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 삶고, 3시간 뜸 들이고 3년 발효... "밥상이 좋아야 건강도 좋습니다"
[인터뷰] 도비산 최인순 함초장의 인생이야기, 건강이야기
▲ 도비산 최인순 함초장. ⓒ 최미향
"기계식으로 메주를 쑤는 추세지만 저는 가마솥에서 장작불을 이용하여 3시간 삶고, 3시간 뜸 들이고 3년을 발효시켜 판매합니다. 전통작업을 고집해야 밥상이 좋고, 밥상이 좋아야 건강도 좋거든요.
건강만 허락한다면 언제까지나 내 식구가 먹는다는 마음으로 된장 고추장을 담글 겁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적절하게 판매량을 조절해가면서요. 그래야 행복한 맛을 드릴 수 있거든요."
▲ 된장 고추장을 판매한 일부 금액으로 2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 ⓒ 최미향
- 석천암에서는 해마다 어려운 신도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빠지지 않고 함께 동참하시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참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저는 석천암 주지 스님을 공양하고 있는 공양주입니다.
먼저 저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부처님을 좋아했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늘 몸빼바지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죠. 스님이 되려고 공부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권사님이셨던 친정어머니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어느 스님의 소개로 지금의 석천암 주지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제가 법복을 입고 있는 한 우리 가족 잘 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이 어찌나 멋있던지요. 듣는 순간 '이분과 평생 함께라면 나를 속이는 수행자는 되지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 석천암에서 바라보는 도비산 아래 평야. ⓒ 최미향
어떻게 해서라도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고 싶었던 저였기에 '스님을 살짝 의지하면 절에 들어가 살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했고요(웃음). 그러면서 스님과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만날 때나 결혼이었지 한마디로 공양주와 스님의 관계였지요.
장학금은 좀 부끄럽습니다. 석천암 스님께서 29년 동안 장학금을 주시는 걸 보고 저도 두 명 정도 나누고 있습니다. 뜻있는 신도분들도 조금씩 보태고 있고요. 그래도 지금까지 인연 있는 아이들이 다 잘 되고 있어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아이들이 행복하면 나라도 행복하잖아요. 욕심을 조금만 버리시면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 시인으로 등단한 딸이 너무 대견하다는 최인순 함초장. ⓒ 최미향
- 조심스러운 질문입니다만 자녀분께서 시력장애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별한 교육이 있으신지요?
"딸을 임신했습니다. 제 몸도 약했을 뿐만 아니라 산속에서의 삶이 척박하고 힘들어서인지 7개월도 안 돼서 조산했습니다.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하더군요. 인큐베이터에서 아이를 꺼내 달라고 했습니다. 죽여도 내가 죽이고 살려도 내가 살리겠다고요.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떻게 살릴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지킬까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주사는 커녕 약을 먹어도 나을 기미가 없던 아이가, 아니 우유조차도 먹지 못하던 아이가 모유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 너는 살겠구나'
당시 병원에서는 '집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면 감염이 돼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들기름으로 아이의 온몸을 닦아줬습니다. 한 생명을 살린다는 것.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게 그렇게 힘든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내려면 내 아이에게 물고기를 먹여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겠구나. 어차피 이것은 너와의 싸움이다. 너를 살릴 길은 이 방법밖에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딸의 비위를 맞추기보다 홀로서기를 할 수 있도록 강하게 키웠습니다. 주위에서는 저를 '팥쥐엄마'라고 하더군요. 괘념치 않았습니다. 팥쥐엄마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내 딸이 세상 중심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뭣이 됐던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그런 딸이 어려움 속에서도 글을 참 잘 씁니다. 아픔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싶어요. 글은 치유기도 하잖아요. 처음에는 아이도 '엄마 왜 사람들이 내 시를 안 알아줄까? 난 왜 등단을 못 할까?'라고 고민하더군요. 저는 말했습니다. '난 너의 시가 굉장하다고 본다. 대작이 한 번 나올 거야. 엄마는 꼭 믿고 있다.'
그러던 중 '시인수첩'에 등단하게 됐고, 감사하게도 많은 출판사 대표님들이 제 딸의 시를 알아봐 주셨습니다. 9월 중순이면 드디어 딸아이의 첫 시집이 나와요. 내 아이가 내는 첫 시집인 만큼 자신의 삶 속에서 빚어낸 시어들이 사람들에게 따뜻한 울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도비산 자락에 자리잡은 최인순 함초장의 '도비산 함초 된장'. ⓒ 최미향
- 심려가 크셨겠습니다. 아무래도 자녀분 건강 때문에 먹거리에 관심이 많았을 줄 압니다. 된장·고추장·간장 등을 직접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요.
"석천암 주지 스님께서 7년 전, 병원을 두 군데나 가셨는데 모두 간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누구를 의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절박함을 느꼈습니다. 아이들을 챙기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제 자리를 바라봤습니다. 부처님을 시봉(侍奉)하면서 공양주라는 직책을 얻었습니다. 날마다 밥을 해드리는 일이 저의 본업이었죠. 이걸 살려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서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생을 살아가기에는 제 나름의 벌이가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또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가진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간장을 내리고 있는 함초장. ⓒ 최미향
어쨌든 스님의 병명은 저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서둘러 삼성병원에 예약하고 검진을 받게 된 스님은 천만다행으로 오진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때 저는 스님께 단호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저를 놔줘야겠습니다. 저는 이제 바깥을 좀 나가야겠습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33년 만에 바깥출입을 하게 됐고, 제 또다른 이름 함초장이 되었습니다."
▲ 최인순 함초장이 채취한 함초. ⓒ 최미향
- 일반 된장 고추장 간장이 아닌 함초와 양파 등을 넣어 만든 이유가 따로 있나요?
