책과 국책 사업으로 고향에서 쫓겨나고 고향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많은데, 국립묘지 조성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국립묘지에는 사설 묘를 둘 수 없는 것이 원칙이라 하지만, 대전현충원 내에 위치한 2기의 사설 묘를 통해 그곳도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도로공사로 오래된 고목들이 잘려나가는 게 아니라 아름드리나무를 살리기 위해 우회시키는 길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도 함께 든다. 또, 분단으로 인해 황해도 연안의 시조 묘를 갈 수 없어 제단 성격의 단소를 설치한 사실을 통해 분단의 아픔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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