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처럼 말하는 세상에게
이번 방학만큼은 목표와 계획이라는 스위치를 잠시 꺼둡니다
살면서 늘 특별한 날만 꿈꿔 왔는데 지나고 보니 평범한 날들이 가장 특별한 날들이었어요. 작고 하찮은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는 하찮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말]
▲ 온전한 쉼표를 위하여 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또 불안이 스멀스멀. ⓒ 조영지
오고야 말았다. 방학.
아이들에겐 꿀 같은 시간이겠지만 엄마들에겐 그다지 반갑지 않은 날들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방학은 정말 꿀일까? 그것은 순전히 어른들의 착각이라는 것을 얼마 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수업 중에 아이들에게 "방학이라 좋겠다. 너넨"이라고 했다가 억울한 백성이 원님에게 고하듯 원성만 잔뜩 듣게 되었다.
"엄마가 방학 특강을 엄청 신청해놨어요. 하기 싫은데..."
"학원 숙제가 너무 많아요. 선생님은 제발 숙제 안 내주시면 안 돼요?"
아이들의 반응이 뜻밖이어서 좀 당황했다.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이라도 되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일기도 했다. 방학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 기간 동안 수업을 쉬는 일. 주로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 추위가 심할 때 실시한다"라고 네이버 사전에 기재돼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전적 의미도 무의미해진 지 오래. 방학은 쉬는 날이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는 날들로 바뀌어 버렸다. 나라고 다를까? 나 역시 방학과 동시에 아이들을 무작정 놀릴 순 없다는 학부모적 관점에서 학원 특강과, 체험 수업을 기웃대고 방학 계획표를 작성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아이들이 빈둥빈둥 노는 걸 두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던 탓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 발견한 재능
며칠 전, 고등학교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졸업 후 따로 연락은 하지 않고 서로의 카톡 프로필 사진만으로 안부를 짐작하던 친구였다. 얼마 전 내가 출간한 책 소식을 듣고 축하 차 먼저 연락을 해왔는데,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가 현재 미술학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역시,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웃긴 건 그 친구도 내가 작가가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우리에겐 무슨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던 건가? 자리라도 깔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쉬는 시간마다 그렇게 그려대더니..."
"너도 그렇게 써대더니...ㅋㅋㅋ"
쉬는 시간마다 뭔가를 그리고 있는 친구,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고 있는 나.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일들이 서로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그렇게 아귀를 맞추고 보니, 점심시간마다 캔 커피를 사러 달려가던 친구는 카페 사장님이 되었고, 반 아이들의 머리를 열심히 땋아주던 친구는 미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거 좀 소름이지 않은가? 이것은 꿈을 가져라, 꿈을 위해 노력해라, 라는 말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순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우리가 행하는 일이 진짜 자신의 재능과 미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란 없다. 방학마저도 숙제에 쫓기고 학원에 쫓기며 자신을 들여다볼 짬조차 없다. 나도 공범인지라 괜스레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매번 촘촘하게 계획을 세우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져서 아이를 닦달하던 나였다.
아이들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알게 모르게 스스로 주입하고 있었다. 내가 쉰다고 말할 때도 깊숙한 내면에선 '이렇게 게을러도 될까?'라는 불안감과 '나는 정말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인간인가 봐'라는 자기 실망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이렇게 나태한 가족이 있을까? 하지만
▲ 시간부자는 무엇을 하는가? 딸 아이의 쉼표는 덕질이네요. ⓒ 조영지
한 번은 서점에 갔다가 나처럼 살다 간 이 세상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 잔뜩 안고 돌아온 적이 있다. 하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미라클 모닝을 해라. 유튜브를 해라. 책을 읽어라. 건강식을 먹어라. 아이를 이렇게 교육해라. 부동산을 공부해라. 주식을 배워라 등.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난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건강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존재가치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는 이제 뭔가를 계속해서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 지겹고, 버겁고, 힘들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할 자유를 갖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시간들이 간절하다.
혹자는 부지런히 자기 계발을 해야만 나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믿는다. 시간과 불안에 쫓기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 빈둥빈둥하는 것.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이번 방학만큼은 목표와 계획이라는 스위치를 잠시 꺼두고 아이들과 나,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순도 100프로의 쉼표에서 과연 나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시간의 파도를 탈 것인가? 가만히 그 시간에 자신을 맡겨 보기로 했다. 우리 가족의 현재 모습을 살짝 공개하자면 나는 이렇게 계속 썼다 지웠다 하고, 딸아이는 하루 종일 뭔가를 만드느라 분주하고 사춘기 아들은 음악을 들으며 침대에 누워 하늘을 본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이보다 나태한 가족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심심한 방학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이 허비되는 시간일지 채워지는 시간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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