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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하면 전봉준만? 여기 이 동상을 보세요

새롭게 단장한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기

등록|2022.09.05 10:55 수정|2022.09.19 11:39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 교과서에 기록하고, 당시의 현장을 보존하고, 기념물을 세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부러 시간을 내어 답사를 떠나는 이유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공부와 답사를 통한 결실이며, 그렇게 아로새겨진 기억만이 생명력을 갖는다.

교사가 된 후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20년 넘게 근현대사 관련 유적을 답사하고 있다. 매번 놀라는 거지만, 인물의 생가와 묘소, 기념관과 역사 공원 등이 시군 단위마다 한두 개쯤은 있다. 누구 말마따나, 전국 방방곡곡이 근현대사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유적지마다 묘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딜 가든 중심인물의 동상과 기념탑이 한가운데에 우뚝하다는 점이다. 무슨 공식인 양 주차장을 지나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어김없이 정면이나 가장 높은 곳에 동상과 기념탑이 자리한다.

동상과 기념물의 모양새도 틀에 박힌 듯 똑같다. 동상은 인물이 서서 내려다보는 형상이고, 기념탑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뻗어 있는 형식이다. 동상의 크기와 기념탑의 높이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국민의 인지도와 관리 주체의 재정 규모 등에 비례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유적의 터는 넓어야 하고, 건물은 커야 하며, 탑은 높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지방의 유적과 경쟁이라도 하듯 넓고 크고 높게 만들려는 의도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자랑하고 싶어선지 안내판에 면적과 높이를 맨 먼저 적은 곳도 있다.

실상 이는 오랜 군사정권의 잔재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세종문화회관은 북한의 인민문화궁전과 만수대 예술극장의 규모를 능가하는 기념비적 건물을 세우라는 유신정권의 지시로 탄생한 것이고, 한때 동양 최고를 자랑하던 63빌딩 역시 전두환 정권의 입김이 들어간 건축물이었다. 당시 마천루는 경제 성장의 증거였고, 정통성에 갈급한 독재정권의 상징물이었다.

반세기 가깝게 군사정권이 조장해온 문화가 쉽사리 사라질 리 없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무조건 넓고, 크고, 높게 만들려는 관행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것이 역사를 더 잘 기억하는 방법일 리 없는데도, 한 번 굳어진 관행은 규범처럼 인식되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신군부의 야만적인 폭력에 죽음으로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이들이 모셔진 국립 5.18 민주묘지에도 군사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당장 일직선 형태의 공간 구성과 정확히 포개지는 좌우 대칭이 흡사 사열을 준비하는 무대 같다. 무엇보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기념탑은 권위주의적 느낌을 물씬 풍긴다.

물론, 기념탑에 담긴 의미 자체를 폄훼할 순 없다. 두 손으로 씨앗을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이는 이곳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발아했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그렇게 거대한 건축물로 표현할 이유는 없다. 마치 묘소의 상석이 봉분보다 더 큰 모양새라고나 할까.

서두가 길었다. 지난 주말 변화의 희망을 보고 왔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역사 유적인데도, 권위적인 동상도,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기념탑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은 땅에 납작 엎드려 있고, 동상은 마치 연극 무대처럼 꾸며져 있었다. 너무 낯설어서 어색할 지경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서 본 변화의 희망
 

▲ 황토현 전적지에서 건네다 보이는 옛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왼쪽)과 황톳빛의 새 전시관의 모습. 왼쪽 들판에 세워놓은 작은 기둥들은 당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여러 지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 서부원


전북 정읍에 자리한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동학농민혁명 2주갑이던 2014년 반 아이들과 함께 답사한 뒤로 처음이니 햇수로 얼추 8년 만이다. 여느 도시의 수변공원처럼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어 언뜻 유적지라기보다 산책하기 좋은 쉼터 느낌이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유적지 정화 사업이 본격화된 이후의 변화라고 한다. 공식적 용어가 '동학농민혁명'으로 정리되었고 기념일이 지정되었으며 곳곳에 기념관이 지어졌다. 참고로, 지금 교과서에서는 동학농민혁명과 동학농민운동이 혼재돼 사용되고 있다.

