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이 무려 7배... 한국 야구의 특이한 존재들
[김은식의 야구야] 한국 야구 발전의 숨은 주역 재일교포 선수들
그런 변화는 곧 야구를 하나의 진로로 선택하는 학생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는 계기가 됐고, 학생 선수들이 학업보다 야구 훈련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서 민족적 차별에 시달리면서 악전고투하던 재일교포 야구 선수들에게도 또 하나의 선택 가능한 진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 한국야구의 1세대 재일교포 출신 야구선수 배수찬배수찬(왼쪽)은 1957년 재일동포 모국방문경기에 참가한 뒤 1959년 귀국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이끌었고, 실업야구 기업은행 소속으로 그 해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어 현해탄을 건넌 김성근, 신용균, 김영덕과 함께 1960년대 중반 한국 실업야구 판도를 좌우한 재일교포 출신 4인방을 구축하기도 했다. ⓒ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 캡쳐
일본 사회인 팀에서 뛰던 투수 신용균과 포수 서정리가 1963년 9월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팀 주전 배터리로 활약하며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통산 7승 경력의 투수 김영덕이 귀국해 255이닝을 던지고 단 9점만 내주어 0.3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김영덕은 타자로서도 3할 타율로 타격 6위에 오르는 전설적인 활약을 했다.
같은 해 신용균은 24승을 올리며 다승왕이 됐고 1959년에 귀국한 배수찬이 .336으로 타격왕이 됐다. 그 해 우승은 역시 1960년에 귀국한 김성근이 20승을 올리며 배수찬과 함께 활약한 기업은행에 돌아갔다. 그리고 1965년에는 김영덕을 이적시켜 신용균과 원투펀치를 이룬 크라운맥주가 개막 후 10연승을 질주하는 등 26승 9패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네 명의 재일교포 선수들이 리그의 판도를 좌지우지한 셈이었다.
퍼펙트 피쳐 김영덕과 1차 재일교포 영입 경쟁
실업야구팀들이 재일교포 선수들의 영입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1966년에는 제일은행이 낭카이 호크스 2군의 3루수 김동률을 영입했고 한일은행이 긴테스 버팔로스 2군 유격수 허종만(경남고 출신 육군 감독 허종만과 동명이인)을 영입했다. 김동률은 투수까지 겸업하며 1966년 13승으로 다승 3위에 오르는가 하면 1967년에는 도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타격왕에 올랐고, 허종만은 1967년 조선일보가 팬투표를 통해 선정한 청룡야구상 유격수 부문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역시 제일은행이 재일교포 2세 투수 김승리를 영입했고, 1968년에는 기업은행이 투수 한광홍을 선발했다. 김승리는 한 해 뒤 일본 프로야구 니시테츠 라이온스에 스카우트 되면서 돌아갔고 한광홍은 1970년 리그 타격왕에 오르고 1972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투타 양면에서 활약했고 성균관대 감독을 지냈다.
그리고 1970년에는 한일은행이 한큐 브레이브스 등에서 9년간 프로생활을 한 김호중을 영입했는데, 그는 1970년대 내내 리그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로 군림했고 실업팀 한국화장품 감독과 프로팀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를 지냈다.
하지만 1975년 이후 재일교포 선수 영입 열풍은 한풀 꺾이게 된다. 1975년에 과감한 투자를 통해 창단과 동시에 우승을 차지한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가 주니치 출신의 카나야마(金山)와 사회인팀 서농운수 출신의 투수 호시야마(星山)를 창단 멤버로 영입했고 1977년에는 롯데 오리온즈 투수 박덕용을 6개월간 임대해 활용하긴 했지만, 다른 팀들은 잠잠했다.
1975년 3월 24일 재무부 장관 김용환이 은행장회의에서 대대적인 금융계 구태 일소를 공언하면서 본격화된 '서정쇄신' 때문이었다. 관행화되어있던 은행권의 규정 외 수당과 휴가 등이 폐지되면서 임직원 실질 임금이 17%나 하락하고 천 명 이상의 은행원들이 이직했을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많게는 일반 선수들의 5배에 달했던 재일교포 선수들의 몸값은 대부분 다른 항목에서 전용된 '규정 외 지출'에 해당했고, 공기업들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30승 투수 장명부와 2차 재일교포 영입 경쟁
다시 한 번 상황이 바뀐 것은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된 이후였다. 1970년대를 거치며 빠르게 성장한 내수 시장과 소비 문화는 스포츠 산업의 가능성을 확장했고, 프로야구 창설에 참여한 기업들은 '실업야구 선수들의 10배에 해당하는 연봉'을 지급하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실력을 갖춘 재일교포 선수들에게 줄 수 있는 돈의 크기도 그에 비례해서 커진 것은 물론이었다.
▲ 30승 투수, 장명부히로시마 도요카프 소속으로 1978년과 1980년 15승을 기록한 적이 있는 장명부가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입었다. 일본 프로야구의 정상급 선수로서는 한국 무대에 선 첫 번째 선수였던 그는 그 해 30승을 올리며 전설을 남겼고, 각 구단의 재일교포 선수 영입 경쟁에 불을 붙였다. ⓒ 연합뉴스
1983년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에이스로서 네 차례나 10승 이상을 기록했던 장명부가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해 30승을 기록하며 꼴찌팀을 일약 우승후보로 끌어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비록 전성기를 지났다고는 해도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정상급으로 통하던 선수가 한국 무대로 건너온다는 것은 실업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투자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자 이듬해인 1984년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OB 베어스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두 차례나 평균자책점과 세이브 부분 1위를 차지했던 김일융을 영입해 그 해 준우승과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의 주력으로 활용했다.
