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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자체가 고통, 밴드가 보여주는 레바논 현실

[리뷰]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사이렌>

등록|2022.08.18 09:54 수정|2022.08.18 09:54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제 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경쟁부문: 국제경쟁 대상 수상한 영화 <사이렌>. ⓒ 리타바그다디


베이루트 외곽에서 활동하는 릴라스와 그녀의 스래시 메탈 밴드 멤버 셰리, 마야, 알마와 타티야나에게는 큰 꿈이 있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기대를 품고 참가한 영국의 음악 축제도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던 릴라스는 붕괴 직전의 레바논을 목격한다. 설상가상으로 릴라스와 동료 기타리스트 셰리의 복잡한 우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고... 밴드, 국가, 꿈 모두가 위기에 처한 릴라스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사이렌' 속 레바논의 한 뉴스 앵커는 스래시 메탈 밴드, 슬레이브 투 사이렌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흔히 메탈 음악은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당신들은 일상적인 소재를 가사로 다루냐고. 그러자 리더인 릴라스는 이렇게 답한다. 조부모들이 태어난 이래로 레바논은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레바논에서 사는 일상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주제라고 생각한다고.

이 문답은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국제 경쟁 부문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리타 바그다디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사이렌'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준다.

일상에 힘을 주니 사회가 보인다

사실 '사이렌'이 단지 릴라스와 셰리를 비롯한 밴드 멤버들의 개인사만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도입부에서부터 알 수 있다.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점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만큼, 이 작품에 레바논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음은 명백하다.

그런데 영화는 레바논의 사회적 문제점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는다. 대신 밴드 멤버들의 일상에 주목한다. 돈이 되지 않는 밴드가 영국 글래스턴베리에서 열리는 록 페스티벌에 가서 유명세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나 릴라스가 동성 연인을 두고 어머니와 벌이는 갈등이 스크린을 채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도 일하는 랄라스의 모습, 앨범에 들어갈 노래의 키나 템포를 놓고 세리와 릴라스가 충돌하는 것도 그들의 일상을 장식한다.

하지만 일상 자체가 고통이라는 릴라스의 말대로, 힘을 주지 않아도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일상에서는 레바논의 사회적 문제가 엿보인다. 좀처럼 성공하기 힘든 메탈 밴드의 현실은 표현의 자유조차 보장될 수 없는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의 사회문화적 측면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릴라스와 엄마의 말다툼도 동성애를 사회악으로 치부하는 억압적인 현실의 단면을 보여준다. 릴라스와 셰리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성밴드는 대타가 없다"라는 말은 여성으로서 메탈 밴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비주류적인 활동인지를 보여준다. 정권교체를 원하는 시위대 옆에서 주인공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기에 오히려 일상과 사회가 연결되는 지점은 흥미롭다. 이러한 다양한 갈등 덕분에 '사이렌'은 다큐멘터리지만 극영화 같기도 하다.

일상과 사회를 잇는 메탈 밴드와 음악

물론 영화의 의도가 직설적으로 엿보이는 장면이 없지는 않다. 베이루트 항구 폭발사고를 다루는 대목이 그렇다. 이 사고는 레바논의 정치와 경제를 모두 혼란에 빠트린 대형 사고였고, 순전히 사고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테러인지도 아직 불명확하다. 이때 영화는 릴라스와 셰리의 갈등을 이 사건과 곧장 이어 붙인다. 그저 일상적일 수 있는 갈등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레바논의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거대한 폭발처럼 커질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메탈 밴드와 그들의 음악이 갖는 힘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깊어지던 릴라스와 셰리의 충돌은 진솔한 대화 이후 더 끈끈한 우정으로 모습을 바꾼다. 이렇게 밴드 내의 반목이 사라지자 그들이 준비하는 앨범의 트랙 리스트는 멤버 모두가 만족할 만한 명곡으로 채워진다. 밴드가 하나 되자 그들의 문제는 해결된다. 혼자라면 무서울 검고 어두운 터널도 함께 걸으면 그렇지 않듯이.

그래서 무너진 신전을 배경으로 오케스트라와 합동 공연을 펼치는 슬레이브 투 사이렌의 모습 역시 상대적으로 짧게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인상적이다. 혼란스러움과 불안함, 우울함이 가득한 일상을 극복하듯이 다양한 문제가 산적한 레바논 사회도 전진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렬한 메탈 합주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하고 화려한 무대를 꾸미는 슬레이브 투 사이렌이 보이는 엔딩 크레디트 덕분에 그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그들이 '사이렌의 노예'인 이유

특히 밴드 멤버들이 다름 아닌 사이렌의 노예라는 점에서 그 믿음은 더욱 특별하다. 본래 사이렌은 그리스 신화 속 등장하는 괴물이다.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이들은 지중해의 한 섬에서 감미로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잡아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직 오디세우스만이 돛대에 자신을 묶은 채로 사이렌의 노래를 들어 유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이렌과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괴물에 불과했던 사이렌의 존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는 기존 질서를 회복하려는 영웅이다. 그렇기에 그를 유혹해 파멸시키려는 사이렌의 존재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모든 타자를 상징한다. 동성애자나 여성 메탈 밴드 멤버,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대처럼.

즉, 사이렌의 노래는 그저 사회를 위협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당당히 발화하는 주체, 억압되고 무시당했지만 언제나 사회 안에 잠재되어 있던 주체의 목소리이자 힘의 가능성이다. 이것이 '사이렌'의 메탈 음악에 담긴 진짜 힘이자 의미다.

그래서 '사이렌'이라는 노래를 들려주는 영화는 제목부터 마지막 크레디트까지 한 톨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데일리 매거진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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