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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언양 소년회 창립하다

일제 식민시대 언양·울산지역 소년 운동사(6회)

등록|2022.08.10 16:37 수정|2022.08.10 17:13
일제 식민시대에 가장 소년운동이 활발한 곳이 언양이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은 4월 2일 언양을 시작으로, 4일 병영, 8일 남창에서 일어났다. 언양은 일제의 강점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항일, 반일 운동이 있었던 지역이었다.

언양 항일운동의 산실 '언양 청년회' 활동가들

언양 4・2만세 사건은 언양읍 밖의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일제에 항거한 사건이었다. 사건 이후 언양에 청년회가 창설되었다. 언양청년회에는 만세운동 관련자가 석방되거나 검거를 피한 인물들이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한 1921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언양 청년회에는 김기오・신학업 두 거두가 있었다.

김기오(金琪午, 1900~1955)는 언양향교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천교도인이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개벽』을 구독하였고, 『천도교회 월보』 130호(1921년 6월호)에 「동경에 있는 천도교청년회원 제씨에게」, 134호(1921년 10월호) 「우리는 무엇으로셔 주장할가」라는 글을 썼다. 그는 1920년경부터 천도교인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신문화 보급 순회 강연대를 조직 운영할 때 김기오는 신학업, 김원룡 등과 각 면을 순회 강연하였다. 1923년 언양청년회를 일신하여 회장제를 간사제로 할 때 재무부 간사로 활동했다. 언양지역 소작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남부노동회 간사를 역임하고 언양여자야학 강사, 언양소년회 단장, 신문 기자로 활동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7년 양산 신간회 활동을 하였다.

일제 탄압으로 언양에서 양산으로, 경성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 후 경성에서 출판업을 하였고, 해방 후 대한교과서를 설립하여 경영하고, 1955년 『현대문학』을 창간하고 발행하였다. 조선일보 언양분국 총무 시절 오영수는 신문 배달을 하고, 이런 인연으로 훗날 현대문학 창간 후 언양출신 소설가 오영수가 편집장을 하게 되었다. 그는 80년대 민중판화가 오윤의 부친이다.

신학업(신주극, 1901~1975)은 1917년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7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마쯔시다철공소(松島鐵工所) 직공 생활을 하다가 10월에 귀국하였다. 1918년 1월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상과 야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도쿄 2・8독립선언서와 관련 활동으로 퇴학을 당했다. 이때 양산의 김철수(1893~1986)가 게이오대학에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기에 교류하였다. 훗날 신학업은 서울의 김철수 집에서 점원 생활을 하였다.

1919년 10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조사원(調査員) 신주극(申周極)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조사원은 국내 각 지방의 유력자(有力者)·재산가(財産家)·학교·종교 실태 등을 조사하기 위하여 임명하였는데 각 군에 몇 명씩 두었다. 그는 울산군 담당이었다. 조사원은 조사된 사항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이것은 국내의 실태를 파악하며 또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펴는 기반을 터득하려고 조사했다.

1920년 11월 조선으로 돌아와 잠시 언양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11일부터 18일까지 언양청년회에서 신문화 보급을 위해 지방순회 강연대 연사로 활동하였다. 다시 1922년 일본으로 가서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에 입학을 한다. 이때 그는 공산주의자를 만나고 사회주의 강연을 들었다. 동경에서 사회주의 잡지 『해방운동』 발행에 간여했었다.

이듬해 7월 귀국하여 1923년 9월 30일 언양청년회에서 노동야학을 개설한다. 당시 50여 명이 참가하고 정인목・정인섭 형제와 함께 연사로 활동하였다. 또 1923년 10월 언양청년회에서 언양소년회를 창립할 때 신주극(신학업)은 개회사를 하고 김기오는 단장을, 신말찬(신고송)은 임원을 맡았다. 또 1923년 11월 이후 동아일보 울산지구 기자와 언양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한다.

이때부터 그는 언양 울산의 각종 사회운동 단체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각 단체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그는 일본 유학출신으로 언양지역 최초의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다. 1925년 경성청년회(1924.12.11. 창립) 활동을 하면서 잡지 『해방운동』 발행 운동을 하였고, 이때 양산의 전혁[전병건], 울산의 조형진과 같이 활동하여 1920년대 중반 이후 언양 사회운동가들이 양산 사회운동가들과 연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언양의 김기오와 신학업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일제 식민시대 언양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주동적 인물로 신학업의 형 신영업과 함께 언양 사회운동 1세대였다. 언양청년회원은 언양공보 1회(1915.3월 졸업) 박시하ㆍ오석근ㆍ최한홍, 2회 정인목ㆍ신영업, 3회 정인섭ㆍ신학업(신주극), 4회 김남주 등이 청년운동 1세대에 해당했다. 알려진 소년단원은 이명돌(5회), 김노시(5회), 김용대(5회), 신말찬(신고송, 6・10회), 이야개(이동개, 7회), 정홍조(8회), 김경택(8회), 김두이(9회), 신근수(8・10회), 신돌이(신시돌, 9・10회), 하창윤(9회), 하봉철(10회), 오영수(11회), 오호근(14회), 박복순(14회) 등이 있다.

