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잡지에서 찾은 '진짜' Y2K 패션의 정수
돌아온 세기말 트렌드, 이게 대체 왜 유행일까 궁금하다면
오래된 잡지나 이미 수명이 다 한 물건, 잊힌 사람들을 찾아 넋 놓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궁금하고, 궁금해서 찾아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상한 구경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패션 브랜드들의 Y2K 컬렉션
▲ 자라의 Y2K, METABUS 페이지 ⓒ 아이티엑스코리아
물론 자라의 홈페이지는 이런 상상보다 더 '힙'하다. 'Y2K, METABUS' 카테고리를 클릭하니 색색의 헤어스타일을 한 아바타들이 나를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Y2K CREATURES'. 세기 말을 만들어가는 존재들이란 뜻일까? 자라의 Y2K 컬렉션은 3D아바타를 기반으로 하는 가상현실 플랫폼 제페토와 협업한 결과다.
▲ 지그재그 큐레이션 페이지 ⓒ 지그재그
2000년대 당시 이런 패션 아이템을 애용했던 이들이 돌아온 이 유행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역시 다시 유행이 올 줄 알았지!"라며 카고바지를 꺼낼까? 아니면 "대체 이게 왜 다시 유행이지...?" 하고 의문을 품을까?
자라의 Y2K 페이지에서 소개하는 아이템은 초커 디테일의 박시한 니트, 일부러 옷감을 빈티지하게 만든 크롭니트, 핑크색 아기공룡모양 가방, 청키 힐 부츠 등이다. 스크롤을 조금만 내리면 이 아이템들이 빙빙 돌면서 마치 게임 서버에 접속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두 마디로 어떻다고 정의하긴 어렵지만, Y2K패션을 '3줄 요약' 느낌으로 접하고 싶다면 이런 큐레이션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이것으로 Y2K패션에 대한 나의 아리송함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니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y2k aesthetic(미학)'을 검색했다. 여러 톤의 핑크색 아이템과 체인, 벨트, (90년대에 '쫄티'라고 불렸던 핏의) 크롭 탑, 투명한 CD플레이어, 펄 립글로즈가 등장했다. 더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찰나, 'y2k aesthetic'을 10분여내로 설명해주는 영상이 눈에 띄었다.
패션 뿐 아니라 음악이나 인테리어에도 Y2K 무드는 반영되었고,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크롬, 아이스블루 등의 색상이 뮤직비디오나 의상에 활용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유튜버가 일러준 내용을 잘 기억하면서 오래된 잡지를 다시 뒤적거렸다.
크롭탑, 90년대엔 쫄티였어
▲ <ELLE GIRL> 2003년 6월호 ⓒ 아쉐뜨넥스트미디어
▲ <ELLE GIRL> 2003년 6월호 ⓒ 아쉐뜨넥스트미디어
2000년 1월호 <엘르>에는 'Y2K 패션 오디세이'라는 코너가 있다. 영화 속 장면들에 근거해 몇 가지 패션 키워드를 제시하는데,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입은 블랙 롱 코트 스타일이나 실버, 홀로그램 광택이 도는 의상, 몸에 달라붙은 점프수트가 1990년대 말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을 짚는다.
1996년 6월호 잡지 <오렌지룩>과 2001년 3월호 잡지 <싸가지TV>에서도 '한마디로는 설명 못하지만 유행하는 그 스타일'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싸가지TV>에서 2001년 봄 스타일로 제안하는 건 골반에 맞춰 입는 패턴 스커트와 가디건이다. 하의는 오버사이즈로, 상의는 몸에 딱 맞는 핏으로 입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구한 잡지 <오렌지룩>은 1996년에 발행된 것이지만 소개된 스타일링은 'Y2K'스럽다. 이 잡지에 따르면 민소매와 팬츠를 매치할 때는 다음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상하의 색상 배합에 주의한다. 같은 소재로 매치할 경우에는 산뜻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통이 넓은 팬츠에는 몸에 꼭 맞는 슬리브리스를 매치 시키는 것이 좋다.' 모델들은 배꼽과 골반라인에서 시작되는 바지를 입고, 렌즈나 테에 컬러풀한 색감이 들어간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 <오렌지룩> 1996년 6월호 ⓒ 하늘미디어
▲ <오렌지룩> 1996년 6월호 ⓒ 하늘미디어
중고거래에서도 핫한 'Y2K' 키워드
이렇게 잡지에서 아이템을 보고 구매하던 유행의 탄생을 지나온 지금, 2000년대 초반의 디자인이 살아있는 중고 아이템을 구하는 이들도 많지 않을까? 물건들의 톤과 취향이 일관되지 않은 채 무작위로 모인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 등에서 'Y2K' 키워드는 더욱 과감하게 재현됐다.
색색의 퍼가 트리밍 된 바지나 카모플라쥬 패턴의 미니스커트, 나일론 소재의 긴 바람막이, '갸루(특유의 화장법을 한 여성을 지칭하는 일본어)', '하이틴' 스타일의 키링 등. 사실 난 워싱이 심한 청바지는 절대 다시 유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이 아이템까지 Y2K 콘셉트로 팔리는 걸 봐버렸다. 역시 유행은 '존버'가 답인가보다.
▲ <오렌지룩> 1996년 6월호 ⓒ 하늘미디어
옷으로 시작해서 정서로 완성되는 게 스타일이다. <오렌지룩>의 앞쪽 페이지를 장식한 나인식스 뉴욕과 인터크루 광고에서 모델들은 딱 붙는 민소매 티셔츠나 수영복, 오버롤을 입고 있는데, 사진 속 포즈나 빛의 노출 정도가 어쩐지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이는 사진의 특징을 공유하는 듯하다.
거기 말고도 어디서 본 것 같아서 계속 보고 있자니, 아까 자라 홈페이지에서 날 쳐다봤던 제페토 아바타들의 표정과 똑같아서 흠칫 놀랐다.
▲ <오렌지룩> 1996년 6월호 ⓒ 하늘미디어
▲ <오렌지룩> 1996년 6월호 ⓒ 하늘미디어
<오렌지룩>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1950년대 아메리카의 여유로운 낭만과 세련된 개성을 표현하는 복고풍 패션잡화 FOSSIL.' 소개된 파슬의 선글라스들은 패션 커머스에서 본 제품들이나 힙한 아이템으로 꼽히는 사이파이 선글라스와 비슷한 디자인 요소를 공유한다.
그렇다. '복고'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는 사실을 'Y2K'에 빠져 잠깐 잊고 있었다. 세기말 패션을 잘 들여다보면 또 다른 시대의 복고와 유행이 겹쳐져 있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스타일을 세세히 해부하는 건 돌아온 Y2K 아이템을 구경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엔터테인먼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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