최근 이곳에 세워진 전시관과 추모관은 향후 건립될 다른 지역 기념관의 모범으로 손색이 없다. 일단 주변의 자연 풍광을 가리지 않도록 최대한 자세를 낮추었다. 건물 벽도 튀지 않도록 주위의 황톳빛을 그대로 따랐다. 각진 모서리만 아니면 땅인지 건물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건물에 들어가려면 우선 내려가야 한다. 낮은 만큼 걸음걸이도 낮춰야 한다. 내부는 전시관이라기보다 IT 기술을 십분 활용한 첨단 강의실 느낌이다. 서서, 때로는 앉아서 강의를 듣다 보면 어느새 출구에 이른다. 전시물 하나하나 몰입도가 높아 해찰할 겨를이 없다.

전시관을 나와 잠시 숨을 고른 뒤 출구 정면의 추모관에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내부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위패가 가나다순으로 사방 벽에 모셔져 있다. 어두운 정사각형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라도 옷깃을 여미게 될 것이다. 말 없는 공간이 말하는 공간이다.

대지와 합일한 두 건물을 보고 나면 옛 기념관 건물은 유독 구태의연해 보인다. 그래도 당시에는 내로라하는 건축가가 설계한 야심작이었을 텐데 말이다. 전통 기와집을 형상화한 듯도 하고, 언뜻 석굴암 본존불이 모셔진 감실이 연상되기도 하는, 나름 멋을 부린 건물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입주해있는 이곳은 통층으로 된 내부 공간은 넓지만, 관람 동선이 엉성하고 전시물의 내용도 고답적이다. 관리 상태마저 허술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영상물도 있다. 당장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할 성싶다.

건물의 외관도 마치 황토현의 주인인 양 주변의 풍광을 가리고 선 느낌이다. 들판 건너편의 황토현 옛 전적지와 자웅을 겨루려는 듯한 위치도 어색하다. 걸어서 오가기에는 거리 또한 만만치 않아 접근성도 떨어진다. 옛 전적지의 넓은 주차장에는 잡풀만 무성하다.

화장실만 개방되어 있을 뿐, 기왓장을 얹은 옛 건물들은 문이 닫혀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필수 답사 코스였던 이곳의 활용 방안을 서둘러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행인 건 조만간 정비가 될 것이라니 두고 볼 일이다.

영웅 중심의 역사관 벗어난 동학농민군상
 

▲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의 압권. 갓을 벗어던진 지도자 전봉준이 탐학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이끌고 전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기념물이다. 앞에 서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 든다. ⓒ 서부원


썰렁한 이곳에 최근 새 '주인'이 들어섰다. '동학농민군상'이 그것이다. 원래 그 자리에는 전두환 정권이 세운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있었다.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던 작품이다. 동상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한때 전봉준이 전두환의 직계 조상이라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떠돌기도 했다.

상투 튼 화난 얼굴에 도포 입은 차림이 흡사 인심 고약한 양반의 얼굴이었다. 부패한 권세가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소작료 내지 못한 농민을 혼쭐내러 가는 인상이었다. 동상 뒤에 병풍처럼 설치된 부조에는 오동통하게 살 오른 농민들이 소풍 가는 듯한 모습이 새겨져 있어 비판받기도 했다. 이 또한 동상과 함께 철거되었다.

'동학농민군상'의 주인공은 전봉준 한 명이 아니다. 양반의 갓을 벗어 던진 전봉준을 따라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목숨 걸고 나선 수천수만의 이름 없는 농민들을 환조와 부조 형식으로 형상화했다. 익숙한 영웅 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나 수탈당한 농민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다고 전봉준의 위상이 훼손되진 않았다. 높은 대에 홀로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탐학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전진하는 지도자의 결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어서다. 이는 오로지 전봉준만 기억하는 동학농민혁명은 반쪽짜리 역사라는 점을 질타하는 죽비다.

요컨대, 새롭게 조성된 황토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역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역사는 시대정신을 반영해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고, 유적지는 역사 해석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공간이어야 함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러 발품을 팔아 찾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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