언양공보 출신으로 소년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다. 이들은 1920년대 언양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다가 1930년이 되면 울산, 양산지역으로 활동의 반경을 넓히고 또 몇몇은 전국적 지명도를 가지게 되었다.

1923년 언양소년회 창립하다 
 

언양소년회 창립1923년 10월 6일 언양 소년회 창립되었다. 언양지역 소년단체 항일운동의 중심이 되었다.(조선일보, 193.10.10.) ⓒ 조선일보


1919년 3월 만세운동을 계기로 창립된 언양청년회의 김기오, 신학업, 이동개 등이 중심이 되어 1923년 10월 6일 오후 3시 언양소년회가 언양청년회관에서 창립되었다. 언양청년회의 신주극(신학업, 언양공보 3회)이 개회사를 했고, 최수한(1회)이 취지 설명을 하며 결성식을 주도했다. 단장은 언양청년회의 김기오였다.

소년회 임원은 신말찬(신고송, 6・10회), 이명돌(5회), 김노시(5회), 하창윤(9회), 김용대(5회), 정홍조(8회) 등이었다. 언양공보 5회 졸업생(1919.03.23.) 이후의 학생들이 주축인 이유는 그들이 바로 1919년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참가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경험은 한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다. 언양청년회의 지도에 설립한 소년단은 청년회의 목적의식이 개입한 조직이었다. 1929년 당시 언양소년회원의 자격은 언양면 거주자로 7세 이상 18세 미만의 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남녀 구분없이 가입하였다.
 

언양불교소녀회 기념가 언양불교소녀회는 지역 소녀단체로서 행사 규모 뿐만 아니라 기념가를 불렀다는 측면에서 주목할만하다. (『불교』, 1927년 제30호) ⓒ 불교

언양소년소녀가극 성황1924년 1월 언양소년소녀가극은 극작가 신고송의 첫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훗날 카프문학운동의 계기는 언양의 소년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조선일보, 1924.01.11.) ⓒ 조선일보


1923년 10월 언양소년회가 창립할 당시에 언양불교소년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창립 5주년 행사를 1928년 10월 10일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개최하고 천여 명의 청관객이 있는 가운데 가극대회를 하였다. 창립 6주년 행사를 1929년 10월 18일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기념가극회를 개최하고 소년소녀의 유희와 합창, 독창이 있은 후 「어떠한 제복의 인정(人情)」 극을 하는 중 언양주재소 임석 경관에 의해 중지 해산을 당했다.

그런데 『불교』 잡지에는 1926년 9월 9일 언양포교당(현 화장사)에 있는 언양불교소녀단이 언양청년회관에서 창립 2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1929년 4월 11일 언양불교소년단의 주최로 언양청년동맹회관에서 언양불교소년단 창립 6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것을 보면 언양불교소년단은 1923년 4월에, 언양불교소녀단은 1924년 9월에 창립하였다. 당시 언론기관이 소년단과 소녀단을 구분이 헛갈렸거나, 소년단에 소녀회원이 있어 소년단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1923년 12월 27일 조선일보 언양 지국이 생겼다. 당시 신문 축하 광고에 등장한 언양지역 인물과 단체를 보면 당시 언양지역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언양 동부리 김홍경과 배인찬(해방 후 농지개혁을 한 배기철의 부친), 남부리 약종상 정택하(정인섭의 부친), 상남면 양등리 김석한ㆍ김영한 형제, 등억리 김찬희, 하북면 지내리 성충갑 등 지역 부호의 이름이 있다.

상남면 거리의 사립양정강습회, 두서면 구량리 보신강습소(소장 김원집, 교사 장근덕 김차곤)와 보신강습소 우리학우회, 삼동면 금곡리 낙영의숙, 화잠리 둔기의숙, 둔기리 진명강습회, 중남면 노동야학회연합회, 중남소년학우회, 중남수리조합창립사무소, 농촌공조회, 언양소년단, 언양청년회, 천도교울산군교회, 언양공보, 두동공보 등이 축하 광고를 하였다.

