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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로 돌아가기 싫어요" 어느 X세대의 변

우리도 신세대였던 시절이 있었다

등록|2022.08.08 14:20 수정|2022.08.08 14:20
X세대 중년 남성 4명이서 글쓰기 모임을 결성했다! 시민기자 그룹 '꽃중년의 글쓰기'는 이들의 '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얼마 전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시간이 남아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한증막처럼 더운 날씨에 시원한 카페라테 한잔을 마시며 열을 식혔다. 그때 우리 중에 가장 어리고 유일한 30대인 김 대리가 불쑥 말을 꺼냈다.

"혹시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들 가시겠어요?"

그 질문은 잔잔한 호수가 같던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시 돌아가 첫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이과장 외에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고 나는 싫다. 군대도 가야지, 취업도 해야지, 더구나 연애와 결혼까지. 그걸 또다시 하라고.... 차라리 늙고 쭈글쭈글한 지금이 더 낫다."

김 과장의 말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다. 생각해보면 20대는 모든 것이 불투명한 유리병 같았다. 물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넘쳤고, 도전의식이 충만했었다. 지금 희끗희끗한 머리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바라보면 그때의 생생한 육체가 살짝 그립긴 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X세대로서 추억의 90년대를 떠올리게 만든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 tvN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아내와 함께 보며 그땐 그랬지 하며 1990년대의 추억을 곱씹었다. 그러나 젊음에 관한 잠깐의 그리움은 현실의 문제들에 금세 묻혔다.

이어진 우리의 대화는 새로 들어온 신입 직원들의 이야기로 흘렀다. 아마도 그들 역시 어딘가에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귀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우리도 한때는 X세대로 불렸다

나는 1990년대 청년기를 보낸 X세대이다. 아직은 대학에 낭만이 남아있던 시절, 수업 땡땡이치고 고갈비 집에서 낮술에 막걸리를 마시며 어설픈 개똥철학을 늘어놓곤 했다. 그때만 해도 4학년 선배들은 속속 취업 소식을 전해왔고, 나중에 할 것 없으면 공무원이나 한다며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쳤었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일거리가 넘쳐나는 고도성장의 중심에 있었다.

꽃길만 펼쳐질 것 같은 밝은 장래에 어두운 장막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97년 IMF라 불리는 경제 위기가 닥쳤다. 그 여파는 조그마한 사업을 하던 아버지에게까지 미쳤고, 더구나 평소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던 40년 지기 친구에게 보증을 섰던 어머니로 인하여 가사가 급격히 기울었다. TV에서만 보았던 빨간 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었고, 빚쟁이들도 수시로 집 앞으로 찾아왔다.
 

IMF90년대 말, IMF라 불린 외환위기가 대한민국에 찾아왔다. ⓒ MBC


그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곧바로 휴학하고 군대를 택했다. 최소한 2년 동안은 집에 부담을 주지 않고 먹고 자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접고, 동네 근처에서 가게를 시작했고, 누나는 취업해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때부터 과외, 편의점, 일용직 노동까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행히 도망갔던 어머니의 친구분이 잡혀 빚도 일부 청산할 수 있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가족 모두 똘똘 뭉쳐 힘든 시기를 버텼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들어서니 벌써 20대 중후반이 다 되었다. 몇 번의 계약직을 거쳐 30대 초반이 돼서야 정규직이 되었다. 변변찮은 남자친구를 떠나지 않고 기다려준 그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와는 결혼의 마지노선까지 왔으나 언뜻 말도 꺼내지 못하고 속만 태웠다.

그때 아무것도 몰라서 결혼했다는 지금의 후회 섞인 아내 말처럼 사랑 하나만 믿고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채 20평이 안 되는 방 두 칸의 빌라를 얻었다.

30대는 그야말로 치열했다. 직장에서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일로 전쟁터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 상황에 아이가 태어났고, 기쁨도 잠시 부모가 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던 아내와 나는 어찌할 바도 모른 채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그저 쳐다만 보아도 좋았던 신혼은 짧게 끝났고 직장과 육아로 지친 우리는 수시로 서로에게 날 선 감정을 드러냈다.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아내는 육아 휴직을 마친 후 복귀하는 시점에 고민 끝에 퇴사를 결정했다. 복직하면 아이가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적어도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직접 키우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동의했다. 나 역시도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아이를 위해서는 그랬으면 했다. 프리랜서로도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 아내의 직업 특성도 결정에 도움이 되었다.

그사이 우리가 사는 빌라와 빌라 주변으로 재건축이 결정되었다.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쯤 이주를 해야 했고, 인근에 살던 처가댁의 합가 제의에 함께 살게 되었다. 늘 배려 가득한 장인, 장모님 덕분에 감사히 잘 살았지만, 보리가 서 말이라도 처가살이는 하지 말라는 말처럼 때론 불편함도 감수해야 했다. 아파트가 완공돼서도 전세를 주고 처가댁과 계속 함께 살다가 2년 전에 그 집을 처분하고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 세월이 어느새 10여 년이 다 되었다.

X세대 IS BACK
 

X세대여 힘을 내자어느덧 세대의 허리가 된 X세대. 삶이 힘들지만 힘내길 바란다. ⓒ Unsplash


최근에 동네 친구들과 만났다. 초등학교에서의 인연이 이어져 코 흘리던 시절부터 지금의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까지 반평생을 알고 지냈다. 방황했던 10대, 고민 많던 20대, 정신없는 30대를 함께 보냈다. 만나면 직장 고민, 아이들 고민이 주였던 친구들이 이제는 골프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나는 골프는 치고 있지 않지만, 글쓰기란 좋은 벗을 만났다. 직장에서도 다들 어느 정도 중간 위치가 되었고, 아이들도 청소년기에 다다랐다. 숨 쉴 만하니 취미활동에 다시 열중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 전에는 만나면 늘 무겁던 분위기도 최근 들어 많이 밝아졌다. 여유가 생겼다랄까.

한때 기존의 가치나 관습에서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만 집중한다고 기성세대의 우려를 받던 X세대가 벌써 40대가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MZ세대를 예전에 그랬듯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니 결국 역사는 반복됨을 느낀다. 20대 때는 마흔쯤 되면 무언가를 크게 이루었으리라 생각했건만 실상 그렇진 않다. 다만 인생의 필수과제를 어느 정도 끝낸 지금, 전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으리라.

돌이켜보면 국가의 경제 위기를 몸소 체험했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중심에 있었고, 특히 가부장적인 가치가 내재한 기성세대를 보고 자랐으면서도 급격한 변화 속에 새로운 가치를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어중간한 낀 세대로서 고충도 많았다.

그 과정을 모두 거치며 어느덧 세대의 허리이자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윗세대의 좋은 점을 잘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이 부끄럽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X세대의 중요한 과제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쉽지만은 않은 삶을 살아가는 X세대에게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로서 힘내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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