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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혈연만 가족? 현실과는 다른 이 법, 고칩시다

설문조사 153건 답변, 집담회 세번으로 물은 '가족'의 정의... 민법·건강가정기본법 고쳐야

등록|2022.09.08 15:20 수정|2022.09.08 15:20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은 2022년 협소한 '법적 가족' 규정을 넓히고, 다양한 가족 실천을 포괄할 수 있는 법·제도·문화로의 변화를 촉구하는 '뚝딱뚝딱,'가족' 법·제도·문화를 다시 짓다'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사업의 일환으로 온라인 설문조사 <국가야, 내 '가족' 여기 있다! :법·제도상 가족규정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와 3회의 주제별 집담회 <뚝딱뚝딱,'가족' 새로 짓기>가 실시됐습니다. 이 기사는 설문조사와 집담회를 통해 모은 시민들의 의견과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기자말]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

가족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기초가 되는 법인 '건강가정기본법'에서 말하는 가족의 의미는 이렇다. 시민들의 사적 삶 전반을 규정하는 민법 제779조에서의 정의는 심지어 더 좁다. 기본적으로는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만을,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 한해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를 가족으로 정의해놨다.

한국 사회 대부분 법과 정책에서, '가족'을 규정할 필요가 있을 때 민법 규정을 끌어오거나 그와 거의 비슷한 정의를 쓴다. 사소하게는 공공도서관의 가족 이용권을 만들거나 처방약을 대신 타오는 데서부터, 크게는 부양가족 공제를 받거나 상속·양도세를 감면받는 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도 안에서 혼인과 혈연관계에만 가족이라는 '특권'을 부여한다.

법률혼 관계의 이성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서, 20대까지는 '화목한' 혈연가족과 함께 살며 부양을 받고 자라나, 30세쯤 되면 결혼을 해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 모든 삶의 양식과 자원이 혈연과 혼인을 타고 되물려지는 구조. 결국 한국 사회 법·제도가 상정하는 '보통'의 삶이란 이런 모습인 듯하다.
 

▲ 어디까지를 가족으로 봐야할까? 4인 정상가족만 가족일까?(자료사진). ⓒ 픽사베이


하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가운데 스스로가 그런 '보통'의 삶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보통'을 위한 제도에서 밀려나고 있을까. 그리고 '보통'의 기준에 의해 일찌감치 닫혀버린 다른 삶의 가능성은 얼마나 다양할까? 어쩌면 훨씬 더 풍요롭고 다정했을지 모를 가능성들.

'해당사항 없음'의 차별, 가중되는 불안

한국 사회의 법과 제도가 특정한 가족만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길 때, 그 틀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제도의 대상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생계와 돌봄이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관계 안에서 알아서 이뤄질 것으로 전제하고 그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최소한의 영역만을 국가가 보조하는 체제는, 다양한 관계를 보장하는 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법적 가족' 만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삼는 구조가 존재하는 한 '법적 가족' 밖의 사람들은 차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돌봄, 노동, 주거, 복지, 행정, 가계, 상속, 장례... 차별이 드러나는 영역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사회적 삶의 모든 과정에서다.

"'법적 가족'이 아니면 연말정산 인적공제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같이 살고 서로 돌보고 부양하는 가족임에도 연말정산에서 인적공제를 받을 수 없어서 금전적 피해를 입는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국가야, 내 '가족' 여기 있다!> 설문조사 답변 중

"직장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함께 사는 프리랜서 친구를 올려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더 화가 나는 건, 저는 부모님과 전혀 왕래하지 않는데도 부모님이 미납한 건강보험료는 대신 내고 있다는 거예요." -<뚝딱뚝딱, '가족' 새로 짓기> 1회차 "우리 서로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집답회 사례 중

민우회는 <국가야, 내 '가족' 여기 있다!> 설문 조사(2022년 5월 25일~6월 15일)에서 '법적 가족' 기준에 따른 제도적 차별을 질문했다. 주거와 돌봄 등 영역의 각종 복지제도, 행정, 재산·장례·상속법에서의 차별 경험을 묻는 객관식 문항에 대해 '관련제도 이용 경험 없음'이란 답변이 높게 나타났다. 설문 참여자들은 각종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상세한 경험을 묻는 주관식 답변 결과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법적 가족'의 기준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애초에 스스로 제도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어서, 그리고 '법적 가족' 중심의 지원 체계에서 그 밖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지분은 너무 작기 때문에, 또는 그런 제도적 혜택이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해서 제도를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제도적 혜택 못 받는 이들... "소외감 느껴", "미래가 두렵다"