언양 지역 소년단체들의 활동은 당시 조선일보 언양지국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소년운동과 청년운동 보도가 많았다. 언양만세운동 주축자로 구성된 '사시회(四時會)'가 1925년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일보 언양지국을 운영했다. 이규장은 경영을, 김기오가 총무를 할 때 어린 오영수는 신문배달을 하였다.

신고송의 언양 소년가극 운동

1923년 10월에 창립한 언양소년단은 1923년 11월 소년단의 취지와 필요를 선전하기 위하여 17일 추계대운동회를 하고 24일 소년소녀가극 공연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운동회에 몰려들어 가극을 다음 해로 연기했다. 1924년 1월 첫주에 있었던 일을 신고송은 『어린이』 1924년 1월호에 「밧브든 일주일간」을 발표했다.

신고송은 1월 1일(월) 가극회 연습을 생각하며, 이렇게 노력하면 언양소년단도 영영 발전하겠다고 생각했다. 2일(화) 무대에 사용할 소나무를 구하고, 무대를 꾸몄다. 3일(수) 정오 가극회 단원이 모여 시내에 광고를 돌렸다. 밤에 동화 암송과 극 「밥 강엿」과 「쌀기와 금깡자」 그리고 소화(笑話, 우스운 이야기)를 책임있게 하였다. 4일(목)에는 해가 질 때까지 연습을 하고, 동화 암송과 극 「홍그래비[방아깨비]와 지렁이」, 희극 「흑」의 여러 가지를 하였다.

가극을 마친 뒤 만세를 세 번 부르고 역자와 위원의 위로회가 있었다. 이번 계획의 성공에 기뻐했다. 6일(토)은 지난 닷새동안의 피로를 풀기 위해 종일 쉬었다. 7일(일) 저녁 아홉시에 청수를 모시고 조선 소년, 우리 언양 소년의 전도를 위해 기도하였다. 청수를 모시고 기도함은 전통적 또는 천도교적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24년 1월 3일과 4일 양일 오후 8시에 언양소년단 일동과 소녀학생 10여 명이 가극회(歌劇會)를 조직하여 언양공립보통학교에서 성황리에 소녀소녀가극회를 하였다. 설립된 지 3개월도 지나지 못함에 따라 사회적 사업으로는 이번이 처음으로 일반의 열혈적 환영은 참으로 상상 이외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소년단 간부들의 많은 노력으로 소년단의 취지를 철저히 선전한 바 일반 관중들은 소년단의 필요함을 감각하여 동정금이 1백여 원에 달하였다.

소년단은 동정금으로 이번 가극의 비용을 제하고 남은 돈으로 단원들이 열망하는 운동기구와 기타 필요품을 설비할 예정이다. 가극회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지역주민의 문화 계몽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소년회의 취지를 알리고 재정확충의 계기가 되었다. 이 가극회의 성공에는 신고송의 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신고송의 입장에서 이 당시의 경험이 훗날 극작가의 길로 걷게 한 계기가 된 듯하다.

1924년 5월 1일 언양소년회를 창립 이후 첫 어린이날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세계적으로 조선적으로 기념할 날이었다. 노동자와 어린이를 사람답게 다 같이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자는 메이데이와 어린이날이 두 번째로 동시에 전국적으로 열렸다. 하지만 경성지역은 노동집회와 어린이 행렬이 일체금지되었다.

천도교당에서 소년운동협회 주최의 어린이날 축하회에 남녀소년 수천 명이 모여 성대한 행사를 하였다. 신문에서는 "새조선의 싹을 위하여 어린아이에게 새 옷을 입히고 이 명절을 즐겁게 지내자"고 하고, 1일은 어린이 날을, 2일은 어머니 대회, 3일은 어버지 대회를, 4일은 공휴일이라 동대문 밖 상춘원 넓은 동산에서 어린이 대원유회를 연다고 보도하였다.

소년운동협회는 130여 전국 소년단체에게 30만 장의 선전서를 배포하였다. 경성과 달리 지방에서는 어린이날 시위행렬이 있었다. 5월 1일 언양 각 소년단체가 모여 어린이날 기념행사에 소년단장 김기오의 연설이 있은 후, 오후 1시에 시위행렬을 시작하여 언양 시내를 한 바퀴 돈 후 3시에 유감없이 해산하였다. 그런데 울산지역의 어린이날 행사는 보도가 없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덧붙이는 글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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