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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등산화를 신고 있는 남자의 비밀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보이지 않지만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

등록|2022.08.29 10:47 수정|2022.08.29 10:47
"산에도 안 가는데 웬 등산화? 그리고 긴바지까지... 안 더워요?"

"아, 이 등산화요? 그리고 긴바지는 그게 그러니까..."


지난 몇 년 동안 거짓말 조금 보태면 1억 번은 듣고 답한 이야기다. 이번 기회를 빌려 내가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법을 깨달은 상징과도 같은 등산화와 긴바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고,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고 했던가? 한마디로 뭔가 부족해야 새로운 게 생긴다는 말이니까 진짜 맞는 말이다.

그럼 잘 갖고 있던 게 없어져서 부족해졌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냥 욕 한 번 하고 잊어버릴 테지만, 만약 그게 우리 신체의 일부같이 꼭 필요한데 다시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병이나 사고로 신체 일부를 상실하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장애인들처럼 말이다.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각인각색 여러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두 가지로 모인다고 한다. 절망하여 좌절해 버리거나 아니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대안을 찾아 나서거나.

내가 처음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결국은 나도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취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두 가지는 결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있었고,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두 가지는 때론 나를 둘러싼 환경이었고 동시에 내 감정이요 의지였다. 그리고 또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나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었다. 어설픈 동정과 좌절이 끌어들인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오라고, 따뜻한 공감과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손길을 내밀어 밀고 당겨주고 있었다.

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두 가지를 오갔다. 점점 내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가면서도 여전히 가끔 이 두 가지 상황에 놓이곤 한다. 그런 두 가지 선택의 상징이 내겐, 무더위 속 긴바지였고, 언제나 신고 있는 등산화다.

짧은 내 글솜씨를 보태기 위해서 아주 잠시만 더 샛길로 나갔다 오겠다.

5단계 감정 변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부정한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고. 그러다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내가 뭔 잘못을 했길래 이러냐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리고 고통이 시작되고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면 타협을 시도한다. 올해만 버티게 해 달라고, 딸 아들 대학 입학은 봐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다시 삶의 불씨를 되살리려 노력한다.

하지만 불치병은 아직 우리 인간의 능력 밖이다. 결국 고통과 좌절 속에 우울에 빠지게 되고, 급기야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쿼블로 로스라는 심리학자가 임종을 앞둔 불치병 환자들을 연구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5단계의 심리 상태를 정리한 것이라는데, 나와 같은 중증 장애인들도 비슷하게 겪는 감정 변화다. 나도 처음에는 나 자신이 마치 죽음을 앞둔 불치병 환자인 것처럼 모든 걸 포기하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증 장애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우리 인간은 모두 불치병을 앓고 있다. 나이라는 불치병 말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5단계의 심리 변화를 겪지 않는다. 죽음을 향한 진행성 질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나와 같은 중증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란 걸 강조하고 싶다.

그럼에도 수용을 제외한 나머지 네 단계는 의미가 있다. 특히 세번째 단계인 타협과 네번째 단계인 우울은 더더욱 중요하다. 아주 가끔은 다시 분노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타협의 단계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장애가 가져온 우울 단계를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는 게 내 솔직한 대답이다. 물론 마지막 단계인 수용과 우울을 오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걸 받아들인 후 다시 우울해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난 걷는 걸 무척 좋아한다. 산과 들을 돌아다니고, 하루 종일 낯선 거리를 걸어도 몸이 겪는 고통과 배고픔보다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런데 망막색소변성증이 조금씩 위력을 발휘하면서 야맹증이 찾아왔고 곧이어 시야가 좁아졌다. 여전히 산과 들, 여기저기 낯선 거리를 헤매기는 했지만 그만큼 내 발톱은 깨져갔고 정강이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그리고 급기야 혼자 걷는 게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 답답했다. 발바닥이 부르트고, 허벅지가 뻐근해지도록 걷고 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 남들은 수영복이나 반바지 입는 바다에서도 난 등산화를 신고 긴바지를 입었다. ⓒ 김승재


그냥 차를 타고 다니라거나, 헬스 자전거를 타라거나,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보라는 동정 어린 조언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말들은 내가 처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줬고, 그만큼 더 우울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정강이 가득한 상처 자국을 감추고 싶어졌다. 누군가가 그 상처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싫었고, 아무 말은 안 해도 혹시 내 상처를 보고 있을 그 시선이 싫었다. 난 아무리 더워도 언제나 긴바지를 입었다. 그러면 상처가 낫고, 그러면 내 감정도 편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점점 더 우울의 늪으로 빠져갔다.

동시에 내 맘 한구석에서는 밖으로 나가라고, 나가서 걸어보라고 부추기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난 억지로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갔다.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해

쉽지 않았다.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시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경사에도 휘청였고, 정말 이상하리만큼 작은 턱에도 발이 걸렸다. 보일 때는 전혀 몰랐는데, 길에는 크고 작은 돌이나 턱이 너무 많았다. 발이 걸리고 발목이 돌아갔다. 무릎이 시큰했고, 가끔은 허리가 아픈 적도 있었다.

잘 포장된 산책로라서 조금 속도를 내 맘껏 걸어보기도 했지만, 참 얄궂게도 작은 턱에 부딪혀 운동화가 벗겨져 날아갔다. 경계면의 아주 작은 높낮이 차이에도 내 발목은 쉽게 돌아갔고 난 주저앉기 일쑤였다. 윤도현이 목청 높여 노래했듯 진짜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했다.

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마다 내 손을 잡아준 가족과 친구들이 미안해하는 걸 보기가 힘들었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안 보이는 주제에 설치고 다니는 게 꼴사납게 느껴졌다. 편하고 안전하게 그냥 머무르면 될 일이었다.

아,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만약 그랬다면 난 지금쯤 아주 깊고도 깊은 우울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을 텐데, 다행히도 난 이렇게 세상을 향해 수다를 떨고 있다. 그건 내 맘속 깊은 욕망을 이해하고 내게 도움의 손길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덕분이다.

부모님은 내 손을 잡아주셨고, 딸과 아들은 어깨를 내어줬으며, 아내는 팔짱을 끼고 함께 걸었다. 도서관이든 산이든 바다든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고, 어디를 가든 시시콜콜 모든 걸 설명해 주려는 친구 같은 누님도 있고, 하루 10km라도 거뜬히 나와 함께 걸어줄 활동보조인분도 만났다.

이렇게 우울이라는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온 나는 신체적 고통에서 벗어날 도구를 찾았다. 바로 등산화였다. 발목까지 받쳐주는 튼튼한 등산화는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었고, 웬만한 삐끗거림도 버텨줬다. 더 이상 고통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도시의 복잡한 길을 걸어도, 한여름 무더위 속을 걸어도, 조용한 산책길을 걸어도 난 등산화를 신었다.

난 그들의 도움으로 이제 웬만한 산길도 간다. 난 어디든 갈 수 있다. 비록 여전히 내겐 너무 위험한 길이라고 말리는 이도 많고, 절대 데려가려 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두 다리로 안 된다면 기어서라도 갈 용기와 의지가 있다. 이게 바로 내가 이 새로운 세상을 살면서 알게 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렇게 떠들게 된 이번 여름, 난 다시 반바지를 입었다. 이제 더 이상 그 상처가 부끄럽지 않다. 그건 그냥 상처일 뿐이니까.

아마도 다시 우울로 돌아가는 일은 드물 거라 믿으며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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