"사람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서 제 혼을 다 쏟아부은 그런 색다른 음식을요. 그 귀한 것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함초된장, 양파고추장 등이에요.
함초는 바다의 산삼일 정도로 우수한 효능을 알고서 함초된장을 만들게 됐죠. 양파는 농민들에게 조금이나마 판매에 도움이 되고자 양파고추장을 만들었고요. 막상 이 일을 하게 되니까 돈도 생각보다 못 벌어요. 또 각종 서류작성 일이 상상 외로 너무 많고 복잡했죠. 따지고 보면 30년 동안 산에서 살다 보니 무식해져서 더 힘든 일이 많았던 건가봐요(웃음).
▲ 제품을 보면 가슴이 뛴다는 함초장. ⓒ 최미향
처음 3년간은 엄청나게 후회도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바깥세상을 따라잡기에는 산속 생활이 너무 길었잖아요. 그래도 오기가 생겼어요.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단어 아니겠어요(웃음). 다행히 부처님 덕으로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됐답니다.
여담이지만, 발효란 걸 시작해보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나둘 사가더라고요. 이런 소문을 들었는지 시 관계자분이 '하나를 팔아도 허가를 내라'고 해서 그분 덕분에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됐답니다.
'허가를 내서 시작하니 4년 동안은 돈을 못 벌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정식으로 발효된 장을 만들어놓고선 돈을 벌어야지 발효식품이 오늘 문 열었다고 내일부터 당장 돈을 번다는 건 있을 수도 없고요. 그럼 도둑인 거지.
정말 4년 동안 충분히 발효시켜놓고 5년째 되던 해부터 판매를 시작했어요. 하나 팔면 모았다가 항아리 사고, 또 하나 팔면 모았다가 필요한 거 사면서 오늘까지 이렇게 오게 됐답니다."
▲ 함초된장. ⓒ 최미향
- 된장을 판매하면서 보람된 기억이나 잊지 못할 고객이 있다면요?
"하루는 손님이 울면서 전화가 왔어요. '수선화축제장에 나갔다가 된장을 사 왔다'며 '이렇게 맛있게 먹어 본 된장국은 처음'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사실 된장은 다 그 맛이 그 맛 아니겠어요. 울 일까지 있나 싶어 놀라면서도, 누군가 제가 만든 된장을 알아줄 때 '지금 내가 잘하고 있구나!' 보람을 느끼잖아요.
기억에 남는 고객요?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픈 사연인데요. 해미읍성 직거래장터에 아이 5명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가 있었어요. 그 아이들을 키우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제가 보기에도 애들 엄마가 기가 다 빠져서 축 처져 보였어요.
그 엄마가 오시더니 '500g 주세요'라는 거예요. 그 정도면 두 끼도 채 못 먹어요. 순간 '저분이 경제적으로 좀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오늘은 아이들을 이렇게 많이 낳은 보답으로 서비스를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제가 만든 된장을 드시고 '행복해요', '건강해졌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고 더불어 보람을 느낍니다.
저는 항상 생각해요. 적어도 우리 사회만큼은 시간적, 환경적,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할지라도 먹거리 빈곤층만큼은 없어야 한다고요. 음식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날 아이들 엄마를 보며 문득 '없는 사람은 이 된장조차 먹지 못하겠구나'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드리면 자존심이 상해하실 것 같고 해서, 없는 사람도 원하면 제 된장을 지금 가격보다 더 싸게 드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됐어요."
▲ 송화 천일염. ⓒ 최미향
- 무리한 질문인가요? 함초된장 비법이 있다면 한 수 가르쳐주세요.
"서해안 염전 주변에 서식하는 함초를 직접 채취해서 장에 사용합니다. 장에 사용하는 소금은 송화 천일염이에요. 3년 동안 간수를 뺀 후에 장을 담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함초는 바다의 산삼으로 90가지 미네랄이 골고루 들어 있어요.
소금을 많이 먹으면 갈증이 나지요. 하지만 함초는 갈증이 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소금을 잘못 쓰면 장이 쓰거나 썩어요. 그래서 장 담그는 첫 번째 비법은 소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빠뜨리지 못하는 게 또 있어요. 도비산의 햇빛과 맑은 공기에요. 도비산의 정기와 함께 30년 전통방식을 고수합니다. 가마솥에 장작불로 3시간 이상 끓여서 3시간 정도 뜸을 들인 후 메주를 만들어 자연건조 발효시키죠. 모든 재료는 100% 국내산을 사용합니다.
석천암에서 사찰음식을 드신 분들이 '최고로 맛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함초에 10년 된 소금을 씻어서 볶아 섞었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에 넣었으니 얼마나 맛있겠어요."
▲ 로컬콩을 이용하여 된장을 만드는 도비산 함초 된장. ⓒ 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코로나19로 상처받고 힘든 분들에게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 보리밥 한 끼 정성스레 대접해드리고 싶은 것이 2022년 제가 꼭 하고픈 일이랍니다.
또 장류판매가 더 잘되면 좀 더 할 일이 많아지겠죠. 첫 번째가 어려운 분들께 장류를 좀 더 전달해드리고 싶어요. 그중에서도 아동급식 하는 분들께도 이 장류를 전달하여 커나가는 아이들에게 끓여주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답니다.
사실 절에서 일해 가며 하는 사업이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에요.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에 즐겁게 이 길을 가고 있답니다."
시를 쓰는 딸을 위해 한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최인순 함초장. 그녀는 석천암에 작지만 예쁜 카페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전국에 있는 시인들이 마음 뉠 편안한 곳으로, 서로 소통하고 마음 나누는 그런 공간으로.
최인순 함초장의 마지막 말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여름 끝자락이다.
"저와 인연 있는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도록 만남을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이 제일입니다. 늘 건강하세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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