장명부와 김일융은 계약금과 아파트, 자동차 등의 부대 혜택을 제외하고도 첫 해 연봉으로만 대략 2500만 엔(8500만 원가량) 안팎의 돈을 받았는데 그것은 당시 한국 프로야구 평균연봉의 7배 가까이 됐을 뿐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의 평균연봉보다도 2~3배나 많은 돈이었다.
장명부와 김일융의 성공은 모든 구단들을 자극했고, 경쟁적인 재일교포 선수 영입 경쟁이 이루어졌다. 1984년에는 롯데의 홍문종이 리그에서 가장 많은 안타와 득점을 생산했고 OB는 김일융 대신 영입한 사회인리그 출신 최일언을 잘 적응시켜 꾸준히 10승 이상의 성과를 얻어냈다. 1986년에 빙그레에 입단한 고원부는 기본기에 충실한 타격을 선보이며 1989년 타격왕에 올랐고 1987년에 삼성에 입단한 김성길은 김일융과 김시진이 이탈한 이후 마땅한 대체자를 찾지 못하던 위기의 팀을 수년간 홀로 버텨내는 대들보 역할을 했다.
물론 모든 재일교포 선수들이 한국 무대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히로시마와 난카이 시절 다승왕과 세이브왕을 지내며 장명부, 김일융과 더불어 '재일교포 3대 투수'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언더핸드 투수 김기태는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청보와 삼성에서 각각 9승과 7승에 그치며 기대에 못 미쳤고 송일수, 유고웅, 박창언, 정용생 등 수많은 이름들이 주전으로 자리 잡지 못하거나 몇 경기 출전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 대구의 '황금박쥐' 김일융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1977년과 1978년 평균자책점과 세이브 부문, 1979년에는 탈삼진 부문 타이틀을 따냈던 김일융은 1984년부터 1986년까지 3년간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면서 54승을 올렸고, 1987년 일본 무대로 복귀해 요코하마에서 다시 11승을 올리며 '컴백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해설자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 삼성 라이온즈
특히 1990년대 이후로는 한국 무대로 넘어오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수도 줄었고,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들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1991년 태평양에 입단해 2년간 2할 8푼대의 준수한 타격을 보여준 정문언과 1990년대 중반 이후 삼성과 쌍방울의 테이블세터로 활약한 외야수 김실, 2003년부터 2005년 사이 삼성과 한화에서 주전 내야수로 활약한 고지행 정도를 제외하면 기억될 만한 이름이 거의 없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에 한국과 일본의 경제와 야구와 사회가 너무 빠르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80년대와 90년대 사이 한일 야구의 변화
창설 초기 한국과 일본 프로야구 평균 연봉의 격차는 대략 4.5배 정도였다. 하지만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고 일본의 임금 수준도 빠르게 올라가면서 그 격차는 점점 커졌고 1990년대 이후에는 8~9배 정도, 정점이었던 1997년에는 15배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게 됐다. 한국의 기업들이 더 이상 일본 프로야구에서 수준급의 능력을 보여준 선수를 데려올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반대로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그 격차는 다시 좁혀졌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다시 창설 초기와 같은 4~5 배 수준으로 돌아왔고, 한국 프로야구의 연봉 수준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2~3배 수준으로 더욱 좁혀졌다.
하지만 한국 무대에서 뛰는 재일교포 선수들을 보기는 여전히 어려워졌다. 그 사이 한국과 일본 야구의 수준 격차 역시 좁혀지면서, 일본 프로팀에서 주전이 되기 어려운 선수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전이 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한국 프로야구도 외국인 선수를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일본보다는 미국에서 뛰는 선수들을 영입하는 것이 더 '가성비 높은' 선택지로 떠올랐다. 현역의 재일교포 선수들이 '2세'에서 '3세'로 넘어가면서 한국이라는 무대에 대한 향수나 동질감이 빠르게 희석된 것 역시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재일교포 출신 타격왕 고원부1986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고원부는 이정훈, 장종훈 등과 함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89년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타격왕에 올랐다. 은퇴 후에는 태평양 돌핀스에서 타격코치를 지낸 후 나고야로 돌아가 통신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 김은식
재일교포 통해 보는 한국야구사의 단면
한국 야구 무대에서 재일교포 선수들의 흥망성쇠는 그대로 한국 야구의 발전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한국 야구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방문 경기를 보며 야구를 배웠고, 그들의 힘을 빌려 일본 야구에 도전했으며, 그들과 상대하면서 일본 야구에 맞설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의 경제 수준과 야구 수준의 격차는 빠르게 변화했고, 이제 한국의 야구인들이 일본 야구에 대해 가지는 경외심은 크지 않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재일교포들은 한국 야구가 발전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외부 자원이었고, 사회경제적인 조건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그 자원을 활용해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특히 그것이 이웃 나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평범한 방식의 교류였다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았을 집중적이고 밀도 높은 학습과 영향의 과정이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재일교포라는 특이한 조건의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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