"주택 관련 신혼부부 대출이나 특별공급, 청약가점 대상이 아니다 보니 주택 마련은 꿈도 못 꾸고 공공임대주택을 신청한다 해도 1인 가구로만 인정이 되어서 같이 살 공간이 안 된다. 심지어 민간에서도 신혼부부 대상으로 하는 이벤트가 많은데 공공기관에서도 차별을 받으니 막막하고 소외감을 많이 느낀다." -<국가야, 내 '가족' 여기 있다!> 설문조사 답변 중

"아직 장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매번 앞으로의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하는데, 내가 죽으면 또는 내 연인이 죽으면 어떻게 챙겨줄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롭다." -<국가야, 내 '가족' 여기 있다!> 설문조사 답변 중


차별 경험을 말하는 설문 참여자들의 답변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분노와 체념 그리고 불안이었다. 이는 각자가 꾸려가는 삶과 관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각종 복지와 사회안전망 제도 안에 온전히 편입될 수도 없는 데서 오는 감정들이었다.

'법적 가족' 밖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제도적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가족'과 함께 집을 얻거나 대출을 받을 수 없고, 내 '가족'과 함께 이루고 마련한 재산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내 '가족'이 사망해도 장례를 치를 권리조차 얻기 어려운 삶에는 언제나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사회 제도는 그 사회 구성원의 삶의 모습을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혼인·혈연·입양 관계의 '가족'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책임과 권리, 혜택을 부여하는 법과 제도는, 사람들을 강제로, 또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혼인·혈연관계 안에 고착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기존 혼인과 혈연관계 안에 존재하는 위계와 차별의 문제를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더 나은 대안적 관계를 실천하고자 하는 시민의 의지는, 드높은 제도의 벽 앞에서 가로막히기도 한다.

"저는 꼭 혼인과 혈연관계에 얽혀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저렇게 얽매여서 더 불평등한 관계를 초래하게 되기도 하고. 원가족, 혈연관계보다 더 건강한 방식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친밀한 관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더 많은 혜택과 권리들을 부여해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뚝딱뚝딱, '가족' 새로 짓기〉 1회차 "우리 서로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집답회 사례 중

"최근에 친구가 주택청약을 넣었는데 당첨이 됐어요. 완전히 축하할 일이잖아요. 그런데 신혼부부 대출을 받으려고 결혼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 친구는 오래 사귄 연인이 있는데 원래 결혼할 계획은 없었거든요. 제도만 이렇지 않았으면 친구가 결혼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수도 있을 텐데, 그 가능성을 좁혀버린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뚝딱뚝딱, '가족' 새로 짓기〉 1회차 "우리 서로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집답회 사례 중


결국, 협소한 '법적 가족'의 틀은 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시민적 권리로부터 배제하며, 동시에 틀 안에 있는 사람들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실천과 상상력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 혼인과 혈연으로 이뤄져야만 가족일까. 설문조사 결과,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이여도 가족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 pxhere


결혼, 행복이 아니라 행복주택을 위해서?... 실제 삶 반영하는 제도 필요
 
과연 '가족'에 대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국가야, 내 '가족' 여기 있다!> 설문에서는 첫 질문으로 '가족'이라는 관계에 어떤 관계들까지 포함될 수 있는지 물었다. 153건의 답변 안에서도 꼭 같은 답변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질문에 답한 참여자들은 각자의, 또는 가까운 이들의 '가족'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함께 사는 친구를,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할머니를, 또 다른 누군가는 매일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를 떠올렸으리라. 이 모든 각자의 정의를 법에 규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법조항을 아무리 늘려도, 법에 규정된 특정한 '가족'에게만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는 체제가 유지된다면 누군가는 그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법과 제도가 함부로 '가족'을 규정하고 줄 세울 자격이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
 

▲ 〈국가야, 내 ‘가족’ 여기 있다!〉 설문조사 문항 1번 답변 통계. 사람들은 가족의 정의에 자신의 반려동물, 함께 사는 친밀한 관계 등도 포함된다고 보고 있었다. ⓒ 한국여성민우회


법과 제도는 시민들의 삶을 반영하고,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 관계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제도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까?

가장 우선의 과제는 혼인·혈연·입양이라는 협소한 범위에 '가족'을 가두고 있는 법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건강가정기본법, 민법 제779조의 개정이 시급하다. 또한 개개인이 직접 각자의 친밀하고 소중한 관계를 설정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서로를 부양하고 돌볼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을 갖는 관계를 두 사람이 자유롭게 합의하여 등록할 수 있는 제도인 생활동반자법이 한 가지 대안일 것이다. 기존에 '법적 가족'에게만 허용되어오던 수많은 권리들을 '당사자가 지정한 1인'에게 우선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제도의 개선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제도적 변화를 하나씩 만들어가다 보면, 사람들의 실제 삶에 맞지 않던 낡은 '가족'의 틀도 언젠가 허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뚝딱뚝딱, '가족' 법·제도·문화를 다시 짓다>는 한국여성재단이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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